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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운 Jun 04. 2024

03. 최부자의 정신적 지주 최진립 장군

충절을 기리는 용산서원을 찾아가다

   나는 경주 최부자의 가훈 형성의 배경을 보고 최진립 장군에 대해 글을 적어보았다. 그는 초대 경주 최부자인 ‘최국선’의 조부로써 최부자 가훈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정무공 최진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울산, 언양, 경주 일대에서 왜적과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시에는 결사대 수백 명으로 또 다른 무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으로 책봉되었고 병자호란 시에는 용인전투에서 집안의 시종들과 함께 분전하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공은 관직에 있을 때 청렴하여 청백리로 녹선 되었었다. 당대에는 재산을 모으지 않아 근검절약과 청백리 정신을 몸소 실천하므로 해서 그의 행실이 후대 최부자 가계에 영향을 미쳐 전승되게 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시집온 며느리들은 삼 년간 무명옷을 입어라.”는 근검절약을 가문 스스로 실천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깨끗하게 재산을 형성하도록 하는 바람이 깃들어 있다.  


 그는 임진왜란시에 의병을 일으켜 경주 및 울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그러한 의병의 분전으로 도망간 군사들이 모이고, 경주부를 탈환하는 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후일에 과거시험 무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무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 함경도 변방을 비롯한 전략요충지를 두루 옮기며 국토방어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조정으로부터 63세에 전라우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가 또 특명으로 공조참판에 제수하자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즉 “일개 무인으로 분수에 넘치는 아경(亞卿)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조정은 “맑고 절조 있는 신하를 가상하게 여겨 장려하는 바이니 사양하지 말라.”하고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겸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최진립 장군의 겸손한 성품과 무조건적인 나라에 대한 분골쇄신의 충정을 읽을 수가 있다. 그 당시 권력과 명예를 움켜쥐기 위해 이전투구하던 사대부계층의 이기적인 행태에 대비해 보면 순수한 충의가 밝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겸손하고 청렴한 성품과 노구를 이끌고 출전하여 전사한 충의를 보면서 그의 숭엄한 내면의 세계에 대해 나름대로 적어보기로 한다.     


  첫째로 그는 생의 마지막을 장엄하게 장식한 살신보국의 충의를 지닌 장군이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귀히 여겨 죽는 순간까지 연명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더구나 권력과 부와 명예 등 호사를 다 누리던 입장에 있던 사대부계층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극소수의 우국충정에 불타는 의기 넘치는 충신들만이 순국이라는 장엄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최진립 장군은 임진왜란시 의병활동에서 보듯이 의분에 넘치고 용맹스러운 무인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보아야 한다. 스스로 힘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차근차근 승진하여 변경의 절제사 등을 역임하고 무인에게는 파격적인 호조참판에 제수되기도 한다. 그는 국가가 자신에게 내린 벼슬이 과분하다고 여겨 선뜻 나아가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벼슬이니 수용하라고 명령하니 그는 감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키워주고 인정해 준 나라에 목숨을 다 바쳐 충성을 하겠다는 자발적인 발로가 형성된 것이리라.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사람을 위하여 모양을 낸다(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라는 고사에서 보듯이 그는 자신을 알아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내 늙어 비록 잘 싸우지는 못하지만 싸우다가 혼자 죽지도 못하겠는가(老者雖不能戰 獨不能死耶).”는 그가 남긴 유언으로 비석에 새겨져 있다. 참으로 무인다운 말이다.


 둘째로 인생의 유한함을 아는데서 오는 의미 있는 생사관이다. 동물도 죽을 곳을 찾아가듯이 사람도 응당 죽을 때와 장소를 찾는 게 운명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진리를 모르고 어리석음에 빠져 영원히 살기를 갈망하는 노욕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범부도 대부도 다 마찬가지로 극복하기 힘든 본능의 지배를 받기에 끊어 내기가 어렵다. 그것을 극복하는 극소수의 사람은 인생의 유한성을 알고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가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지혜로운 자들이다. 그들은 순한 시절을 만나면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 살아가지만 시련의 시절 즉 국난을 만나면 여생을 바칠 절호의 기회로 삼는다. 한평생 한도 원도 없이 살아왔고 나라로부터 과분한 은혜를 입었으니 남은 시간을 전장에 나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용기와 의기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최진립 장군이 대표적인 인물로 그의 병자호란 때의 마지막 전투는 그가 죽을 최적의 시간이요 장소인 셈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 또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순간과 흡사하다. 그는 용인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스스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는 종 ‘기별’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던지며 옷을 입어 독전하라고 외친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흉탄을 맞고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의 옷을 조카 ‘이완’에게 입히고 대장기를 흔들며 독전케 하는 장면이 떠오르게 한다.


 경주 최부자의 독립운동에의 참여는 선조인 최진립 장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왜적에 의한 임진왜란은 그들의 실패로 끝났지만, 또 다른 세기의 왜적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경주 최부자는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겉으로는 농업경영에 집중하였지만 속으로는 기어코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각오를 가졌던 것이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 선생은 독립자금을 백산 안희제를 통하여 꾸준히 보내면서 조국 광복의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경주 최부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본인 자선을 다하고 최고의 단계인 국가를 되찾는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모범을 보인 명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2022년 10월 말 최진립 장군이 성장한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로 가서 그의 자취를 더듬고, 그를 기리는 용산서원을 찾아갔다. 이조리는 동쪽으로 남산이 길게 뻗어있고 서쪽으로는 형산강이 넓은 들판을 적시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이곳이 경주 최부자의 오랜 세거지이며 만석꾼의 부를 형성한 터전이기도 하다. 서원 입구에는 한그루의 오래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가고 외삼문인 청풍루가 새롭게 단장을 해가고 있었다. 서원의 경내를 천천히 둘러보고 서원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저 멀리 서쪽으로 펼쳐진 영남알프스의 산록을 조망해 보았다. 용산서원은 숙종시대에 건립된 사액서원으로 용산서원 편액은 조선 고유의 서풍인 동국진체의 개척자인 ‘이서’가 쓰고, 기문은 성호사설로 유명한 ‘이익’이 지었다. 후일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4년에 복원되었던 역사를 안고 있는 서원이다. 성리학을 숭상하던 조선시대에는 무신들에게 사액서원을 내리는 것은 아주 드문 일로서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공적과 인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등 뒤로 자비스러운 남산을 업고 앞으로는 어머지 젖줄과 같은 형산강이 마음을 적시며 저 멀리 산록의 우뚝 솟은 기상을 장군은 어릴 적부터 몸에 담았을 것이다.


 나는 서원의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저 멀리 펼쳐진 영남알프스의 산록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본다. 북쪽으로는 단석산이 펼쳐지고 저 남쪽 아래로는 신불산과 영축산이 연결되어 낙동정맥의 정기가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단석산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화랑의 주요한 수련현장으로 김유신 장군의 칼날로 거대한 암벽이 두 개로 갈라졌다는 전설로 붙여진 이름이다. 영남알프스의 영취산 아래에는 천년고찰 통도사가 자리 잡아 자비와 깨달음의 청정도량으로 수행승과 재가불자들이 정진하고 있다. 사람의 인성과 기질 형성에는 자연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그에 감응하여 자연의 덕목을 닮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최진립 장군은 이러한 자연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 같은 웅장한 산의 늠름한 기상과 어머니 같은 강의 포근함을 비롯하여 인근의 불교유적지로부터 자비심을 배워왔다고 본다.  


 내가 용산서원의 대청마루에서 앉아 보니 짧은 시간이지만 그리운 듯 잔잔한 고동이 울리는 것을 보니 분명한 명당터라고 여겨졌다. 나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어디론가 끊임없이 뻗어가는 산맥을 바라보면 태고의 정적과 함께 인간의 발자취가 뒤섞인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느끼곤 한다. 특히 날 저문 저녁에 희미한 실루엣으로 비쳐 보이는 그 흐름은 나의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가는 모습 같기도 하다. 그 그리움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나는 역사의 인물들은 나와 맺은 인연의 연결고리처럼 여겨지기에 먼 길을 달려와 찾게 되는가 보다. 나는 그때 그 장소에서 느꼈던 감흥을 되살려 장군을 추모하여 한 편의 시조를 올려본다.   


        노장의 출사표     


벼슬을 은퇴하니 오랑캐가 쳐들어 왔네

노구를 이끌고서 전장으로 나서니

서산에 저무는 해가 더욱 붉게 빛나네 


재산이 내 것인가 명예도 내 것인가

모두가 맡겨다 논 우리 모두 것이지

사무친 조국의 은혜 목숨 바쳐 갚으리     


가문이 잘돼 온 건 모두 다 하늘의 은혜

메마른 세파 속에 포근한 정 가르쳐 준

그 정신 사방에 퍼져 우리 모두 구했네     


 나는 말해 본다. 최진립 장군은 가문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한 선비이자 장수로서 충성과 효를 동시에 실천한 인물이다. 진정한 충은 효에서 비롯하기에 가정에서 효를 배우고 실천하지 못하면 충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인생 전부가 충효로 채색되어 있기에 후손들은 감화하여 그의 행실을 가문의 귀감으로 삼은 것이다.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것은 국가가 가문의 본체이며 개인은 가문의 계승자라는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선생이 독립운동을 통하여 그것을 완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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