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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운 Jun 11. 2024

04. 최부자와 뜻을 같이 한 백산 안희제

독립운동자금의 젖줄 백산상회를 찾다

  일제강점기 때 백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체제에 순응하여 평민으로 살아가는 길, 기업을 차려 부를 축적하는 길, 관리나 군인이 되어 출세하는 길, 조국 광복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길 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길은 일시적 영달은 맛보았으나 후일 불명예를 지게 되거나, 고난의 길을 스스로 자초하였으나 역사에 찬란한 이름을 남기기도 하였다. 고난의 길을 간 사람들은 인의(仁義)를 바탕으로 한 애국애족의 부름에 양심이 응답하여 험난한 길을 가서 전재산과 목숨까지도 바치려는 용단을 보였던 것이다.


 대부분은 적극적인 독립운동 대신 무난한 삶을 사는 길을 가고 극소수의 의인들은 독립운동의 험난한 길을 갔을 것이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 선생은 나라를 잃은 현실을 한탄하며 보유하고 있던 부(富)를 조국 독립운동에 제공하였다. 백산 안희제를 통하여 군자금을 보내고 국내의 독립투사들을 은밀히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한 기업가들은 누가 있으며 어떤 사람들인가? 대표적으로 백산상회를 경영하던 안희제, 럭키그룹의 설립자 구인회, 안희제와 백산상회를 공동경영한 현재 GS그룹의 설립자 허만정, 효성그룹의 조홍제, 교보생명의 신용호, 동화약품의 민강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유한양행의 설립자인 유일한 박사는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안희제는 경남 의령 출신의 선비로서 한학을 배우고 공맹의 인의사상을 숭상하였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자 학문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조국을 되찾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비장한 글을 남기고 독립전선에 뛰어든다. 먼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실상을 파악하고 절대적으로 독립운동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상업의 길을 택한다. 거의 전재산을 처분하여 부산 중앙동에 백산상회를 열어 외형상으로는 상업을 하여 수익을 올리고, 뒤로는 축적한 부를 은밀히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보냈다. 자신의 백산상회을 통해 경주 최부자, 구인회, 허만정 등으로부터 독립자금을 수금하여 영업망을 통하여 송금하거나 인편으로 전달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노골화되어 국내 활동이 어렵게 되자 만주로 건너가 직접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의 독립운동 행적이 발각되어 일제에 체포되어 가혹한 옥고를 치르다 그 후유증으로 출옥 후 3시간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일제는 출옥을 시켰으나 사실상 사법살인을 한 것이다. 얼마나 일제의 고문이 잔인하였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수단으로 상업을 택하여 일제의 감시를 교묘히 피해나갔지만 조국의 독립을 앞두고 눈을 감았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는 농업기업인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과 수시로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동참하는 동지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 당시에는 민족자본에 의한 공업이 태동기에 있었기에 상거래와 농업이 중요한 수익창출의 수단이었다. 그들의 근저에는 기업인으로나 선비로서 가져야 할 덕목인 인의의 정신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의기가 상통하였던 것이다. 즉, 인간으로서 궁극적인 목표인 자기의 완성과 국민으로서 나라를 구하려는 애국혼이 숨 쉬고 있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나라가 없는 데 개인의 성취와 행복이 있을 수 없으며, 민생을 수탈하고 민족혼을 말살하는 일제의 만행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기에 의로운 길로 가게 된 것이다.


 안희제! 그는 유능한 상업인이자, 설득을 잘하는 노련한 세객이며, 대의를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선비이며, 본심을 감추면서 목적을 성취하는 담대한 자객이라고 할 수 있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수만리 발품을 파는 행보와 마지막에 본심을 드러내어 산화하는 그의 모습에 나의 마음이 진하게 울린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을 도운 기업가들은 만약 조국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경제원리에 의거 이윤창출을 극대화하는 기업활동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조국이 국권을 상실한 상태에서는 기업활동의 우선순위를 조국광복에 두고 은밀하게 창출한 부를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다. 친일매판자본으로 급성장한 기업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일제로부터 각종 인허가 등 특혜를 받고 독과점으로 짧은 기간에 급성장하였고 광복 후에는 재벌그룹을 형성하는 등 지금까지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광복 후 일제의 적산을 불하받고 한국동란 후 국토개발과 기간산업 육성시책에 편승하여 기업을 키워왔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도운 기업들은 몇 개를 제외하고는 재벌그룹에 포함되지 않고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경제원리에 의한 기업활동보다는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조국광복이라는 지고한 덕목을 우선시하였기 때문이다. 잘못하여 일제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될 경우에는 기업의 간판을 내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생명도 위험해지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사실 그들은 기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기업을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구인회 선생과 조홍제 선생은 중앙고보에 들어가 일찍이 6.10 만세운동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룰 정도로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일한 선생은 미국에서 콩나물, 숙주나물 사업에서 출발하여 국내에 들어와서는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제약사업을 하였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국내진공을 위한 OSS대원으로 고된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비추어 볼 때 그들은 국가를 우선시하는 애국기업가이며, 개개인은 독립운동가인 것이다.


  독립운동을 위한 기업활동을 주도하고 독려한 장본인이 안희제 선생인 것이다. 다른 분은 사실상의 기업활동을 하였으나, 안희제는 백산상회라는 영업조직망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뜻이 있는 의로운 기업가를 발굴하여 은밀히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대담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의로운 인물을 파악하는 안목과 세평에 대한 정보수집 능력은 탁월한 것이다. 만약 그가 이익에 어두운 상인이었다면 모금한 자금이 온전히 상해임시정부에 전달되었겠는가. 후일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 선생이 자기가 보낸 군자금이 한 푼도 누락되지 않고 상해임시정부에 전달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희제를 존경하였다고 한다. 백산상회를 통하여 보낸 독립운동자금이 전체의 반을 넘었다고 하니, 안희제가 없었다면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은 매우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그가 체포되어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한 인물을 밝히라는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밀을 지켜준 강한 정신력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보낸 독립자금은 신흥무관학교의 훈련 및 유지비용으로, 총기를 구입하는 군자금으로, 의열단의 거사를 위한 폭탄제조 비용으로 피같이 사용되었다. 만약 그 자금을 유용한다면 그것은 젊은 청년들의 목숨을 빼앗고 위태롭게 하는 이적행위와 같은 것이기에 엄중하게 관리하였던 것이다.


  을사늑약에 이어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먼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람은 우당 이회영 선생과 석주 이상룡 선생이었다. 그들이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의 횃불을 올렸다면 백산 안희제는 국내에서 마련한 독립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공급하는 파이프라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나라를 찾는 데는 의기 넘치는 인재들과 그들을 기르는 자금이 필수적이다. 독립운동을 도운 기업가들은 직접적으로 무장투쟁의 대열의 전면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가능하도록 재정적인 뒷받침을 하는 후방의 보급기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굶어가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젊은 인재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목숨을 건 후견인을 자처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망명정부의 실상을 보면 변변한 청사도 갖추지 못하고 끼니조차 거르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 광복의 길은 험난하였다. 그러한 현실을 전해 듣거나 목격하고서 안희제 선생은 불같은 열정과 피 끓는 의분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겉으로는 영리를 추구하는 상인이었으나 속으로는 광복을 찾아가는 선구자인 것이다. 드러나는 명예를 뒤로하고 음지에서 고난을 감내하는 고독한 연기자와 같은 것이다. 정녕 안희제를 비롯한 기업가들의 독립자금 조달이 없거나 미약했다면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사들의 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리니 그들의 공적을 드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그들은 기업활동을 통하여 번 돈을 조국광복에 우선적으로 제공하고 경영의 노하우를 광복 후에 적용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결단을 내린 것이다. 몇 안 되는 독립운동을 도운 기업가들의 공적을 선양하여 후세 교육의 사표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애국적 기업은 민족을 사랑하는 착한 기업이 리니 소비자인 국민들은 그런 기업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기업가인 백산 안희제 선생을 찾아 부산 중앙동에 있는 백산기념관을 탐방하였다. 백산기념관이 있는 중앙동은 현대사의 많은 자취를 안고 있다. 6.25 피난시절에는 대청동, 영주동, 보수동 고지대에 천막집이나 판잣집을 짓고 부산항 부두에 내려와 하역을 하던 실향 노무자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특히 원산 철수 때 수많은 피난민들이 부산과 거제도에 일시 정착을 하였고 휴전과 동시에 서서히 부산을 빠져나갔다. 아직도 부산에는 이북 실향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나름대로 터전을 잡아 안착하고 있다.


 피난시절의 애환과 망향을 상징하는 장소가 곳곳에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40 계단이다. 지금과 달리 전화가 귀한 시절이라 헤어져 가족과 연인들을 만나기가 어려워 계단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새끼줄에 쪽지를 걸어두고 기별이 오기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40 계단에 주저앉아 가족을 기다리고 연인을 그리던 그 장소에 나도 마음이 닿아 쉬었다 간다. 그리고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그 시절 유행가가 인근의 카페에서 잔잔이 흘러나오고, 거리의 악사가 기타를 들고 그 시절의 노래를 부른다.


 중앙동이 6.25 한국동란으로 부두노역을 일자리로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헤어지고 하였다면, 일제강점기에는 부산역이 가까이에 있어서 상거래의 중심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안희제 선생이 백산상회를 열고 전국의 물산을 집하하여 전국으로 배송하며 이윤을 창출하였을 것이다.  급격한 주변환경의 변화에도 백산기념관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예전 보다 더 넓은 공간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도시의 쇠락은 그 공간을 넓히고 주차의 불편을 해소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추모하고 기념하는 환경을 만들었으니 이 또한 시절이 가져온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입구에는 백산기념관이라는 간판과 기념석이 서있었고 아담한 벤치에는 황혼기 노부부가 지나간 세월을 추상하고 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1층 기념관에 이르니 입구에는 안희제 선생의 흉상이 단아하게 서있고, 좁은 공간이지만 안희제 선생의 일대기를 그렸고, 백산상회의 옛 사진과 백산무역 주식회사로 바뀐 연혁이 옛 자취를 남겨주고 있었다. 거기서 주목할 점은 백산무역 주식회사의 주주명부였다. 최대 주주는 마지막 경주 최부자인 최준 선생과 안희제 선생이었고, 허만정 GS그룹 창업주의 이름도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백산 안희제 선생의 흉중에 숨긴 크고 깊은 뜻을 떠올리며 한 편의 시조를 지어 올려본다.

    

        백산이란 산   

  

백산이라 지은뜻 무슨 비밀 있다던가

눈 내린 설산인가 텅 빈 마음 빈산인가

오로지 조국을 위한 맹세인 줄 알겠네  

   

방방곡곡 순행하다 뜻 맞는 동지 찾고

겉으로는 이문 찾고 속으로는 의를 찾네

변장한 투사의 모습 이다지도 신중할까 

    

텅 빈 산에 우는 새야 너는 어찌 생각하나

모든 걸 다 비우고 숨긴 큰 뜻 지키려는

큰 산에 눈을 이고 선 청송이라 말하네  

   

 중앙동에 인근 한 대청동 산록에는 중앙공원이 있고 충혼탑. 민주공원, 광복기념관이 있다. 나는 주말에는 종종 중앙공원 옆에 있는 중앙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저 멀리 구덕산과 영도, 송도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중앙공원은 중앙동처럼 부산의 중심에 있는 공원이다. 용두산 공원이 관광객들의 주요 탐방지이지만 중앙공원은 시민의 안식처이자 애국충혼과 민주열사들에 대한 기림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연로한 어르신들이 먹거리와 음료를 보자기에 담아와 소담을 나누며 구덕산 마루에 석양이 물들어 오면 귀가하기도 하는 정겨운 공원이다. 중앙공원에는 사각 벤치가 나무그늘 아래 배치되어 있어 각자의 선호에 따라 동서남북 방향으로 앉아 풍광을 조망하거나 머나먼 각자들의 고향을 그리고 있는 듯 보였다. 그중 많은 분들이 중앙동 쪽의 북항을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면 실향민이 고향을 그리고 있지 않나 상상해 보기도 한다.


 중앙공원에서 마주 보이는 대청공원 중턱에는 충혼탑이 웅장하게 서있으며, 중앙공원 정상에는 대한해협전승기념탑이 있고 그 아래에는 민주공원으로 민주항쟁으로 몸을 바친 열사들을 기념하고 있다.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 중앙공원 정원에는 부산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조각상들이 배치되어 있어 중앙공원은 호국정신과 독립정신, 민주화정신이 함께 하여 명실상부한 부산의 충혼과 정기가 살아 숨 쉬는 거룩한 장소임을 말해 주고 있다.


 중앙도서관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는 광복기념관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벽면에는 부산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박재혁, 박차정, 김법린, 안희제, 장건상, 한형석 선생들이 위쪽에 배치되었고, 그 아래에는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가 함께 하고 있다. 그 옆 돌화분에는 노란 국화꽃이 담겨 그윽한 향기가 추모의 향내음이 되어 풍겨오고 있었다.


 나는 백산 안희제 선생에 대하여 평가해 본다. 그는 선비이자, 상인이며, 협상가이자, 투사이다. 보수적이고 침착하면서도 속진에 때를 묻혀 재물을 이루는, 귀천을 넘나들며 숨겨온 목표를 향해 내달린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어눌한 척 하지만 진정성 어린 말로 상대를 설득하여 거래를 성사시키고, 대의를 위해 부를 의롭게 사용하기를 권유한 세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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