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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운 Jun 25. 2024

06. 우당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의열단 그 뜨거운 피와 김산의 아리랑

 우당 이회영 선생은 삼한갑족이라는 명문가에 태어나서 유학을 기본으로 신학문을 배웠다. 그는 을사늑약 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상설을 헤이그 밀사로 보내어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토록 시도하였다. 그 후 가문의 전재산을 처분하여 가솔들을 이끌고 서간도로 고난의 길을 가게 된다.

 그는 서간도에서 이상룡, 김동삼과 함께 경학사를 설치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자립을 통한 무장투쟁운동의 횃불을 올리기도 한 선각자이다. 그는 본래 선비이나 기독교에 입문하였고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아나키즘을 적극 수용하여 ‘영원한 아나키스트’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는 의열단, 다물단 등에 아나키스트를 투입하여 강렬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죽는 그 순간까지 폭력에 의한 항쟁을 계속하게 된다. 보다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위하여 위험지구인 만주로 잠행하다가 조직 내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순절하게 된다. 그는 스스로 조국 광복이라는 사명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갔으며, 막대한 부를 조국을 위하여 다 바치고, 굶어가며 광복의 그날을 고대하였지만 이국땅의 감옥에서 싸늘하게 죽어간 것이다.      


 그에 대해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어 적어본다. 그는 처음 중국에 입성하여 찍은 사진 외에 또 다른 사진이 없고 남긴 시나 글 또한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독립운동을 하는 순수한 독립지사라 해도 기념사진이나 독려하는 글이나 심경을 표시하는 시를 남길 법한데 전해오고 있지 않다. 철저하게 자신의 행적을 숨기고 겉치레보다는 실질을 중시하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한 것인가.

 다음으로는 어떻게 자신을 포함한 6형제를 설득하여 중국으로 망명하게 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자신은 넷째로서 위의 세분의 형들을 설득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고, 더군다나 가문의 전재산을 처분하고 가솔들 전부를 이국땅으로 이끌고 가는 험난한 여정을 기획하여 실행에 옮긴 점은 실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숭상하던 유학과 신앙인 기독교를 저버리고 무정부주의의 극단적인 아나키스트가 되었다는 점이다. 조국을 강탈한 일본에 맞서기 위해서는 온건한 사상과 외교적 자세로는 결코 광복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무력을 앞세운 폭력만이 목적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에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아나키즘이 갖고 있는 ‘지배하는 자도 지배받는 자도 없다.’는 사민평등사상에 매력을 느껴서일까. 모두 다 해당되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개인의 소신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든다.


 나는 우당 이회영 선생을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는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시대상황의 변천에 맞춰 노비를 해방시키고 모든 사람을 귀천을 따지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점이다. 심지어 양반가의 부인에 대한 재혼을 금지하는 유교의 엄격한 법도를 거스르면서도 과부로 지내던 자신의 여동생을 재가시키기도 하였다.

 둘째로 모험적인 정치기획가이었다. 고종의 밀서를 이상설을 통해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토록 하였고,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키려는 비밀공작을 은밀히 추진하였으나 고종이 독살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셋째로 강렬한 열정을 가진 혁명가였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군사를 조련하여 그들을 무력항쟁에 투입시키고, 의열단, 다물단 등 의열조직을 통하여 일제에 강경 대응하였다. 광복을 위한 수단으로써 아나키즘을 수용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을 불러들여 피 끓는 혈기로 무장시켰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전기를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면이 많이 있었다. 먼저 상해에서 활동하던 중 독립운동을 하러 온 청년에게 숙식을 제공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자신의 옷을 전당포에 맡겨 그 돈으로 밥을 지어 먹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많은 돈을 독립운동에 다 바치고 정작 본인과 가족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다음으로는 적극적인 무장독립운동을 위해 동지와 가족의 만류도 뿌리치고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화북으로 가다, 밀고로 잡혀 대련감옥에서 기밀을 끝까지 지켜 모진 고문으로 옥사했다. 나는 그의 광복을 위한 강렬한 의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그가  뜨거운 의혈로 목숨을 건 사지로 당당하게 나아가는 청년들을 보내면서 속으로 울고 있는 부드러운 내면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기에 그는 냉철한 혁명가이면서도 동포 모두를, 그중에서도 청년들을 사랑한 휴머니스트라는 데 그 누가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만약 이회영 선생이 없었더라면 신흥무관학교도 청산리대첩도, 윤봉길 의사의 거사도, 의열단의 쾌거도 없었을 것이며 조국의 광복은 요원하였으리라. 그는 외교적 독립노선에 반대하고 극열한 무장투쟁을 주장하였었다. 그의 주장이 받아들이지 않자 만주로 마지막길이 될지도 모르는 운명의 길을 자초하다가 장렬한 순국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비운의 인물이지만 그가 각오했던 길이기도 하였으리라. 그는 뜻을 같이하여 망명한 이상룡 선생의 뒤를 이어 이국땅의 싸늘한 감옥에서 수만리 대장정을 죽음으로써 마무리하였다.        

 

 이회영 선생은 본래 유학을 숭상하는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유교에 먼저 입문하였고, 유교의 신분차별에 반발하여 노비를 해방시키는 등 사민평등을 주장하는 양명학을 수용하기도 였다. 그리고 상동교회에서 혼례를 올리는 것을 계기로 기독교에도 입문하였고, 마지막으로 생애의 말기인 1920년대에는 무정부주의인 아나키즘에 매료되어 극열한 무장투쟁을 전개한 다원적 종교주의자였다.  

 이회영의 주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몇 명이 있다. 대표적으로 이상설과 신채호, 김창숙, 류자명을 들 수 있다. 이상설은 그의 인척으로 동문수학하였고 외국어에 능하여 이회영의 은밀한 계획 아래 고종의 밀서를 들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하였다. 이후 이회영과 함께 고종의 망명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니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민족주의자로서 조선상고사를 편찬하는 등 고대사에 대한 연구를 하여 민족정기를 일깨워 독립운동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뜻을 품고 있었다. 그는 ‘한국통사’를 지은 박은식 선생과 함께 역사를 통하여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그 의식의 바탕하에서 민족자주독립의 투쟁력을 기르고자 하였다. 그는 북경도서관에서 중국역사서 속에 드러난 조선고대사를 연구하여 그간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도 하였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등의 북방개척과 광대한 영토범위를 고증하였고,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을 본받아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로 영토의 범위가 축소되고 고착화되어 버린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그의 말이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이회영도 그 당시에 민족주의 노선을 걷고 있던 신채호의 결연한 항일무력투쟁의 의지에 감화되어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의열단 창단선언문’, 일명 ‘조선혁명선언문’을 작성하기도 하여 학자이면서도 투사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단재 선생의 의열단 창단선언문은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피를 끓게 만든 명문장으로, 일본을 강도로 비유하며 폭력만이 그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세부적인 내용을 읽어 보면 충동적인 격문이라기보다는 일제의 강도로서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며 냉정하게 비판해 나간 논설 같기도 하다.


그리고 외교적인 노력과 자치권 보장으로 타협하자는 것은 한갓 미봉책에 불과하며 투쟁의 열기를 냉각시키는 이적행위에 해당한다고 경계하였다. 일제가 강도이기에 오직 무력으로서 내쫓아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 당시 의열단 창단 멤버는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등 13명이다.


 심산 김창숙은 유학자이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민족주의, 무정부주의를 수용하여 강력한 무장투쟁을 주장한 분이다. 선생은 유학의 인의사상을 바탕으로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등과 국내의 의병활동을 전개한 경험을 살려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배출한 젊은 인재들을 통해 무장투쟁운동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더 극열한 투쟁을 위하여 아나키즘을 수용하여 중국과 러시아 등 국제적인 연합을 통하여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회영과 신채호, 김창숙은 자주 만나 무장독립투쟁을 선도해 나가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류자명은 전형적인 아나키스트로서 의열단, 다물단 등 무장투쟁단체를 지휘하고 이끈 지도자였다.    

  

 그러면 대표적인 무장폭력조직인 의열단에 대해서 알아보자. 의열단을 창단하고 육성시킨 인물은 이회영, 신채호, 김창숙, 류자명 등이라고 앞서 말하였다. 그러면 실제 행동책과 활동인물은 초대 단장을 맡은 김원봉을 중심으로 같은 밀양 출신인 윤세주, 한봉근 등 13명으로 출발한다.

 먼저 의열단장인 약산 김원봉에 대해 알아본다. 약산은 밀양 출신으로 백민 황상규 선생의 가르침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친구인 윤세주, 한봉근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국내의 종로경찰서 및 부산경찰서 투탄, 조선총독부 폭파, 동양척식회사 폭파, 일제의 요인 및 친일파 암살을 주도하였다. 해외에서는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등에 의한 황포탄 의거, 동경 니주바시 폭탄 투척 의거 등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일제는 김원봉에게 역대 최고의 현상금을 거는 등 그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니 일제가 느낀 공포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일제와 싸우기 위해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중국과 연합하여 태항산, 곤륜산 전투 등에 참전하였고, 동지이자 아내인 박차정 의사는 그 전투에서 당한 부상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숨졌다.


그 후 약산은 무도한 일제에 무차별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이념을 초월한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가니, 사회주의 노선으로 강력한 투쟁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다. 그는 아나키즘, 사회주의를 넘나든 민족주의자이지 계급투쟁을 지향하는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실제로 그는 상해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을 역임하고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였으니 어찌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음은 비운의 독립운동가이자 경계인으로 살다 간 김산(장지락)에 대하여 적어보기로 한다. 그는 3.1 운동 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하고 상해임시정부에 들어가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간행하는 일에 참여한다. 아나키즘에 매료되어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하여 무력투쟁의 방법론을 배웠다. 도산 안창호, 운암 김성숙 등으로부터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의학 공부를 하고 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하였다. 그 후 마르크스 및 레닌의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간 삼민주의를 주창한 손문의 국민당 정부와 공산주의가 합작하여 북벌을 진행하다가 손문이 죽자 장개석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국공합작은 파기된다. 그래서 광동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무자비한 백색테러를 당하고, 김산과 오성륜은 광동을 탈출하여 해륙풍(海陸豊) 지구로 들어가 장기간 저항하였으나, 국민당군에 쫓겨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생존하여, 공산당 본거지인 연안에서 활동하게 된다. 여기서 1937년에 미국의 여류작가 ‘님 웨일즈’를 만나 장시간의 인터뷰를 하여 ‘김산의 아리랑’이 탄생하게 된다. 한국의 어느 젊은 청년혁명가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이기도 민족과 개인의 비애를 함께 다룬 슬픈 아리랑이기도 하다.


 그 후 얼마지 않아 트로츠키파이니 일제의 밀정이니 하는 무고한 혐의를 받고 중국공산당에 의해 처행 된다. 수십 년이 흐른 후일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누명을 쓴 것으로 판명되어 복권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그들을 도와 일제와 싸웠건만 정작 그는 일제가 아닌 동지라고 믿었던 궁산당에 의해 죽었으니, 적도 동지도 다 변하기 마련이고 자신 이외에는 믿을 것이 없다는 교훈을 얻게 한다. 광동. 해륙풍 대탈출 과정 중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었건만 마지막은 보이지 않는 의심의 판정에 의해 죽었으니 생명은 끈질기지만 운명은 한순간에 다가온다는 걸 가르쳐 준다.


 그는 운암 김성숙, 약산 김원봉과 같이 강력한 무력투쟁을 위하여 사회주의를 수용하였으며, 그 수단으로 공산주의에 몸 담았지만 그것은 독립을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는 민족주의자임에 틀림이 없다. 독립을 위하여 공산주의로 무장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라고 말하고 싶다. 즉 계급투쟁을 위함이 아닌 항일투쟁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그 길을 밟은 것일 뿐이리라.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까지 주장하고 무신론적 유물론을 핵심 사상으로 하는 공산주의와 본질적으로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그가 의열단을 탄생시킨 아나키즘을 버리고 공산주의를 택한 것은 개인의 투쟁에 의해서는 거대한 독립항쟁의 흐름을 만들기 힘드니, 소련의 10월 혁명에서 보았듯이 민중투쟁에 의한 일본식민지 체제의 붕괴가 효율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 들어가서 사상적 배경을 기반으로 실천적 방법론을 터득하려는 의욕도 있었고, 민중운동의 불길이 번져 조국으로 확산되어 일제를 몰아내기를 바랐던 이상주의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소수인 개인의 힘보다는 불특정 다수인 민중의 힘으로 만이 민족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점에서 약산의 의열단 투쟁방향과는 노선을 달리하고 있다. 하지만 약산과 김산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독립운동을 하였던 투쟁적 민족주의자인 것은 분명하다.


 다음은 김산의 아리랑 중에서 님 웨일스가 적은 인터뷰 글이다. “비록 달성하려는 방법은 달랐지만 모든 조선인들은 오로지 두 가지를 열망하고 있었다. 독립과 민주주의, 실제로 그것은 오직 한 가지만을 위한 것이었다. 자유, 그들은 일제의 압제로부터의 자유, 결혼과 연애의 자유, 정상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자유, 자기 삶을 스스로 규정할 자유를 원했다.”

 여기서 그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자유이었으며, 그중에서 먼저 일본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하여 독립과 민주주의를 원했다는 내용이다. 이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조국의 광복과 민주주의, 자유를 위하여 방법은 달랐지만 공산주의에 일시 몸을 담은 것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의 마음속에는 공산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으나, 강인한 정신력과 치열한 투쟁력을 공산주의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공산주의식 극렬한 투쟁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광복이란 목표를 이루어낸 후에는 계속해서 공산주의자로 남아있었을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공산주의를 따른 것은 투쟁의 방식이지 자유와 민주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광복 후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으니, 고혼을 약간이나마 달래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약산과 김산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그들을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반도는 물리적인 전쟁은 휴전이지만 이데올로기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전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으로서 서로를 주적으로 대하며 증오를 멈추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민족의 비애를 지울 수가 없다. 반세기 남짓한 세월 속에서 피를 나눈 뜨거운 혈육이 이제는 피를 부르는 전쟁의 주적으로 대하고 있으니,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분단의 원인이 외세의 침략으로 파생된 것인데 민족은 원인을 제쳐두고 현상에만 집착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만약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개입되지 않는 단일정부가 수립되었더라면 전쟁의 비극과 지금껏 지속되고 있는 대립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 소 양강은 한반도를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편입하여 냉전체제에 의한 국제질서의 재편과 세력확장을 구상하고 있었으니 한민족은 그들의 포로가 된 셈이 아니겠는가.


 패전국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지만 강렬한 민족의식으로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서로를 포용하며 온전한 통일을 이루었다. 그때에 민족을 단합시키고 국토를 통일시키려는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민족주의 지도자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훌륭한 민족주의자들이 암살되는 등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열이 고착화되었다. 거기에다 6.25 전쟁은 민족의 동질성을 귀하게 여기고 외세를 배제하고 서로를 포용할 수 있는 지도자가 출현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으니, 한국동란이 몰고 온 파생적인 한은 지우기가 실로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일에는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된다는 격언이 와닫는다. 승전국의 지위를 보장받지 못한 불운과 얄타회담의 암약설, 에치슨 라인에 의한 북측의 오판, 미군정과 담합한 성급한 남한 단독정부의 추진 등이 이러한 불가역적 비극의 단초가 되었으니, 운명적 요소와 인위적 요소가 혼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를 잃은 것이 원죄이며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것이 불운이며,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난 전쟁이 비운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약산은 임시정부에서 귀국한 후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참여하였고, 남한 단독정부를 결사반대하고 김구선생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단일정부 수립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그 당시 중국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미국과 중국이 강하게 지원하였다면 가능하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소련은 일본 항복 1주일 전에 참전선언을 하였기에 사실상 한반도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하기에 어렵고, 일본을 사실상 패망시킨 미국이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도 있었는데 이해하기 힘든 형국이다. 얄타회담의 밀약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하늘만이 알고 있는지 역사는 답하고 있지 못하다.


 약산은 김구 선생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단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회담 참석 후 내려오지 않았다. 극우 반공 및 친일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남측 상황을 보고 신변의 안전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그 당시에 친일청산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친일 반민족 세력이 민주주의를 찾아간다는 미명하에 월남한 것도 일정 부분 사실이다.


 다음으로 김산은 효율적인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공산주의를 접목한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는 민족의 합리적 지도자인 도산 안창호 선생과 승려 출신인 운암 김성숙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도산과 운암은 모두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특히 안창호 선생은 공산주의를 신봉하지 않았지만 항일투쟁에 공산주의 투쟁방식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그는 남북한 양진영에서 존경을 받는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이다. 님 웨일즈의 ‘김산의 아리랑’에서 나타난 인터뷰 내용을 보면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무력항쟁을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모순과 폐해는 지금처럼 크게 부각되고 있지 못했고, 봉건주의와 신분차별 타파라는 명목에 민중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은 게 사실이다. 그 당시 공산당은 중국 내 항일투쟁의 효율성 측면에서는 부패한 군벌중심의 국민당 정부에 비해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투쟁을 한 게 사실이다. 김산은 그러한 공산주의를 독립투쟁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자 했던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그가 철저한 의지로 자신만을 굳게 믿는 독특한 인물임을 알았다. 혁명과정에서 끊임없는 시련과 좌절, 일제에 의한 수차례의 투옥과 잔인한 고문, 고문의 후유증에 의한 병마와의 싸움 등에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는 진리만이 믿을 수 있고 자신의 의지만이 그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니체의 초인과 같은 의지의 인물로 평가하고 싶다. 그는 격렬한 의분에 의해 자신을 던지는 수많은 젊은 의열단원의 개인적 투쟁보다는 인간애와 평등에 기반한 핍박받는 대중의 힘을 모아 거대한 혁명의 흐름을 만들고자 한 사상가이자, 그것을 결집시키는 행동가이며, 자신의 의지대로 이루지리라 꿈꾸는 이상주의자였다고 본다.


 나는 아나키즘으로 민족의 무장 독립운동의 횃불을 올린 우당 이회영 선생과 의열단에 대해 민족성과 국제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의의에 대해 적어 본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우 히로부미 암살로 전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의지와 투쟁정신을 알렸고,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거사로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에 의한 일제의 침략거점 폭파, 요인 암살로 단발성이 아닌 지속적인 무장항쟁에 한민족의 끈질기고 용기 있는 기질을 각인시켰다. 특히 수억 인구의 중국인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그간 한민족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낸 우월의식은 여지없이 망가져 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2천만 인구의 민족이 수억 인구의 중국이 엄두도 내지 못할 저항을 하는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진 게 사실이다.      


 나는 그 의문점에 대한 답을 민족성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한민족은 백의의 단일민족으로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숱한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극복해 나간 역사가 있다. 비록 조선시대에 당쟁에 의한 국력의 약화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왜국에게 국권을 침탈당한 패배의 역사도 있다. 그것은 민족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집권 사대부계층의 권력욕과 부패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민중은 깨어있는 데 집권층이 무능하여 발생된 체제의 문제라고 보아야 하고, 정의롭고 용기 있는 민족성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믿는다.


 반면 중국은 다수 민족으로 구성되어 역사적으로 수많은 왕조에 편입되거나 이탈하는 등 국가라는 존재에 대한 의식이 약화되어 국가를 지키려는 의지 또한 박약하였던 것이다. 단일민족은 진흙처럼 찰지게 뭉칠 수 있지만 다민족은 모래처럼 부스러져 견고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청나라는 여진족이 쇠약한 명나라를 멸하여 세웠지만 다수인 한족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기 힘든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 영국에 의한 아편전쟁, 일본과의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영토를 할양하고 만주국이라는 영토 내의 일제의 괴뢰정권 수립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남경 대학살이라는 초유의 인권유린 사태가 있었지만 군대는 물론 민중도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중화(中華)라는 자존심을 여지없이 망가뜨렸지 아니한가. 한민족이 3.1 운동을 일으켜 전국 방방곡곡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죽음을 무릅쓰고 격렬하게 저항한 것에 비하면 부끄럽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민족의 우수성과 단결력이 돋보이고, 그런 정신을 바탕으로 선각자들의 출현과 수많은 의사들의 쾌거를 있게 하였으니 그것은 예정된 것이리라. 그래서 한민족의 특성을 이해하고 믿었기에 독립의 확신을 갖고 우당 이회영 선생과 같은 무장투쟁 독립지도자가 많이 배출된 것이라고 믿는다.

 다음은 모든 것을 다 바쳐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한 우당 이회영 선생을 기리며 적어놓은 시조를 올려 본다.        

  

          구국을 위한 장정   

  

나라가 망했는데 편한 잠을 자겠는가

가산을 정리하여 고국 땅을 떠났는데

광복을 못 찾으며는 돌아오지 않으리     


낯설은 이국 땅에 잡초처럼 뿌리내려

배고픈 젊은 피를 지성으로 가르치며

저격의 때가 왔을 때 눈물로써 보냈네 


스스로 고난 찾아 수만리를 오고 가며

이름도 남김없이 한 푼 재산도 남김없이

민족의 깊은 원한을 갚을 날만 기다렸네     


 나는 말해 본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조국에 대한 무한책임을 다한 선비이자 선각자이다. 스스로를 백척간두로 내몰아 안일과 나태로 세상과 타협하고자 유혹하는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채찍질한 냉철한 수도자이다. 마지막 한 푼까지도 조국의 횃불에 불을 붙이는 연료로 던져버린 위대한 무소유의 탁발승이기도 하다. 생의 종착역까지 노구를 이끌고 가서 자신을 다 바친 순교자이자, 사무치게 그리운 조국의 뜰안에 놀고 싶어 한 고독한 방랑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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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li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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