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임청각에 부는 바람, 석주 이상룡
눈 내리는 압록강을 건너면서
석주 이상룡 선생은 유학자이자,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유학자이자 의병장이던 김흥락의 제자로서 의병활동을 한다. 1911년 전재산을 처분하여 가솔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지휘한다.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경학사를 설치하여 무장독립운동을 위한 자립기반을 마련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서로군정서를 세우고 1921년 남만통일회를 개최하는 등 서간도 일대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의 단일대오를 형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국무령이자 제3대 수반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령인 상태로 망명한 데다가 격렬한 항일무장투쟁에서 오는 정신적, 육체적 기력의 소진으로 1936년에 병사하고 말았다. 일제는 그가 태어난 문화유산 수준인 임청각을 헐어 버리고 중앙선의 노선을 바꾸어 지나게 하였으니 그에 대한 보복심리가 얼마나 강하였는가를 보여준다.
그가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국경을 넘으면서 적은 시는 나의 마음을 울렸다. 다음은 그가 적은 시이다.
압록강을 건너며
칼날 같은 날카로운 삭풍이
차갑게 내 살을 도려내네
살 도려내는 건 참을 수는 있지만
창자 끊어지는데 어찌 슬프지 않으랴
기름진 옥토 삼천리
이천만 백성
즐거웠던 부모의 나라였건만
지금은 누가 차지 했는가
이미 내 땅과 집 빼앗기고
다시 내 처자 해치려 하니
이 머리는 차마 자를 수는 있지만
이 무릎은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다
집을 나선 지 한 달 채 못되었건만
이미 압록강을 건너는 도다
누구를 위해 머뭇거릴 것인가
호연히 나는 가리라
석주 이상룡! 그는 임청각에서 태어나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학문의 열정을 예열시키고 격물치지의 깨달음에 다가가고자 했던 유학자이었다. 하지만 시절은 격량기를 맞아 국가의 안위는 외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처럼 흔들리고 마침내 나라가 망하게 된다.
나는 이상룡 선생을 그가 남긴 시를 통해 이회영 선생과 또 다른 관점에서 평가하고자 한다. 시는 사람의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 시를 통해 그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는 전형적인 선비정신의 소유자이다. “이 머리는 차마 자를 수는 있지만 이 무릎은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다.”이 싯귀에서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에 역행하는 불효이다. 나라를 빼앗겨 종이 될 수 없다와 함께 유교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고 효보다 더 높은 충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기에 유학을 철저히 숭상하는 선비임에 틀림이 없다.
둘째로 그는 나라와 백성을 사랑한 민족주의자이다. “기름진 옥토 삼천리 이천만 백성 즐거웠던 부모의 나라였건만 지금은 누가 차지 했는가.”이 싯귀에서 나타나듯 강산과 백성에 대한 애모의 정이 녹아난다. 사대부계급은 임금에 충성하는 충을 먼저 내세울지언정 백성의 아픔을 이해하고 위무해 주는 목민관은 드물었다. 그는 강산이라는 국토에서 살아가는 민초들까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그는 의분을 참지 못하는 충의지사이다. “살 도려내는 건 참을 수는 있지만 창자 끊어지는데 어찌 슬프지 않으랴.”,“누구를 위해 머뭇거릴 것인가 호연히 나는 가리라.”이 첫 번째 싯귀에서 망국에 대한 고통을 단장지애(斷腸之哀)라고 했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육체적인 아픔은 참을 수 있으나 나라를 잃은 슬픔은 정녕 참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두 번째 싯귀에서는 조국을 되찾기 위해 주저 없이 싸움터로 나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의분은 강력한 투쟁의 힘을 발산하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더 강렬한 의분의 소유자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시에서 그의 내면에 잠복된 충의와 동포애를 발견하였기에 적어본다. 그와 동향이며 함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한 일송 김동삼 선생과 서로는 같은 듯 다른 면모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고유한 기질과 생사관에 따라 독립운동을 하였다. 두 분은 유학자로서, 교육자로서 공통적인 면이 있고 인의를 바탕으로 선비정신을 실천하려 하였다. 독립운동의 역할면에서는 서로 차별화되어 일송은 무력투쟁의 최전선에서 직접 참여하고 지휘를 하고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석주는 독립단체의 통합을 통한 세력의 극대화를 위한 노력을 하였고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맡는 등 조직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같은 선비로서 문인이지만 일송은 무인적인 기백으로 투쟁의 최전선으로 갔고 석주는 배후에서 기획하고 조정하는 임무를 다하였다. 석주는 이미 60을 넘긴 연로한 상태라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다양한 독립단체의 구심점이 되는 게 맞다고 할 수 있다.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해 전략적인 틀을 만들어 나갔다면, 충무공 이순신은 전장의 최일선에서 왜적과 대적하며 전과를 올린 것과 같은 것이다.
이상룡 선생은 실로 같은 안동에서 배출된 서애 류성룡의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내면에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여 투쟁의 효율을 극대화시키려는 절제와 조절이라는 덕목을 가졌다고 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독립운동지도자의 자질과 역량을 조화롭게 활용하는 것이니 적어보기로 한다.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도자인 김구 선생은 포괄적인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유학을 공부한 선비이기도 하고, 일시 출가한 승려이기도 하였다. 그는 공주 마곡사에서 삭발을 하고 불문에 들어갔으나 금방 환속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다시 참여하였으니,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수반을 맡아 광복 때까지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도 석주 이상룡 선생처럼 다양한 독립단체를 통합하여 단일 대오에 의한 투쟁력의 극대화를 도모하였다. 그런 역량의 발현은 그의 내면적인 온후함과 외형적인 과감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는 모든 동지들에게 자상하였고 평등하게 대했다는 점에서 내면적인 온후함이며, 과감한 무력투쟁을 위해 젊은 의사들을 앞세운 폭탄투척, 암살 등은 과감성을 대변하고 있다. 위기 시의 지도자는 온후함과 과감성을 겸비하여야 하며 그것이 없으면 성공하기가 힘들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석주 이상룡 선생과 김구 선생은 많이 닮았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민족의 지도자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백범 김구 선생의 우국충정과 동포애를 실천한 부분에 대해서 적어보기로 한다. 이상룡 선생은 이회영 선생과 더불어 모든 것을 구국전선에 다 바친 의로운 인물이다. 그분들은 무장독립투쟁의 씨앗을 뿌리고 기르며 항일전선의 배후에서 큰 역할을 다하는, 전장에 비교하면 지휘통제소를 이끌었다고 본다. 그리고 김구 선생의 자서전인 백범일지(白凡逸志)에는 민족의 운명에 대한 깊은 고뇌가 배어 있고 동양의 평화를 갈망하는 큰 비전이 담겨 있다. 그는 지도자의 외롭지만 의로운 길에 대해 서산대사의 선시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인용하여 좌우명으로 삼았다.
백범 선생 좌우명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불수호난행(不須胡亂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지금 내가 걸어가는 발자취는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필히 후세의 이정표가 되리라
여기에서 본래 서산대사는 “수행을 할 때는 올바른 길을 가라,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후학들에게 영향을 끼치니 더욱더 신중하고 바르게 수행하라.”라는 의미로 비친다. 반면 백범 선생은 이 시를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떠날 때 삼팔선을 넘으면서 읊조렸다고 한다. 그가 차용하여 읊은 시의 의미는 서산대사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가 있다. 지도자는 국가와 민족의 대사를 결정할 때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되니 오직 후손들을 생각하여 어렵더라도 올바르고 사려 깊게 행동하여야 한다는 경구가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지나고 보면 남북이 분단된 비극은 열강들의 이해관계와 지도자들의 성급함과 미래를 보는 안목이 결여된 결정에 의한 것은 아닌지, 백범 선생의 좌우명 속에서 예언적 의미를 찾아본다. 그가 바랐던 것은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겨 수십 년간 민족은 고통 속에서 살았는데 또다시 분단으로 민족이 갈라져 싸우는 더 큰 불행을 막자는 점이다. 그는 중국에서 손문이 죽자 국공합작이 파기되고 국민당의 백군과 공산당의 홍군간의 동족상잔의 참혹한 현장을 보았다. 광저우에서 시작한 국민당 백군에 의한 홍군과 노동자, 농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을 보았고, 해방구(소비에트)에서의 홍군에 의한 인민재판식의 백군과 지주계급에 대한 죄의식 없는 처형을 보고 치를 떨었던 기억이 있었다. 일제의 잔인한 남경 대학살이라는 초토화 작전과 우리 독립군과 민족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은 이민족에 의한 가해이었지만, 중국 내 동족 간의 학살에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결코 분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고, 온전한 단일정부 수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그 후 해방공간에서의 좌우대립에 의한 요인 암살과 6.25 동란 전후의 남측과 북측에 의한 무고한 양민학살 등은 그 보다 앞서 중국에서 벌어진 상황과 너무나 닮지 않았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천 번을 협상하고 천 번을 기다려서라도 온전한 조국을 이룰 수 있다면 응당 그렇게 하리라.”는 그의 뜻이 맞다고 본다. 그 어떤 나라가 우리 조국의 운명 앞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으며 오직 우리 민족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이념에 물든 정치인들이 결정할 것이 아니고 민족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함이 맞다. 만약 조국의 미래에 대해 국민투표를 엄중하고 투명하게 실시하여 민족의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지 결정되었다면 열강들은 이를 존중하여 밀어주어야 한다.
2차대전 중 미국, 영국, 중국이 만나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카이로 선언의 뜻처럼, 민족의 운명은 민족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 이런 민족의 뜻이 확고부동하고 강렬하다면 신탁통치니 군정이니 이런 게 필요 없이 일제에 의해 망하기 전의 상태로 회복해주어야 한다. 미. 소 열강에 의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좌우로 갈라져 싸우게 된 것은 표면적인 현상이고 민심의 근저에는 온전한 자주독립의 염원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의 비극이 일부 지도자들의 권력욕에 의해 비롯된 것이지만, 자신이 속하는 체제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는 맹신도 한몫하고 있다고 본다. 김구 선생의 염려가 현실화되었으니 우리는 위대한 선각자들과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의로운 선비정신을 기리며 적어놓은 글을 올려본다.
임청각에 부는 바람
빼앗긴 조국강토 어떻게 찾을 건가
울분을 참지 못해 간도로 떠나갔네
임청각 부는 바람에 선비정신 흐르네
태생은 선비인데 투사로 변하였네
그것을 가르쳐 준건 공맹(孔孟)의 인의였나
시절이 나를 불러서 투쟁길로 나갔네
정든 땅 그리운 고향 내 어찌 잊을쏜가
선대에 불효이나 나라에 충성하리니
운명이 나를 불러서 이국땅에 잠들었네
나는 말해본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나라를 되찾는 것이 자기수양 보다 먼저라고 인식한 행동주의자이다. 허울 좋은 선비의 갓을 뭉개 버리고 동토의 타국으로 싸우러 간 또 다른 시대의 의병이다. 망국을 지울 수 없는 수치로 여기며 탐욕의 굴레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득권층을 양심이란 무기로 응징한 무언의 심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