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만주벌 호랑이, 일송 김동삼
일송정 푸른 솔은, 말 달리던 선구자
나는 선비의 고장이자 독립운동의 성지인 안동을 찾아가기로 한다. 1990년대에 하회마을을 찾아 병산서원을 들러보고 서애 류성룡 선생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역사적 자취보다는 경관에 끌려 관광하는 데 관심이 많았을 때라 깊은 사색이 동반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서애의 징비록은 임란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 지은 참회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류성룡이 없었다면 임란 극복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임란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충무공 이순신을 발탁한 장본인이기에 인재를 보는 안목은 탁월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조선도 없었을 것이다고 말한 것처럼, 만약 서애가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한번 적어 본다(若無湖南 是無國家 若無西厓 是無忠武).
그 후 2010년도에는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 선생의 선비정신과 소통하고 이육사 시인의 애국적 문학의 향기를 체험하였다. 안동은 선비의 고장답게 국가의 위난시 의병이 창기하고 망국의 시절에는 광복을 위한 뜨거운 피를 뿌린 독립투사들의 얼이 서려있다. 안동의 내앞마을, 무실마을, 원촌마을, 하계마을 등은 수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
나는 2007년도에 도산서원을 탐방하고 퇴계 고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 안동시내에서 도산면 방면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접근하였고, 소나무 숲이 우거진 강변 드넓은 터에 자리 잡은 서원을 만났다. 그곳에서 열정이란 우물과 암서헌 등 퇴계선생의 체취가 깃든 장소에서 쉬어가기도 하였다. 뜰앞에 선 매화나무와 등 굽은 노송을 보고 퇴계 선생과 두향의 연모의 정을 느껴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원의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넘어 퇴계고택을 찾았고 그가 어린 시절 노닐고 학문의 열정을 예열시킨 토계를 거쳐 퇴계 묘소를 찾아 예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인근에 이육사 시인의 생가가 있다는 정보를 얻고 이육사문학관을 들러보기도 하는 등 짧은 시간에 많은 명소를 답파하는 의미 있는 탐방길이었다.
내가 도산서원을 찾아가는 여정에 대하여 적어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퇴계 선생은 동방의 대유학자로서 문하에 많은 선비들을 배출하였다. 임진왜란시에 영의정을 맡아 국란을 극복한 서애 류성룡, 초유사 김성일은 물론이고 한일병탄으로 국권을 상실한 시기에는 석주 이상룡 선생, 일송 김동삼 선생 등 의병활동에 선비정신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기에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그리고 도산서원 인근에 있는 원촌마을에는 이육사 시인을 비롯한 많은 독립유공자가 배출되기도 하여 도산서원과 구국운동, 독립운동은 많은 연관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의미 있는 만남은 이육사 시인이었다. 퇴계 선생의 후손으로 애국시인이자 의열단에 가입하여 무력투쟁에 참여한 독립투사이었다. 대구감옥소에서 수인번호 264를 자신의 아호로 사용하였으니 그의 독립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읽을 수가 있다. 그는 청포도라는 서정적인 시 속에서 ‘손님’을, 광야라는 은유적인 시 속에서 ‘초인’을 등장시켜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표출하였다. 그는 시라는 문학적 수단을 통하여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의열단이라는 무력투쟁으로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하였으니 보기 드문 문무를 겸비한 애국지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감수성이 예민한 수많은 젊은 피를 감화시켜 구국의 대열에 참여하게 한 무엇보다도 강렬한 독전가(歌)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친일 시인들이 황국의 신민으로 대동아전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하는 선동가(歌)와 대비된다. 똑같은 시인이라는 직업을 갖고도 어느 쪽은 나라를 구하려고 다른 쪽은 나라를 팔아먹는 길을 가니 정의와 불의는 한 울타리 안에서 상존하는 모순을 갖고 있지 않은가. 동시대에 살면서 많은 시인들은 기회주의적인 자발성으로, 위압에 의한 회유로, 대화혼이라는 선동에 세뇌되어 민족을 배신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독립운동의 산실인 이상룡 선생의 임청각을 둘러보고 내앞마을(川前)에서 김동삼 선생과 의병장들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하였다. 임청각은 석주 이상룡 선생이 태어난 곳이며 99칸의 저택으로 가문의 명성과 재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내앞마을은 천전(川前)이라 하여 낙동강을 앞에 두고 형성된 마을로 의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여기서 일송 김동삼 선생을 비롯한 많은 의병장 및 독립투사들이 태어났다. 이 마을 대표하는 일송 김동삼 선생에 대하여 적어본다. 개화기에는 신식교육을 위하여 안동에서 협동학교를 세웠고, 신민회 및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자주독립을 위한 역량을 키우기도 하였다. 그는 국권을 상실하자 석주 이상룡, 우당 이회영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선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배출하여 청산리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만주벌 호랑이’로 불리던 용감한 독립군 대장이었다. 무엇 보다도 흩어진 독립운동 조직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성과를 올린 유능한 화합형 지도자였다. 만주 지역에 독립운동 단체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노선을 달리하며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일송은 거중 조절 능력을 발휘하여 민족유일당 촉성 결의를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그는 조국 광복을 위해 각자의 의견과 고집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설파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밀정을 풀어 포위망에 들게 한다. 그는 자신의 동생이 비참하게 일본군에게 살해되자 더욱 투쟁의 강도를 높여 나간다. 동생의 죽음은 일제가 그를 유인하기 위해 저지른 만행으로 보아야 한다. 만주사변 발발 후 1931년 일제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를 거쳐 모진 고문을 겪다가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평소 존경하던 일송의 시신을 거두어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는 일송의 시신 앞에서 일제의 잔인함에 치를 떨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나는 김동삼 선생의 선비로서 교육자로서 독립투사로서 그를 존경한다. 그는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한 인물이다. 선비의 엄격함과 교육자의 자상함과 투사로서의 강인함을 함께 보여준 외유내강이기도 외강내유이기도 한 복합적인 품성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성품은 외적 환경에 지배를 받기에 온유한 본래의 성격에 불의에 항거하는 후천적인 의분으로 강인하고 냉엄한 형태로 변전된 것이다. 그가 만주에서 독립운동 당시에 찍은 사진에 보는 인상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비분강개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분명히 그의 눈매와 기상은 백두산 호랑이를 닮았다고나 할까 용맹스럽기만 하다. 조선시대에 학문의 깊이가 있는 문신들도 병마절도사 같은 무신의 자리에 앉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직책에 따라 풍기는 인상은 달리 보이기도 하는 것과 같다. 결의가 굳으면 비장한 모습으로 보이고 세태가 편하면 온후한 모습을 보이는 게 마음의 작용에 의한 표정의 변화일 것이다.
김동삼 선생의 가혹한 고문에 의한 죽음을 보면서 정녕 어떠한 죽음이 의미 있고 반대로 무난한가에 대해 적어본다. 분명 선생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개인의 안락을 저버리고 고난의 길로 갔다. 보통 사람들은 육신에 대한 집착이 강해 편안하고 오래 살기를 바란다. 죽을 때에도 육체를 훼손함이 없이 온전한 상태로 죽기를 원한다. 여기서 의미 있는 죽음과 무난한 죽음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가 생긴다. 독립운동이란 의로운 길을 가려면 인신 구속과 고문으로 고통을 받기도 죽음을 맞기도 한다. 그러한 예견된 위험을 감수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만약에 잘못되면 고문에 의한 육체의 훼손과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한 종말을 각오하고 그 길을 간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높은 가치인 의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육신의 죽음에서 그러한 답을 찾는 것이 빠를 것이다. 의를 생명보다 중하게 여기는 선비정신의 소유자는 육체적인 죽음 자체를 두려워 않고 정신적인 구원을 바란다. 그들은 육신은 언젠가는 사그라지는 외피에 불과하지만 정신은 영원히 이어질 자신의 분신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깨달은 사람들이며 영혼 불멸을 믿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부활과 환생을 믿기 때문에 결연한 길로 가는 계산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유한한 인생에서 그러한 삶이 가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건 수많은 의사들이 이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다가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찾아가는 장엄한 길로 간 것이리라.
인간이 감옥에서 견딜 수 있으려면 강한 신념과 체력을 필요로 한다. 그중 하나라도 결여되면 회유에 넘어가거나 조기에 옥사를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여순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면서 조선상고사를 저술하였다. 감옥을 사색의 공간으로 하여 역사서를 쓰는 산실로 만들어 생의 의미 있는 시기로 만들었다. 그러나 일송 김동삼 선생은 감옥이 그러한 사색의 공간이 될 수 없었다는 데 그가 겪은 고문의 강도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일제로부터 독립운동단체에 활동하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강요받고 끝까지 버텨내다가 수시로 가해지는 고문으로 육체는 망가져 갔으니, 단재 선생처럼 사색하며 저술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단재 선생도 나중에 체력이 소진하여 옥중에서 병사하였으니 일제의 감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감옥생활에서 제일 가혹한 것은 출옥의 희망이 없어지는 것이니, 독립투사에게는 광복의 희망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일송은 연로한 나이에도 광복의 그날이 오기를 믿고 기다렸으니 일제의 고문이 격렬해질수록 패망이 가까이 왔다고 여기며 남은 체력으로 초인적으로 버틴 것이다. 6년간의 감옥생활은 정말로 암흑의 시기이며 좌절할 수도 있는 절망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가 아니면 견뎌낼 수 없는 형극의 길이기에 그 점에서 나는 일송을 존경하여 긴 글을 적게 되었나 보다.
다음은 그토록 용감하였고 온갖 고문 속에서도 자신을 이겨낸 비운의 독립투사인 일송 김동삼 선생을 추모하며 한 편의 글을 올려 본다.
일송정 푸른 솔은
나의 조국은 간밤의 이슬처럼 사라지고
내가 이제 머무를 곳이 어디인가
아름다운 냇가 앞에서 놀던 즐겁던 시절 그립고
가슴에 끓어오르는 분노는 참을 길이 없구나
그 어느 누가 노예가 되고 싶어 하리오
가만히 주저앉아 방관하지 않으리라만
몰아치는 세찬 비바람을 어이 헤쳐 나갈까
동지를 모으면서 찾아서 압록강을 건너가네
선비라고 쓰고 입던 갓도 도포도 다 버리고
이제는 동포를 해치는 민족의 원수를 쫓아서
동으로 번쩍 서로 번쩍 백두산의 호랑이처럼
고구려 옛 영토를 누비며 백마 타고 달리네
고국을 등진 지 오래되어 육신은 노쇠해도
그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솔바람이 되어 부네
싸늘한 감옥에서 꿈속에 만난 그리운 조국이여
고국을 못 가는 한 그루 노송이 간도를 지키네
나는 말해 본다. 일송은 오로지 조국 광복만을 위해 달려온 일편단심의 한 그루 소나무이다. 선비의 갓을 던져버리고 대의를 찾아 북풍한설 몰아치는 광야로 떠나간 선구자이다. 깊은 감옥의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광복의 햇살을 맞기 전에 무너져 내릴지도 모를 자신을 무섭게 채찍질한 초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