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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운 Jul 23. 2024

10. 절명시로 선비정신을 지킨, 매천 황현

의병의 전설을 찾아서

 안동은 선비의 고장답게 국가의 위난시 의병이 창기하고 망국의 시절에는 광복을 위한 뜨거운 피를 뿌린 독립투사들의 얼이 서려있다. 안동의 내앞마을, 무실마을, 원촌마을, 하계마을 등은 수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

 나는 독립운동의 산실인 이상룡 선생의 임청각을 둘러보고 내앞마을(川前)에서 김동삼 선생과 의병장들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하였다. 안동이 의병의 고장이라면 거기에는 선비정신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구한말에 전국적으로 의병이 창기하여 무너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다. 대표적으로는 최익현, 유인석을 들 수 있고, 의병은 아니지만 절명시를 남기고 순절한 매천 황현도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고고한 선비로서 구한말 고위관직을 지낸 관리로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기치를 들고 왕조를 지켜내려고 하였으나, 개혁을 내세운 외세의 거대한 파고를 넘지 못하고 왜국의 대마도에 유배되어 생을 마감한다. 그는 유학의 정신에 근본하여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국권을 문란하게 하는 사적통치에 반감을 갖고 많은 상소를 올린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만동묘를 파하고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원군에 대한 탄핵상소이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성리학을 신봉하여 서양문물은 사학(邪學)이며 왕권을 위협하는 동학농민혁명을 비적이라고 하는 등 전형적인 사대부기득권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면도 있었다.


 의암 유인석 선생은 춘천의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위정척사를 위해 많은 상소를 올린 인물이다. 민비가 일본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는 을미사변을 계기로 충청도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인근의 충주를 비롯하여 남으로는 안동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는 관군과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는 등 위세를 떨쳐 구한말 의병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왕산 허위 선생은 경북 선산 출신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분개하여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켰다. 13도 의병연합군을 창설하여 서울로 진격하였지만 실패하고 양평에서 체포되어 1908년 경성감옥, 즉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와 같은 초기의 의병을 주도한 것은 선비계층이었으나, 신돌석과 같은 평민출신의 의병장도 등장하여 선비계층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해산 군인이 의병으로 나서며 새로운 양상의 의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1908년에는 왕산 허위가 13도의 연합의병을 통합하여 한양으로 진격하는 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하였다. 조정은 일제의 힘을 빌어 대대적인 의병토벌작전을 펼쳐 수많은 의병장과 의병들이 희생되었다. 산발적인 의병투쟁은 3.1 운동 때까지 이어졌으나, 강력한 일본군의 힘에 밀려 더 이상 세력형성이 어려워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독립운동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의병은 허약한 국가를 지키기 위해 관군을 대신하여 목숨을 걸었고, 나라가 망한 후에도 조국을 되찾기 위해 격렬하게 싸웠다. 일제는 조선을 병탄하기 위하여 청일전쟁 후로부터 을사늑약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숨통을 죄어왔다. 외교권을 박탈하고 군대를 해산하면서도 조선을 보호한다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으니 보호라는 단어는 무슨 의미인지 누구를 보호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마침내 일제는 1910년 조선을 힘이 빠질 대로 빠지고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피폐화시켜 집어삼켰던 것이다. 수많은 의병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창기하고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건만 열강들은 제 밥그릇 챙기기에 바빴고, 서로를 두둔하며 허약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처절한 의병들의 죽음이 없었다면 독립군도 없었겠고, 의열단도 없었을 터이니 의병은 계급장 없는 민족의 군대이니 역사에 장엄하게 기록되어야 하리라.


 친일식민사관을 추종하는 강단사학자들과 친일파의 후손들은 조선이 내부에서 부패하고 나라를 지킬 힘이 없어 스스로 무너졌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교묘한 언어유희로 의병들과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욕되게 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도와주기 위해 을사보호조약이라 말하고 을사늑약이라고 기록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는 말인가. 이것은 가해자의 논리이며 일본 극우세력들이 주장하는 역사왜곡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직도 잘못된 역사인식을 갖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발호하고 있으니 친일청산을 못한 것이 원죄라고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를 모르는 것은 다시 새롭게 배우면 되지만 잘못된 역사를 고집하고 왜곡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죄를 짓는 것이며, 우매한 민중을 선동하여 더 큰 화근인 민족의 분열을 초래하면 역사에 대역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를 대할 때는 순수한 마음으로 고찰하고 그동안 억압받았던 민족사관에 대한 재평가를 행함이 옳다. 인간의 행복은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 있으며 그간 거짓을 참이라고 배웠던 것에 대해 분노하고 스스로 바로잡기 위해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용기 있고 현명한 길이다. 역사를 제외한 학문은 검증이 가능하니까 왜곡이 없고 발전을 위한 논쟁은 있을 수 있다.


 혹자는 잘못 알게 된 역사를 후일 알아차리고 교정의 기회를 갖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사실로 인식하고 고치려는 노력을 하지 못하는 고정관념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어느 계기를 통하여 진리의 길로 가게 되는데 그것은 개인적으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한 권의 책으로 몇 시간의 강연으로 그것이 화두가 되어 진리를 찾아가는 장엄한 여정이 펼쳐지니 그것은 축복이요 영광이기도 하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참 역사를 찾으러 가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사는 일제에 의해 교묘히 각색된 것이니 그간의 잘못된 역사지식을 비우고 하루빨리 바른 것을 찾아 담아가야 하리라.


 매천 황현 선생은 비록 의병활동은 아니지만 절명시를 남기고 순절하여 선비들의 의병활동 참여에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오백년 동안 선비를 길렀지만 나라가 망했는데 책임지는 선비가 하나도 없네.” 라고 탄식하며 자기나마 책임지는 의미에서 목숨을 끊는다고 하는 말이 비장하다.


 그는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구한말 3대 문장가로 이름나 있으며 이건창과는 서로 왕래하며 학문을 통한 깊은 우의를 나누기도 하였다. 마지막 암행어사로 유명한 이건창이 고독하게 숨지자, 그에게 올리는 제문에는 특이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일찍 혼자 갔다고 서러워 말게, 자네는 살았어도 혼자 아니었는가.”(無庸悲獨臥 在日已離群) 정말 탁월한 시적 표현이다. 정의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완고하게 살다 간 그를 은근히 칭송하는 내용이다. 그 표현은 황현 자신에 해당하기도 하여 그 시속에 자신의 절명을 암시한 것이라고 보인다. 황현은 조선의 선비이면서도 조선의 선비를 책망하고 그들의 무능과 불찰을 자신의 목숨을 끊으면서 선비정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였다. 

 다음은 황현의 절명시 중 일부를 소개한다.     


난리곤도백두년(難離袞到白頭年)

기합연생각말연(幾合捐生却末然)

금일진성무가내(今日眞成無可奈)

휘휘풍촉조창천(輝輝風燭照蒼天)   

  

난리 속에 지내다가 머리가 다 세었네

몇 번이나 버리려던 목숨이었나

오늘은 진실로 어찌할 수 없는 데

바람 앞에 촛불만 하늘거리네     


 황현은 또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겨 슬프하지 말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타이른다. 자신은 비록 이 순간 목숨을 끊으려 하지만 나라와 조상들로부터 입은 과분한 은혜를 잊을 수 없으니, 나라가 망한 것은 애절한 일이고, 그것을 막지 못한 자신도 부끄럽지만 그래도 목숨을 버리는 심정은 담담하다는 것을 표명함으로 해서 자식들이 죄책감에서 자유롭기를 바랐다.

 다음은 황현이 목숨을 끊기 전에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이다.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지 오백 년에

국가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었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내가 위로는 황천이 준 떳떳한 도리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 평일 읽었던 책도 저버리지 않고서

고요히 죽으면 진실로 통쾌하리니

너희는 크게 슬퍼하지 마라."    

 

 이와 같이 황현은 선비로서 너무나 엄격하게 자신을 대하였으며, 조선의 선비를 대신하여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겠노라고 선언하고 절명한다. 비록 죽음이 모든 것을 용인하고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로부터 입은 은혜에 보답지 못하는 자책감에 부끄러운 세상에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내놓을 염치가 없기에 깨끗하게 당당하게 죽음의 길로 간다. 자식들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말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당부하여 불효의 자책감에서 자유롭게 하였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이성을 가지므로 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집착한다는 점이다. 동물은 식욕과 생리욕에 의한 단순한 본능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하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욕구에 충실할 뿐이다. 반면 사람은 탐진치의 근본 욕망과 나아가 미래에 대한 걱정과 죽음에 대해 사유하는 복잡한 인식의 세계를 갖고 있다. 어떤 점에서는 동물의 단순한 삶처럼 현재에 집중하는 본능에 충실한 길이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점에서는 사람이 동물보다 불행하게 설계되었는지 모르지만 사유한다는 점에서는 더 높은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고귀한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섭리를 깨달은 소수의 사람에게 해당되고 대다수 사람들은 가정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 탐진치의 욕구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선각자를 존경하고 그에 기반하여 공동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를 대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황현이 절명시를 남기고 순절하자 선비사회를 중심으로 크나큰 반향을 일으켰다. 염치를 모르던 사대부계층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잠자고 있던 민중의 가슴에 구국의 불을 지른 순교자가 된 것이다. 죽어가는 유학에 대한 조종을 울리고 지도층에 대해 염치를 지키라고 압박하는 크나큰 항변이었다. 조선이 오백 년 동안 선비를 기르고 그 선비들은 많은 은덕을 입었지만 나라를 지키지 못한 불충에 참회하고 부끄러워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이 절명시는 죽음 대신 살아서 나라를 구하고자 이미 구국의 대장정에 오른 이회영, 이상룡 등 선비들과 함께 민족의 양심에 기름을 적셔 큰 횃불을 들어 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불러들여 구국의 전장에 몸을 던지게 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에게 구국의 제단에 피를 바치게 하였으니 그의 시는 죽어가는 민족혼을 되살리고 썩어 문드러진 피부에 새살을 돋게 하였다.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사대부계층을 중심으로 한 지도적 그룹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그의 죽음은 나라를 살리는 묘약이 되었으니 참으로 가치 있는 절명이 아니겠는가. 민영환, 조병세, 이준 등 많은 열사들의 자취와 함께 죽어가는 조국의 혈관에 소생의 피를 돌게 한 당대의 양심가이자 선각자라고 여기며 깊이 추모해야 하리라.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을 자진이라고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끊었지만 무의미한 죽음은 자살이라고 하였다. 실연의 아픔을 참지 못하고 생활고를 비관하고 허무와 고독을 극복하지 못하는 죽음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나름대로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무거운 중압감과 허무는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병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의미한 즉 가치 있는 죽음도 있었으니 자살보다는 높은 의미로 자진이라고 부르고 싶다. 자살은 충동적인 사적 감정에 의해 그것을 인내하기 힘들 때 하는 심신 상실상태에서 하는 것이지만, 자진은 깨어있는 정신상태에서 자신의 신조에 따라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차이점이 있다. 대표적으로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동강에 몸을 던진 정사종이 있고, 백이산에서 나물을 캐 먹고 굶어 죽은 백이숙제도 자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국충정심에서 불의에 항거하며 국가를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친 경우는 순절이나 순국이라고 하기도 한다. 민영환, 조병세, 이준 등이 이에 해당되는 경우이다. 황현의 절명도 의분에 의한 순절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이러한 의병의 창기와 선비의 절명은 유교의 인의사상에서 출발하였다고 본다. “지극한 인은 지극한 의를 낳는다.”는 말처럼 인과 의는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면 그들을 지키기 위하여 의로운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의를 불러내는 것은 불의에 고통받고 있는 민중과 그의 공동체인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 분연이 일어나는 지극한 인에 대한 반향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착한 본성인 인을 가지고 있지만 행동의 동력인 의를 다 갖고 있지는 못하다. 의는 지극한 인에서 출발하기에 누구보다도 민중을 사랑하고 연민하여야만 가능한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만이 실천에 옮기게 된다고 본다.  


 나는 인의사상은 모든 종교와 철학을 대변하는 가장 적합한 사상이라고 믿는다. 인은 어짐과 자비와 사랑으로 모든 종교의 근간이 되며, 의는 진리에 대한 발로로 이 또한 종교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이웃이 부당하게 핍박받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분연히 일어서는 것이 의라고 할 수 있다. 인은 정적인 진리의 근간이며, 의는 동적인 진리의 표출인 것이다. 그러니 지극한 인을 가짐으로써 의의 실천을 이루게 되니 인과 의는 진리를 이루는 불가결의 구성 요소인 것이다. 仁만을 실천하는 사람은 많으나 義까지 행하는 사람은 드물다. 국난을 당했을 때 일어나는 의병과 국권 상실기에 광복을 위해 몸을 던진 의사들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청도 운문산을 등산하고 내려오다가 운문사 경내 길가에 서있는 노송들의 등과 허리에 깊게 패인 상처를 보고 의병들의 분신처럼 느껴져 적어 놓은 시조를 올려 본다.


          운문사의 노송     


나라가 망했더니 강산마저 아프구나

고송에 깊게 패인 진을 뽑던 상처 자국

그 흔적 지워려 해도 지울 수가 없구나     


수탈의 슬픈 역사 숲 속까지 남아있고

쇠붙이도 모자라서 고혈까지 앗아갔나

운문사 범종마저도 빼앗길 뻔했겠지     


도열해선 긴 행렬은 의병들의 분신인가

아픈 상처 동여매고 굳건하게 서있는 건

소나무  드 푸른 기상 배달민족 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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