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약산의 밀양, 김산의 아리랑
의열단, 그 뜨거운 피를 찾아서
나는 대한독립 무력투쟁의 상징이자 열혈남아들의 결사조직인 의열단의 고장인 밀양을 찾아가기로 한다. 밀양은 역사적으로 절개와 구국의 혼이 숨 쉬고 있는 의로운 지역이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의를 숭상하는 선비정신이 숨 쉬고 있고 사명대사 유정이 태어난 곳이다. 나아가 일제 강점기에는 조국 광복을 위해 3.1 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던 곳이다. 3.1 운동은 그에 대응하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살상을 지켜본 의기 있는 젊은 피들이 결사조직을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밀양시내 내일동 해천가 약산 김원봉의 생가터에는 그들을 기리는 의열기념관이 세워져 만시지탄이나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주변에는 백민로, 석정로, 약산로가 이름 붙여져 의열단의 충정과 의로움을 기념하고 있다. 밀양의 도로 지도를 보면 좁은 지역이지만 백민로, 약산로, 석정로가 시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지자체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추모의식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니 밀양 시민들도 독립운동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그것을 현대의 애국심으로 치환하여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여겨진다.
대한광복회의 백민 황상규 의사는 김원봉, 윤세주 등 많은 독립투사들을 키운 정신적 지주이며, 약산, 석정, 여성, 약수 등의 아호를 그들에게 붙여주어 잠재된 의혈을 예열시켜 조국광복의 투쟁의 장에 뜨거운 피를 흘리게 한 스승이다. 밀양은 이러한 의열단의 산실이자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배출한 충절의 고향이니 이는 필시 사명대사의 구국의 정신과 소통하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의를 생명처럼 여기는 선비정신의 표상인 사림파의 시조인 김종직의 정신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폭력단체인 의열단을 창설한 것일까? 독립운동의 수단으로써 무력, 교육과 자강이 있다. 교육은 민족혼의 되살림이요, 자강은 자립이지만 일제는 둘 다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무력 중에서 폭력이다. 폭력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으나 정의가 인정받지 못하고 멀어지는 경우에는 허용된다. 폭력은 정의로 가기 위한 투쟁노선이다. 고귀한 목적인 광복을 위하여 폭력은 수단이요 방편인 것이다. 진정한 선비나 지식인은 부당한 것에 항거하는 의분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 정신적으로 의분이 충만하여야 육체적으로 뜨거운 의혈이 흐르게 되고, 마침내 결행하는 의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하게 된 것은 그의 고모부이자 스승인 백민 황상규 의사의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밀양 동화학원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을 가르쳤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을 주도적으로 조직한 인물이다. 초대 의열단장으로 너무나 유명한 김원봉에 가리어졌지만 그는 사실상의 의열단의 산파 역할을 한 인물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약산도 없었을 것이며 밀양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산을 닮고 별을 닮고 물을 닮아라는 뜻의 호를 지어 주어 변함없고 영원하며 유연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을 심어주었던 것이라고 본다. 독립투쟁은 그러한 진리의 덕목으로 하여야만 무너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불어넣어준 것이 아닐까.
이와 함께 이념과 주의도 독립투쟁의 수단이다. 민족주의, 아나키즘,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이론이요 이념이다. 그 속에는 공통분모인 義가 있으니. 이는 다수결로는 결정할 수 없는 인륜의 본질인 것이다. 그것들은 광복의 목표를 위해 사농공상 사민(四民)들이 함께하는 민족단합을 위한 수단이다. 그것은 폭력처럼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도착하면 버리고 가야 하는 뗏목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주의는 폭력을 일시 수용하지만 근본정신은 인류를 위한다는 숭엄한 뜻이 깃들여 있다.
약산 김원봉은 광복을 되찾고자 망명하여 항일무력투쟁에 투신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의열단을 창단하여 단장을 지냈다. 수많은 요인 암살과 주요 기관의 폭파로 일제로부터 최고의 현상금이 걸린 제거대상 1호로 지목된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위하여 여성 동지인 박차정 의사와 결혼을 하게 되고 그녀는 곤륜산 전투에서 입은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숨지고 만다. 그는 가족적인 비운을 독립운동에 승화시켜 조선의용대를 거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으로 임명된다. 일본이 패망하자 중경에서 제2차로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였으며,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여운형 선생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해방공간의 격렬한 좌우대립의 격랑 속에서 고하 송진우 선생, 몽양 여운형 선생이 암살되고, 반민특위가 강제로 해체된다. 그러자 몸을 움츠리면서 처단의 공포에 떨던 친일 반민족 세력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간도특설대 출신 군인과 친일 밀정 출신들이 오히려 승승장구하여 군대와 경찰의 요직을 장악하자 좌절하고 만다.
심지어 악명 높은 친일경찰인 노덕술이 상사의 지시로 그를 체포하여 심문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상사는 의열단의 전신이라고 평가받는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인 박상진 의사에 의해 처단된 유명한 친일거부 장승원의 아들이었으니 충분히 의심해 볼만하다. 이런 모순되고 전도된 정세에 환멸을 느끼고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공동정부 수립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후 귀국하지 않고 북에 머무른다. 그는 좌우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남으로 내려가면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암살되었듯이 자신의 운명도 예감하였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민족주의자이자 남북 단일정부를 외치던 김구 선생이 암살되고 남쪽은 단독정부 수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는 북에 머무르면서 고위직에 임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의 숙청을 당하게 되는 비운의 인물이었다. 그가 그토록 온몸을 바쳐 싸워서 얻은 광복의 기쁨과 새로운 조국의 희망을 보지 못하고 반동이란 오명을 얻고 숙청돠었으니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니련가.
약산과 김산은 광복 후 분단된 조국 어디로부터도 진정한 부름을 받지 못하고 경계인으로 살다 간 고독한 독립운동가들이다. 경계인, 그들은 좌. 우라는 양 끝단에도 속하지 않은 중도의 세계에 사는 사람으로 어찌 보면 진리의 세계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조국 광복을 위한 개인의 신념을 바탕으로 폭력을 통한 저항을 하였지만 그 어느 진영에도 경도되지 않았다. 보다 효율적으로 항일투쟁을 할 수 있는 주의(主義)를 선택하였을 뿐 그것에 예속되지 않았다고 본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선택하기보다는 분단을 막고 한민족의 온전한 통일을 가져오는 방식을 선택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야 생존할 수 있는 광기가 넘치는 해방공간에서 고뇌는 깊어만 갔을 것이다. 약산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미군정의 통제하에 분단을 기정 사실화하는 남쪽의 체제에 실망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신봉하지 않았지만 남북의 완전한 통일을 내세우는 북쪽의 체제에 공감을 하였을 수도 있다.
김산은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를 발행하고, 아나키스트로서 의열단에 가입하였으며 나아가 더 적극적인 투쟁을 위하여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사실이다.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일본에 협력한 밀정이라는 누명을 쓰고 또한 트로츠키파라는 내부적 모함으로 처형된다. 후일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그 같은 혐의가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 복권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등진 상태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와 제휴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한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약산과 김산은 개인적 신념으로 광복에 효율적인 주의(主義)를 택하였지만 그 주의에 예속된 것이 아닌 일시 머무르는 과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념은 민족을 향하고 이데올로기적 체제에서는 경계선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는 체제에서는 고독한 방랑자의 면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수한 조국광복을 향한 투쟁의 신념을 가진 민족주의자 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약산과 김산의 용모에서 풍기는 기질과 내면적 성품을 엿보이게 하는 단초가 있으니 적어 본다. 김산의 아리랑 중 체포되어 수감된 사진 속에서 드러난 장지락의 눈빛, 슬픔보다는 의연한 기개를 가지고 적을 비웃는 듯한 묘한 미소, 짙은 속눈썹에서 발산하는 강렬한 눈빛.....
김원봉, 무뚝뚝하면서 근엄한 표정뒤에 드러나는 차가움, 그러나 내면에는 들끓는 용암과 같은 뜨거운 피...... 왜적에 대한 분노를 성급하지 않고 침착하게 다스리면서 때를 기다리는 끈기, 비록 동포이고 동료이지만 배신한 자에 대한 가차 없는 보복, 그리고 돌아서서 운명의 장난에 흐느끼는 연약한 모습......
나는 약산과 김산과 같은 무력투쟁 의사들을 보면서 그들의 의식구조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았다. 우선 그들은 철저한 자기 믿음으로 출발하여 주장이 강하면서 쉽게 타협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천진스러운 모습으로 연약한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의사가 되려면 자신의 안위를 초월하여야 하고 회유와 협박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어야 한다. 그 누가 생명에 대한 애착이 없으리요, 그리고 무난한 삶을 살고 싶은 욕구가 없겠는가. 그들은 불의에 대한 분노를 하면서 어찌 자신의 영달을 추구할 것이며, 동포의 비극을 보면서 관망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들은 무뚝뚝하면서 친화적이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신념에 따라 양심의 부름에 응하고 있을 따름이다.
흔히 유연하고 친화적인 사람이 의기도 넘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역사적인 인물들을 살펴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연성과 친화성은 외교적인 성향으로 타협과 양보를 통하여 상호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한다. 평화시에 대등한 지위에서 행하는 협상의 자세로는 맞는지 모른다. 그러나 국권을 박탈당하고 핍박받는 식민지 치하에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어느 한 독립운동가가 조선을 미국의 위임통치를 받자고 주장하자,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 이완용이라면, 없는 나라까지 팔아먹자는 사람이 바로 그 자다.”라고 격분한 일화가 있다. 진정한 의사들이 대하는 대일투쟁은 오로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주먹에는 주먹으로.”라는 탈리오의 법칙만이 유효할 뿐이다. 그러니 의기에 찬 비타협적인 성향의 인물이 의사로서 적격이라고 할 수 있다. 시절을 잘 만났는지 잘못 만났는지 의사로서의 자질을 지녔는데 현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해 음주와 폭언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이 많다. 만약 그들이 진짜 세월을 잘못 만나 국권 상실기에 태어났더라면 의사로서 자신을 불살랐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이 모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한 대의를 위함이지 사사로운 정리에 얽매이지 않는 의로운 길인 것이다. 의사는 사교적이기보다 혼자 사유하는 성품을 갖고 있다. 모나고 거친 성품 속에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기질과 강단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면에는 비애를 사랑하고 비극의 주연이 되기를 꿈꾸는 낭만이 숨 쉬고 있다. 약산과 김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비판과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은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성급한 면이 있다고 보아진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상황에 따라 변하는 법이니, 일제와의 무장독립투쟁을 하던 시절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 당시 공산주의와 대립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구미 선진국가를 제외하고는 뿌리내리지 못했고, 중국 또한 봉건주의에 의한 지주들의 농민들에 대한 지배만 있었을 뿐이다. 지금의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약산과 김산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게 힘들 수 있다. 지금은 사실상 공산주의는 종언을 고했으며, 남은 것은 일당 독재주의인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의 대명사인 소비에트는 수많은 공화국이 독립하여 무너져 내렸으며, 자유경제체제가 뿌리내려 공산(共産)은 사라진지 오래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순수성은 자취를 감추고 영구집권과 세습정치로 인민들은 고통을 받고 있으니,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모두 그저 대립을 위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러니 그들의 민족통일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순수한 안목으로 바라보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고 본다.
사육신의 한이 체제에 대한 민족 내부의 한이라면 의열단의 한은 왜침으로 국권을 상실한 민족의 외부를 향한 한이다. 치욕적인 망국의 한에서 비롯된 투쟁, 그것은 민족혼의 발현이요 정의와 평화를 향한 자구책이다. 한(限) 많은 한민족은 이름 속에서 드러나고, 역사 속에서도 잠복하여 있으며, 앞길에도 펼쳐져 있어 한스러운 한민족이여 어찌하면 그 한을 멈출 수 있겠는가!
밀양은 아리랑의 고장이다, 영남루 강변에는 아랑의 슬픈 이야기가 숨 쉬고 있고, 내일동 거리에는 일제와 싸운 의열단의 장엄한 순국의 혼이 감 돌고 있다. 또 하나의 밀양아리랑인 최수봉 의사의 아리랑이 있다. 최수봉 의사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앞선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탄사건에 이은 청년 의열단원의 쾌거였다. 일제는 경찰서에 대한 연이은 폭탄투척을 심각한 무력투쟁으로 보고 그런 바람을 조기에 잠재우기 위하여 최수봉 의사를 속전속결로 재판하여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의 연인이던 삼랑진의 김문기 여인은 최수봉의 처형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밀양 상남면 마산리 최수봉과 삼랑진의 김문기 연인의 그 구슬픈 아리랑이 요산 김정한의 단편소설인 <뒷기미 나루>에서 오버랩된다. 해방 후 뱃사공인 남편 춘식이와 아내 속득이의 슬픈 이별, 그리고 그 비극을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맨 박노인의 이야기가 슬픈 아리랑으로 다가온다. 남해로 흘러가는 한의 물결이 삼랑진을 거쳐 흘러서 원동의 토교 나루, 오봉산 자락의 일제강점기에 기막힌 삶을 살아간 수로부인과 전도된 사회상을 그린 <수라도>라는 소설과 만나고, 낙동강 조마이섬에 살던 거무 모자와 갈밭새 노인의 파란만장한 사연을 그린<모래톱 이야기>와 합류한다. 이처럼 밀양은 슬픈 이야기 뒤에 불같이 강렬한 애국혼이 빛나고 있다. 그러니 밀양은 충절의 고장이니 외세의 침입에 분연히 일어났던 의기와 의열단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제는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민족화합의 횃불을 올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뜨거운 피를 지니고 자신을 불 살랐던 수많은 의열단원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나는 최수봉 의사와 김문기 연인의 비련의 아리랑을 밀양아리랑에 붙여 보았고, 또 다른 슬픈 이야기인 김산의 아리랑을 함께 한수의 시를 지어 보았다.
신밀양 아리랑(1)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정든 고향 남겨 두고 떠나는 님아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가는 길은 무슨 길이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가는 일 무슨 일인지 말 좀 해 보소
돈 벌러 가는 길은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이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내보다 소중한 게 그 무엇이 있소
사랑도 버리고 가던 님 돌아오지를 못했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김산의 아리랑(2)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조국은 나를 떠나게 만드네
산천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살 수가 없네
귀머거리 장님이 되어야 그나마 버틸 수 있지
뜨거운 나의 심장은 나를 붙들지 못하네
왜국으로 건너가 배움의 길 찾았으나
잔인한 살육에 금수의 마음을 보고
나 또한 그 길을 가야 하는 운명을 보았네
나라 없는 슬픔 보다 더 무서운 건
반항심도 없는 굴종하는 노예가 되는 것이라네
서서히 변해가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
나의 마음도 서서히 변해서
잔잔한 시냇물을 좋아했건만 급류를 사랑하여
투쟁을 위해 무정부주의에서 공산주의로 길을 바꿔
야수의 심장으로 분노의 총칼로 적들을 베고 말리라
머나먼 타국땅을 수만리를 걷고 걸어
수많은 사상을 담으면서 버리면서 갔지만
모두 나를 위함이 아닌 나라를 위함이었네
슬픈 운명이여, 이를 비껴가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나의 투쟁이 부족하였다고 자책하리라
내가 그 길을 갔던 뜻은 나를 버리고
나를 이기기 위함이었지 나를 위함이 아니었네
내가 만난 그녀를 통해 나의 역사 전하노니
그것이 만방에 알려져 이 나라를 구하게 하면
이국땅 이름 없는 무덤에서 저문 들 원망하지 않으리
나는 말해 본다. 약산은 이름 그대로 산을 닮아 선이 굵고 담대하며 흔들림이 없다. 얼굴은 과묵하면서도 정신은 섬세하고 외면은 냉정하면서도 내면은 따뜻한 사계절과 같은 다채로운 인물이다. 김산은 순수하여 쉽게 상처를 입지만 그럴수록 더 강해지는 모닥불 같은 사람이다. 바람이 불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위력을 지녔지만 그 바람을 타지 못해 꿈을 이루지 못한 이상주의자이다. 두 사람의 다른 점은 약산은 광복이 유일한 목표이나, 김산은 영원한 자유를 위하여 광복은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데에 있다. 김산은 일견 공산주의자로 체제에 참여하지 않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지만, 약산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후일 체제에 참여하여 서훈을 받지 못했다.
나는 다시 한번 말해본다. 어찌하여 체제가 진실보다 중요하다고 분별하는 것인가. 역사는 진실을 안고 가기에 평가라는 분별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게 다행이기도 하다. 체제가 끌어들이는 것은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먹이로 삼아 출세를 노리는 얄팍한 이기심 어린 위선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느 체제에 속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체제가 도래하면 표변하여 그곳으로 옮겨 간다는 것이며, 그 변화된 체제 안에서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니 체제는 진리가 아닌 의식화된 집단의 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