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돌아온 영웅들, 돌아오지 못한 영웅들
효창공원 4 의사 묘와 찾지 못한 안중근의사 묘
나는 독립운동가들의 성지인 효창공원을 찾아서 4 의사 묘를 참배하는 답사를 진행한다. 효창공원 안에는 김구선생의 동상과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묘가 있다. 안중근 의사의 묘는 허묘로서 아직 육신은 오지를 못했다.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백정기 의사이다.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백정기 의사를 아는 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4 의사 묘라고 지칭하는 독립운동가의 성지에 백정기 의사가 묻혀있다는 것은 깊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숨겨진 백정기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적어보기로 한다. 그는 3.1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자 만주로 건너가 본격적인 무장독립운동 대열에 뛰어든다. 이회영, 신채호 선생이 주도하여 만든 의열단에 들어가 젊은 동지들과 함께 목숨을 건 거사에 참여하게 된다. 요인 암살, 기관 폭파 등과 같은 많은 일을 수행하였으나, 마지막 상해 조계지에서 일본 요인을 암살하려다 계획이 탄로 나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어 투옥된다.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지병이 악화되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는 1946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지금의 효창공원 묘역에 묻히게 된 것이다. 김구 선생이 광복 후 먼저 백정기 의사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고 하루라도 빨리 고국땅에 묻어야 한다며 특별 지시를 한 결과이다. 수많은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데 수십 년이 걸린데 비해 파격적인 귀국인 것이다.
왜 김구 선생은 백정기 의사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대했던 것일까에 많은 의문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는 의열단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거사에 참여하여 성공하였고 누구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는 강한 동지애와 희생정신에다 따뜻한 인성을 지닌 투사였다. 특히 폐결핵에 걸린 동지를 간병하다가 자신도 그 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수감 도중 세상을 떠났는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에 폐결핵은 불치의 병으로 여겨질 정도로 위험했다. 영양실조에 걸리면 그 병이 엄습하므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많이 걸렸다. 치료하려면 엄청난 고가의 페니실린을 맞아야 하는 데 일반인들은 치료를 못하고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 당시 젊은 독립투사들은 단체의 재정이 어려워 끼니조차 이어가기 힘든 열악한 상태에 있어서 병마에 쉽게 노출되었다.
김구 선생은 백정기 의사를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밀정의 고발로 그가 체포되자 크게 상심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귀국하자마자 그의 유해를 고국으로 먼저 모셔오도록 하였다니 그에 대한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김구 자신의 맏아들 김인이 폐결핵으로 숨졌다는 동병상련의 아픔도 작용하였으리라 본다. 김구 선생은 중경 임시정부시절에 많은 동지와 동포들이 폐결핵에 걸려 죽어가는 참상을 보았다. 그 병을 고치려면 엄청난 돈이 들어가므로 엄두를 낼 수가 없어 안타깝게 죽음을 쳐다보아야만 했다. 고국을 잃은 설움에 불치의 병까지 창궐하니 하늘이 무심하다고 한탄도 하였을 것이다. 자신의 큰 아들의 아내이자, 며느리인 안미생이 김구에게 페니실린을 구해서 투약하자고 하소연하였으나 거절하고 만다. 결국 아들은 주사 한 대 못 맞고 젊은 나이에 아버지와 아내와 자식을 남겨두고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생을 마쳤던 것이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슬픔은 어떠하며 며느리의 비애는 어떠할 것인가에 김구 선생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라를 잃고 이국땅에서 동지와 동포가 끼니를 이어가기 힘든 상황에서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닌데, 내 어찌 내 아들이라고 해서 큰돈이 드는 약을 구해서 치료하게 할 수 있겠는가.”하고 말이다. 여기서 그의 동지와 동포에 대한 평등심과 공정함을 엿볼 수가 있다. 그야말로 지도자로서 너무나 당연하지만 인간적 아픔까지 감수하는 그의 동포애에 감동할 따름이다.
아들이 죽은 후에 며느리인 안미생을 자신의 비서로 기용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하여 독립유공자의 반열에 함께 올렸던 것이다. 김구 선생이 광복 후 1945년 11월에 첫 번째로 귀국할 때에 그를 수행한 비서가 바로 안미생 의사이다. 백정기 의사가 폐결핵으로 일제의 감옥에서 쓸쓸히 떠나자 그의 마음은 자신의 아들을 연상하며 속으로 크게 흐느꼈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해방된 고국의 품에 안기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지금은 김구 선생과 같은 효창공원 묘역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안미생 의사의 가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안미생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 의사의 딸로서 김구의 큰 아들 김인과 결혼하게 된다. 김구 선생은 훌륭한 독립운동가 가문의 딸을 며느리로 맡는 것이 더없는 영광이라고 하였다. 결국 독립운동가 가문끼리 사돈지간의 관계를 맺었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비애가 숨겨져 있으니 어찌 넘어갈 수가 있겠는가. 알다시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대한병탄의 주범인 이토우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명중시켜 처단하였다. 대한민국 무장독립투쟁의 횃불을 올린 숙명적인 거사였다. 그는 거사 직후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일제의 손에 넘겨졌다. 짧은 재판과정을 거쳐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몸은 아직도 못 왔지만 그의 혼은 영원히 조국의 가슴속에 묻혀 숨 쉬고 있다.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가 “항소하지 말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효도하는 길이다.”라고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모든 이의 마음을 울리게 한 애절하면서도 강한 메시지로 남아있다. 그의 형제들인 안정근, 안공근 모두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이니 이것은 그의 어머니의 평소의 가르침의 영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안정근은 흩어진 북만주의 독립투쟁단체를 단합시켜 청산리대첩을 이끌었고, 안공근은 김구 선생의 한국독립당 산하에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의 폭탄의거를 계획하고 지원하였다. 이들 두 형제에게 독립운동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이들이 20대에서 30대의 피 끓는 젊은이들이었다면 60대 환갑을 넘은 노인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강우규 의사이다. 그는 1919년 조선 3대 총독으로 부임하여 오던 ‘사이토 마코토’를 폭사시키기 위해 서울역에서 폭탄을 투척하였지만 총독은 비켜가고 다수의 총독부 관리들이 죽는 등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젊음은 나이가 아닌 열정과 의분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강우규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며, 먼저 간 인생후배이자 독립투쟁 선배인 안중근 의사를 따라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나는 안중근 의사를 보고 의로운 자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왜 자객에 비유하고자 하는가 하면, 어느 한 목표를 겨냥하여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고, 거사의 파급력을 고려하여 때와 장소를 설정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자객은 고대 중국의 형가와 전제, 예양, 섭정, 조말 등이 있다. 형가(荊軻)는 불의하고 무도한 진시황을 처단하려고 공물상자에 실금 같은 상처에도 치명적인 맹독을 바른 단검을 숨겨갔다. 비록 운이 따르지 못해 실패하였지만 진시황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고 주변 약소국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는 거사를 위해 역수를 건너면서 “장사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라고 하여 그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국권을 되찾고자 하는 숭엄한 의기에서 비롯된 의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 개인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팽창과 주변국에 대한 침탈을 경고하는 예방적인 거사이다. 그리고 총칼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일제를 기망하여 배후에서 독립자금을 모아 총과 폭탄을 만들게 하여 적의 등에 비수를 꽂게 한 백산 안희제도 자객이라고 할 만하다. 두 분 다 뜻은 의기롭고 행동은 은밀하며 결과는 장엄하기에 충동적이 아닌 이성적인 자객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최근 안중근 의사를 기리기 위해 뮤지컬 ‘영웅’이 절찬리에 공연되고 있어 영웅이라고 지은 배경이 궁금하였다. 일반적으로 영웅은 전쟁영웅으로 역사적으로 알렉산더 대왕, 칭기즈칸, 시이저, 나폴레옹 등을 일컫는다. 무력으로 광활한 영토를 정복한 왕과 장군이 해당되어 전쟁이란 수단을 통하여 이름을 날린 자들이다. 그들은 정복을 위해서 이민족을 살상하고 노예로 만들어 자신이 속해있는 제국의 번영을 위해 기여하였다. 반면에 피지배 민족은 숱한 살상을 당하고 노예가 되는 비극을 맛보게 된다. 차라리 그들을 영웅이라는 호칭 대신 ‘세기의 정복자’라고 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통해 땅을 지배하는 것보다 가르침을 통해 민중의 마음을 잡는 것이 어렵고 가치 있기에 정복자와 영웅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영웅의 사전적 의미는 ‘이상적인 가치를 실현하거나 지혜와 용기가 뛰어난 사람’을 지칭하는 데 역사적인 전쟁영웅은 무슨 가치를 위했으며 인류를 위한 공헌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아무리 전과가 크다고 한들 영웅이라고 까지 호칭해야 하는가에 대해 한편 의문이 든다. 임진왜란시에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은 왜국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구하고 백성을 사랑했기에 영웅이라고 호칭할 수는 있다.
나는 영웅이라는 칭호의 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된다고 본다. 대량 살육의 전쟁으로부터 희생될 수 있는 고귀한 생명을 구한 평화주의자가 전쟁영웅 보다 훨씬 의미 있는 부류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무저항주의에 의해 인도를 대영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 ‘간디’가 해당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안중근 의사는 군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기점으로 하여 중국 등 아시아를 정복하려는 야욕을 끊고, 전쟁으로 인한 대량 살상을 막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다. 그의 가치관은 민족을 구하는 것을 넘어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개인적 원한을 초월한 악의 씨앗이 뿌리내리는 것을 예방한 위대한 정신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영웅이라고 호칭한 것은 맞는다. 진정한 영웅은 올바른 인식의 기반하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다수의 안녕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공자, 석가모니, 예수 그리스도를 성인이라고 하는 데, 그들이 깨달음을 통해 인과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여 인류를 구원하려 하였다면, 영웅은 의로운 투쟁을 통해 올바른 가치를 실현하려는 점에서 대비되기도 한다.
다음은 형가가 역수를 건너면서 노래한 비장한 시를 연상하며,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의 거사를 앞두고 그의 독백이라 여기며 내가 적은 놓은 글이다.
하얼빈의 밤
주여, 나에게 한 자루의 총을 주소서
짓밟힌 민들레꽃들 모아
해 뜨는 동방의 등불이
다시 되게 하소서
시베리아의 찬바람이 문풍지를 울리는 밤
외딴 곳 골방 책상 앞에 앉아
저격의 용서를 빌며 머리띠 동여매고
나는 내일을 기다린다
이역만리 플랫폼에서
그대와 나는 운명처럼 만났다
하지만 나는 환영이 아닌
영원한 배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탕 탕 탕 ㅡ
차가운 브라우닝이 뜨거운 불을 뿜는다
아 ㅡ 장렬한 불꽃을
조국의 이름으로 쏘았다
나는 말해 본다. 안중근 의사는 의기를 가진 열혈남아이면서 정의를 위해 자신을 던진 고독한 사색가이다. 결과적으로 영웅이면서도 영웅을 지향하지 않은 순수한 한 떨기의 민들레꽃이다. 겨레의 아픔을 견딜 수가 없어 자신의 살을 도려내어 죽어가는 혈관에 피를 돌게 한 구원자이기도 하다. 죽음을 두려워 않고 당당히 대의를 위해 교수대에 오르면서, 조국을 사랑한 것을 행복해하면서 환희의 물결이 넘치는 피안을 향해 걸어간 순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