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요리 선생님
밥 해 먹기를 시작하고 한동안 전문가를 찾아 헤맨 적이 있다. 모호하고 아프고 혼란스러운 집밥의 세계에서 나를 구원해 줄, 정확하고 쉬운 요리법을 알려줄 전문가.
스무 살이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전문가는 TV 요리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자취생이 가진 양념과 재료로는 따라 할 수도 없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낯설거나 거창하거나 양 많은 음식들만 만들어 댔다. 냄비와 국자와 그릇과 수저는 왜 요리마다 바뀌는지, 서투른 목수가 연장 탓한다고 그것들이 다 있어야만 음식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TV를 끄고 종로의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웬걸, 요리책 역시 TV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한줄기 빛이 되어 준 것은 잡지였는데, 주부 생활이나 여성 동아 같은 엄마들의 잡지에는 김치전이나 고추장찌개, 비빔국수 같은 소소하지만 꼭 먹고 싶은 음식들의 레시피가 나와 있었다. 몇 달에 한 번씩 미용실에 갈 때마다 쎄씨나 키키 같은 패션지 대신(물론 그 잡지들은 평소에 완전 탐독했다!) 주부들의 잡지를 흘끗거렸다. 그래도 늘 부족했다. 잡지를 찢어올 수도(한두 번 몰래 찢어 오긴 했다. 죄송합니다, 원장님), 찍어올 수도 없었으니까(삐삐 치던 시절 이야기).
그럼에도 요리 선생님을 향한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신촌의 대학가 뒷골목을 지나다가 드디어! 내 인생 첫 요리 선생님을 만났다. 귀엽고 다정하고 세심했던 나의 선생님 이름은 《고사리손 요리책》. 늘 가던 골목인데 서점을 본 것도, 그날따라 일찍 도착해 약속 시간이 남아 들어간 것도, 어린이 서점이라 발길을 돌려서 나오는데 그 많은 책 중에 이 그림책을 본 것도 모두 운명의 데스티니.
딱 내게 필요한 책이었다. 호박전이나 달걀찜 같은 일상식부터 잡채나 김밥 같은 당시에는 별식이었던 음식까지 골고루 실려 있어서 그 한 권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어린이가 만들 수 있는 양을 기준으로 삼았으니 혼자 사는 어른이 딱 해 먹기 좋은 양이었고, 숟가락과 컵으로 하는 계량법은 다른 도구가 필요 없겠다 싶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사진이 아니라 따뜻하고 소박한 그림과 세심하고 다정한 설명은 초보를 기죽이지 않았다. 이 책이라면 혼자서도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것만 같고, 어설프고 서툰 내 손도 맵고 여문 손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순간순간마다 제 몫 이상을 해냈다. 특히 타국에서 이 책은 나의 밥이자, 엄마이자, 나라였다. 괜히 울음 터지는 날에는 ‘후루룩 수제비’를 끓여 삼켰고, 처음 맞는 아빠의 기일에는 ‘동그랑 땡그랑 완자전’을 만들어 제사상에 올렸다. 다른 도시에서 공부하던 친구와 만났을 때는 ‘사이사이 떡산적’과 ‘쫀득쫀득 감자전’을 해 먹었다. 외국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는 ‘차례차례 꼬치 불고기’와 ‘나란히 김밥’을 대접했고, 함께 요리를 배우던 스페인 친구들과는 기적적으로 구한 김치 한 봉지로 ‘한입에 쏙 김치 만두’를 빚었다. 모자란 재료와 부족한 솜씨지만 이 책 덕분에 배도 마음도 늘 든든했다. 지금 이 책은 함께 요리를 배우던 스페인 친구 마릴루의 부엌에 있다. 매 과정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으니, 재료 몇 가지와 조리에 필요한 동사 몇 가지만 스페인어로 옮겨도 충분했다.
한동안 이 책을 잊고 있다가 아이와 함께 요리를 시작하면서 다시 사서 종종 펼쳐 본다. 우리말의 멋과 재미가 느껴지는 음식 이름들, 어린이와 함께 요리할 때 어른의 마음가짐에 대해 쓴 부분은 아이와 이 책을 보고 또 보는 이유다. 이제는 음식께나 한다는 내게도 유용한 깨알 조리 팁들, 이를 테면 파와 마늘은 맵지 않게 미리 찬물에 담그라거나 김은 부술 때 봉지에 넣으라던가, 전을 부칠 때 갖가지 곡물 가루를 사용하면 다양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거나, 오미자 차를 만들 때 유리나 법랑을 이용하면 색이 좀 더 곱게 우러난다던가 하는 것들도 다른 요리책과 비교해 손색이 없다.
TV에는 먹방 쿡방을 채우는 스타 셰프들의 비법이 넘쳐나고, 검색어만 넣으면 원하는 레시피가 사진으로 영상으로 수십수만 개 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다. 올드하게 굳이 책을 두어야 하나 싶지만 주방 한 켠에 꽂힌 요리책은 존재만으로도 안심되는 친정 엄마나 친언니 같다. 일방적으로 흘러가 버리는 영상과는 달리 나만의 속도로 음식을 만들 수 있어서 편리하고, 음식을 향한 작가의 철학이나 경험이 녹아 있으니 내 음식도 덩달아 깊어지는 것 같아 든든하고, 기획부터 출간까지 머리를 맞댔을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내 접시에 담기는 것 같아 뿌듯하다.
오늘도 서점 요리책 서가를 서성인다. 또 어떤 선생님이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줄까 잔뜩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