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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tral May 25. 2024

그림책으로 밥 먹고 삽니다 5

잭은 팬케이크를 먹었을까?

 

주말 아침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빵식을 한다. 밥식에 비해 별다른 반찬 없이도 한 끼 때울 수 있으니 간편하고, 누가 차려도 쉬우니 부담이 없다. 사실 이건 핑계고, 빵은 맛있다.

혼자 있을 때는 통밀과 사워도우로 만들어진 캄파뉴나 치아바타 같은 거친 빵을 먹지만, 대개는 가족 구성원 과반수(라고 해봐야 셋 중 둘)가 좋아하는 식빵이나 모닝빵을, 카페나 호텔에 온 것처럼 예쁘게 기분 좋게 잘 차려 먹고 싶은 날은 수플레 팬케이크를 굽는다. 따뜻하고 폭신하고 보드랍고 탱글탱글한 수플레 팬케이크를 아침으로 먹으면 누구든 무슨 일이든 그렇게 품을 수 있을 것 같고, 어떤 나쁜 말과 화나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튕겨 낼 수 있을 것 같다.


우유와 달걀을 넣고 반죽하기만 하면 되는 시판 팬케이크 가루와 반죽할 필요도 없이 팬에 붓기만 하면 되는 팬케이크 반죽도 나오는 좋은 세상이지만, 수플레 팬케이크는 일반 팬케이크보다 좀 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재료 준비에 앞서 체크해 보아야 할 것은 몸과 마음의 힘이다. 수플레 팬케이크의 폭신함은 달걀흰자에 설탕을 넣고 휘저어서 거품을 낸 머랭에서 온다. 단단한 거품이 식감을 좌우하기에 전동 핸드 믹서나 블렌더가 없다면 온전히 팔 힘에 기대야 한다. 더불어 아이와 가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니, 각종 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한다는 건 곧 천장에서 가루비가 내린다는 뜻이다. 아이가 어지럽힌 부엌을 보고도 웃어넘길 마음의 여유가 그날 있어야만이 수플레 팬케이크를 만들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해결되면 식재료를 점검해 본다. 박력분과 달걀, 설탕과 소금, 우유와 버터 같은 기본 재료에 좀 더 사치를 부려본다면 산뜻한 머랭을 만들어 줄 바닐라 익스트랙트나 레몬즙, 풍미를 더해 줄 생크림과 슈거파우더와 메이플 시럽, 곁들여 먹을 갖가지 과일들, 장식용으로 쓸 애플민트나 타임 같은 허브도 필요하다. 기본 재료야 떨어지면 발품 팔아서 가까운 슈퍼나 마트에서 구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은 온라인 장보기 사이트에서 손품을 파는 수밖에 없다. 엄지와 검지를 몇 번 놀렸을 뿐인데, 자고 일어나면 대형마트나 백화점에도 없는 희귀한 식재료들이 신선하고 정갈한 상태로 포장되어 집 앞에 놓여 있다. 그러니 동네 앞 슈퍼로 발품을 팔아 본 지도 오래다.

에릭 칼의 그림책 <팬케이크 팬케이크> 의 주인공 잭은 재료를 구하려고 밀밭으로 방앗간으로 닭장으로 목장으로 헛간으로 지하실로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마치 현실의 택배 노동자 같다. 팬케이크 한 장 만들어 먹기가 녹록지 않다. 잭은 노동의 대가로 종내에는 달콤한 팬케이크를 맛본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 잭들의 처지는 어떠한지. 당일이니 샛별이니 총알이니 로켓이니 하는 유혹적인 문구를 이고 진 현실판 잭들은 밤낮으로 물류 창고와 배송지를 뛰고 또 뛰어도 팬케이크는커녕 삼각 김밥 한 입, 컵라면 한 젓가락 마음 편히 먹을 시간이 없다. 코로나 19로 인한 비대면 서비스 확장으로 온라인 쇼핑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는 밥도 잠도 쉼도 건너뛰기 일쑤라고 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주택가의 골목길에서, 빌라의 계단에서, 고시원에서, 냉동물류창고의 불길 속에서 안타깝게 스러지고 만다. 내가 먹은 달콤하고 말캉한 수플레 팬케이크는 누군가의 쓰디쓴 수고와 단단한 노동, 안타까운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배송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알면서도 시간에 쫓기는 워킹맘이라는 핑계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나는 여전히 온라인 장보기 사이트를 이용한다. 다만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꼭 쓰지 않아도 되는 재료는 사지 않고, 주문 횟수를 줄이고, 새벽 배송을 지양하기. 또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그들의 노동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결국 나의 노동도 존중받는 일이 될 것이다.


내게 오는 식재료들이 정상적이고 정당하고 존엄한 노동의 산물이기를 바란다. 배송 노동자들의 끼니가 거르는 것 혹은 때우는 것이 아닌 먹는 것, 즐기는 것이기를 바란다. 그들의 휴일 아침상에도 가족들과 즐겁게 만든 따뜻한 팬케이크가 오르길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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