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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tral Jun 01. 2024

그림책으로 밥 먹고 삽니다 6

팥 할머니의 전설

     

어떤 것에 빠져드는 건 탐미주의자라 아름답고 멋진 외양 때문일 때도 있지만,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일 때가 더 많다. 그래서 무엇이든 마음에 드는 것을 보거나 하게 되면 습관적으로 그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 헤매게 된다. 그런 것들 중에 마음에 흡족한 이야기를 찾지 못한 것은 팥빙수뿐이었다. 빙수는 기원전 3000년 전 중국에서 눈에 꿀과 과일즙을 섞어 먹은 것이라고도 하고, 조선시대 서빙고 얼음을 잘게 부수어 화채를 만든 것이라고도 하고, 결정적으로 팥을 올린 건 일본 빙수 카키고오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아……이 이야기들은 부족하거나 허전하거나 믿고 싶지 않다.


그런데! 어느 여름, 정말 개연성 제로지만 믿어 버리고 싶은 이야기가 나타났다. 그림책 <팥빙수의 전설>. 배고픈 눈호랑이가 할머니를 겁박해 음식을 하나둘씩 빼앗아 먹다가 결국 뜨거운 단팥죽을 뒤집어쓰고 ‘눈호랑이 범벅’이 되었으며 이것이 팥빙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익숙하지만 새롭고, 거짓말이지만 진짜 같다. ‘팥죽할멈과 호랑이’,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빨간 모자’ 같은 옛이야기들이 마치 팥빙수처럼 맛나게 비벼져서, 이렇게 읽으면 이 맛이, 저렇게 읽으면 또 다른 맛이 느껴져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옛이야기처럼.


음식은 아무 곳에서나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지만 좋아하는 몇 가지 음식만큼은 미슐랭 평가원만큼이나 깐깐하게 따져 먹는다. 팥으로 된 음식이 바로 그것들이고, 그 가운데 팥빙수는 원 톱이라고나 할까. 바람이 끈끈해지고 긴소매가 거추장스러워지기 시작하면 팥빙수를 먹으러 간다. 여름을 시작하는 나만의 리추얼이다. 단팥을 수북하게 올린 빙수를 먹어야만 비로소 여름이 시작된 것 같고, 뜨거운 열기와 숨 막히는 습기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첫빙은(그해 먹는 첫 빙수를 일컫는 나의 고유 명사)은 늘 가던 가게에서, 늘 먹던 메뉴로 한다. 우유 얼음과 단팥만 올린 그야말로 팥빙수. 만족스러운 첫빙식을 치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빙수집을 전전했던가. 얼음이 마음에 들면 단팥이 별로였고, 이거다 싶은 단팥을 발견하면 얼음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나슐랭의 첫빙 기준에 부합하는 팥빙수란 어떤 것인가.

우유 얼음은 연유가 살짝만 섞여 달큰한 정도여야 한다. 너무 달면 금세 질릴 뿐더러 단팥의 맛을 해친다. 연유 대신 설탕을 넣으면 진한 맛이 사라지고 빙질이 바스러지는 느낌이 든다. 거칠게 갈려 입에서 서걱거리면 안 되고, 과할 정도로 곱게 갈아서 먹기도 전에 녹아내리면 곤란하다. 말 그대로 눈꽃의 상태, 폭신폭신하고 보드랍지만 그 미세한 얼음 알갱이 하나하나가 느껴질 정도면 합격이다.


하지만 얼음 상태보다 더 중요한 건 단팥. 팥 앞에 ‘단’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으니 일단 달아야 한다. 하지만 팥의 탑탑한 맛을 살짝만 감싸 줄 정도의 달기여야한다. 지나치게 달면 팥 특유의 매력이 사라져 몇 입 먹으면 속이 아프다. 달기만 한 팥은 매력이 없다. 계피가 들어가 맛도 향도 알싸해야 그 여운이 오래 간다. 오래 푹 끓어 알갱이가 뭉개진 것도, 설익어 팥알이 입안에서 도드라지게 굴러다니는 것도, 지나치게 되직하거나 묽은 것도 불합격이다. 끝으로 얼음과 단팥의 비율은 1대 1이어야 하니 팥 추가는 기본이다.


부족함이 없는 팥빙수를 찾아 오래 헤맨 끝에 칠년 전 쯤 한 빙수집에 정착했다. 일터에서 적당한 거리에 있어 빠른 걸음으로 걷자면 이마와 등에 땀이 맺히고 목이 탈 무렵에 도착한다. 갈급한 몸과 마음에 떠넣은 팥빙수 한 숟가락이란!  입안과 눈앞에 꼬마 전구가 반짝 켜진다. 목덜미와 등줄기, 명치 끝을 타고 찌릿한 전기가 흐르면 두 발과 고개는 나도 모르게 리듬을 탄다.


첫빙식이 끝나면 1주 1빙으로 여름을 나는데, 그때부터는 다양한 맛을 즐긴다. 콩가루가 덮인 것, 단호박이 섞인 것, 망고나 딸기를 올린 것, 녹차가루를 뿌린 것, 밀크티를 얼려 갈은 것 등. 하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조연에 그쳐야 한다. 주연인 단팥보다 튀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스무 번 가까이 팥빙수를 먹다보면 여름이 간다. 막빙식을 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면 팥칼국수를, 눈이 내리면 단팥죽을, 꽃이 피면 단팥빵을 먹으면서 다가올 첫빙식을 기다린다. 베이스가 달라질 뿐 내 인생의 맛은 달콤하고 녹진한 단팥 맛인 거다.


이 작고 매끈하고 단단하고 붉은 낱알에는 혀끝의 즐거움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팥은 의학적으로 부기를 빼 주고 혈압이 오르는 것을 막아 준다. 그래서 팥을 먹은 날은 사람 때문에 퉁퉁 부은 마음도 쉬 가라앉고, 일 때문에 거꾸로 솟는 피도 제자리를 찾았던 건가? 팥은 우리나라에서는 귀신을 쫓고, 일본에서는 경사스러운 날 먹는 음식이다. 코비드라는 유례없는 역병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던 것도, 감사할 일이 많아진 것도 팥 덕분이었나?   

 

‘옛날 옛날에 팥을 좋아하는 할머니가 살았대. 베란다 텃밭에 심은 붉은 팥을 거두고 불리고 삶아 만든 단팥으로, 봄에는 빵을 굽고 여름에는 빙수를 만들고 가을에는 칼국수를 끓이고 겨울에는 팥죽을 쑤어 먹었대. 할머니는 그렇게 쌀보다 팥을 더 먹고 또 먹은 덕분에, 화도 안 내고 열도 안 내고 즐거운 마음으로 건강하게 오래오래 잘 살다가 점점 작아지고 쪼그라들어서……

팥이 되었대?!’

손주의 손주, 그 손주의 손주는 내 이야기를 이렇게 전할지도 모르겠다.

제목하여 ‘팥 할머니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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