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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tral May 11. 2024

그림책으로 밥 먹고 삽니다 4

엄마 하나 도시락 여섯   

봄이다. 코시국 3년차의 봄은 유난히 애틋하다. 마스크 때문에 마음놓고 즐기지 못하는 봄내음와 봄바람이 아깝고 아쉽다. 부드럽고 순한 바람이 불면 봄 소풍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살랑살랑한 봄바람과는 달리 내게 봄 소풍은 조금은 짠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시절 소풍에는 왜 꼭 엄마들이 따라 갔던 건지, 일하는 엄마가 올 수 없었던 소풍날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엄마는 그걸 보상이라도 하듯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맛난 도시락을 싸 주었다. 달콤하게 졸인 쇠고기가 들어간 김밥과 갖은 야채로 볶은 밥을 채워 넣은 유부초밥, 봄꽃 같은 연노랑 달걀지단으로 잘 말아 싼 오므라이스, 짭조름하고 바삭한 통닭(그 시절엔 치킨이란 말도 없었지.)과 적당히 칼집을 넣어 꼬부라지게 구운 비엔나소시지까지. 평범하고 단정하지만 꼭꼭 담은 사랑과 정성만큼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던 엄마의 도시락이 함께여서 서러움과 섭섭함은 잠시였다.


엄마가 싼 도시락이 어디 그뿐이랴. 학교에서 밥을 준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에, 세 딸은 키운 엄마는 딸들의 점심과 저녁 도시락에 가끔은 간식까지 챙겨 보냈으니, 하루에 도시락 여섯 개를 싸는 건 기본이었다. 그럼에도 도시락 못 쌌으니 오늘 하루쯤은 사먹으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점심과 저녁 도시락 국과 반찬이 겹친 적도, 당신 손으로 짓지 않은 밥과 반찬이 들어간 적도 없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흉내는 물론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십수 년 동안 새벽마다 했을 엄마를 생각하니, 소풍날 서럽고 서운했던 마음 같은 건 감히 꺼내 놓을 수도 없다. 썰렁하고 어둑한 새벽의 부엌에서, 육십 명 아이들이 바글댔을 한낮의 교실에서, 발걸음을 재촉하는 저녁 무렵 차속에서 엄마는 소풍 떠나는 딸들처럼 계절이 피고 지는 걸 느낄 새가 있었을까.

 

나의 엄마의 마음을 살뜰히 살필 사이도 없이 시간이 흘러 나도 소풍 도시락을 싸야 하는 엄마가 되었다. 이런 엄마 밑에서 자란 딸이니 차마 내 딸의 도시락에 파는 음식을 담아 보낼 수는 없었다. 다행히 지금은 보육 기관과 교육 기관에서 밥을 주지 않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절이라 일 년에 겨우 두 번 남짓한 소풍날만 도시락을 싸면 되고, 엄마가 소풍에 따라가지 않아도 되니 아이도 즐겁고 나도 즐겁자고 도시락을 싸기로 마음먹었다.


시작은 소소했다. 첫 봄 소풍에는 김밥과 암탉 모양으로 만든 메추리알, 문어를 흉내 낸 소시지가 들어간 도시락을 쌌다. 하트로 변한 어린이의 눈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하트를 못 잊어 가을 소풍에는 달팽이김밥과 사과계란말이를 준비했다.


아이는 다음 도시락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어린이의 기대치와 나의 자신감이 올라갈수록 할 일은 많아졌다. 이듬해 봄에는 리락쿠마와 문어소시지 유부초밥을, 가을에는 그림책 <세모> <네모> <동그라미>의 캐릭터를 닮은 유부초밥과 치즈볼을 준비했다.


엄마 도시락 먹게 만날 소풍가면 좋겠다는 아이의 말은 내 의지에 불을 지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던가. 시작하면 일단 끝을 봐야 하는 나는 일 년에 고작 두 번 싸려고 일본의 어느 서점에서 캐릭터 도시락 책을 사고, 각종 도시락 꾸미기 도구들을 들이고, 요리 인플루언서들을 팔로우하고, 인터넷으로 수십 가지 레퍼런스를 수집하고,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쌀 것인지 밑그림을 그렸다. 봄에는 비트와 시금치로 색을 낸 벚꽃김밥에 날아드는 꿀벌김밥을 말아 딸기요정과 청포도병정을 곁들였고, 가을에는 알밤주먹밥에 솔방울소시지, 도토리메추리알로 도시락에 계절을 듬뿍 담았다. 밤늦도록 계속되는 재료 준비와 꼭두새벽부터 시작되는 조리에 피곤해도 그 옛날 엄마의 1일 6도시락을 생각하면서, 아이 눈의 하트를 떠올리면서, 깨끗이 비워진 도시락 통을 기대하면서 기꺼운 마음으로 3년 간 여섯 번의 도시락을 쌌다.


이 무렵, 그림책 <엄마 셋 도시락 셋>을 보게 되었다. 일도 살림도 잘하고픈 직장인 엄마,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아서 깜빡하는 일도 많은 프리랜서 엄마, 자신의 이름도 잊은 채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알아주는 이 하나 없는 전업 주부 엄마. 세 엄마는 아이들의 소풍날을 맞아 도시락을 싸느라 분주한 아침을 보낸다. 삶의 모양도 다르고 소풍 도시락의 내용물도 다르지만,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가족을 위해 숨가쁜 하루를 보내는 모습만은 똑닮은 세 엄마.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소풍 도시락을 직접 싸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일이 바쁘고 몸이 힘들어도, 아무리 자아가 강하고 자신이 없어도 역시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비록 아이를 키우면서 수년의 세월이 훌쩍 흐르고 수십 번의 계절이 가는 줄 몰라도, 어느 그림책의 제목처럼 엄마의 모든 계절은 아이라는 것을. 그리고 오랜 세월 기꺼이 우리의 도시락을 싸 왔던 엄마의 마음도 엄마가 된 내 마음과 같았겠구나 하는 것을.


다음 봄에는 딸을 위한 도시락 말고 엄마를 위한 도시락을 싸야겠다. 온갖 채소와 과일즙으로 물들인 알록달록 꽃김밥을 말고 엄마가 좋아하는 향긋한 봄나물 무침을 곁들이고 텀블러에는 다방 커피를 담아야지. 부드럽고 순한 봄바람이 부는 숲에서 모녀만의 봄 소풍을 즐긴다면, 사라진 엄마의 세월과 계절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이글은 2022년에 쓴 글입니다. 올 봄에는 이런 도시락을 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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