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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힌 Oct 03. 2021

#12 곶감

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어릴 적, 나에게 곶감은 명절 때만 먹는 달고 까맣고 동그란 음식이었다. 제사상 한쪽 구석에는 항상 하얗게 가루가 낀 검은 곶감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제사가 끝나야지만 한 두 개씩 주워 먹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면 할머니는 늘 투명한 비닐봉지에 열 몇 개 정도 가득 담아 올라갈 때 오빠와 함께 간식으로 먹으라며 챙겨주셨다. 막상 올라가는 차 안에서 먹지 않았지만, 명절 연휴가 지나고 한 입 베어 물면 달달하면서 쫀득한 그 맛이 다시 일상과는 다른 명절의 생소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곶감이 일반적으로 빨갛다는 걸 알게 된 건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이었다. 상주곶감 광고를 보고 친구에게 상주 곶감은 빨개서 신기했다고 말했더니 오히려 친구가 그렇게 말한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러곤 곶감은 원래 붉은 거 아니냐며 까만 곶감은 본 적도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동안 평범하게 쭉 먹어왔던 까만 곶감이 흔하지 않은 특별한 곶감이었다는 걸 깨닫자, 머리가 띵해졌다.



 처음이었다. 알고 있던 ‘일반적인’ 무언가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고집이 꽤나 있는 편이었는데, 책과 같은 정보들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게 통상적이며 옳다고 믿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그르고 남다르다고 생각하며, 누군가 반박이라도 하면 귀를 닫아버리거나 그의 반박에 반박을 하며 일방적인 설명을 했다. 이랬던 나의 견고한 틀에 ‘곶감’이 거세게 던져지면서 그 충격으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두 눈은 그 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좇았고 비로소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빨갰던 게 검게 된 곶감만치 그에 대한 내 인식이 크게 바뀐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오빠다. 어린 시절 오빠는 나의 놀이 메이트이자 이야기꾼이었다. 팔다리가 짧고 통통하던 어린이였을 땐 함께 인형을 들고 거실을 뱅뱅 돌며 뛰어다녔고, 좀 더 크자 스케치북에 같이 게임을 만들고 그려서 놀기도 했다. 나란히 누워 잘 때면 오빠는 자신이 지어낸 얘기를 해줬는데, 나는 그 얘기에 빠져들고 가끔은 끼어들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나에게는 오빠의 이야기가 티비에서 방영되던 보거스만큼이나 재미있었다. 오빠와 이야기가 함께 하던 밤이면, 하나 남은 마카롱을 아까운 나머지 깨알같이 야금야금 먹는 것처럼 시간이 조금씩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춘기가 찾아오는 중학생이 되자, 오빠는 내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말해 그 당시 나는 오빠에게 성질부리고 대들었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싸가지 없는 동생이랄까. 오빠에게 어떤 식으로 짜증을 내고 그랬는지 기억이 대부분 잘 나지 않지만, 컴퓨터를 하며 의자에 앉아있는 오빠에게 누운 상태에서 “30분만 더한다고 약속했잖아!” 하고 소리 지르며 발길질을 했던 그 순간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 결국 오빠는 철없는 동생에게 컴퓨터를 양보해주었다. 분했던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뒤섞인 탓일까? 아니면 사춘기 소녀였던 탓일까? 이 기억은 꽤나 강하게 남았다. 바닥까지 기억을 긁어내 보려 했지만 과거에 대한 기억력이 좋지 못한 탓에, 슬프게도 남은 오빠와의 그 시절의 추억은 이것뿐이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본 오빠는 윤슬처럼 반짝거리는 사람이었다. 아주 꼬마이던 시절부터 대학생이 됐을 때까지 그림만 꾸준하게 좋아해 오고 그려왔다는 점이 굉장히 대단해 보였다. 이것저것 해오면서 변덕 부렸던 나는 계속해서 한 가지만을 위해 노력해온 그런 오빠가 신기하고 멋있었다. 나와 같이 내성적이던 오빠였는데, 대학생이 되자 동기, 선후배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점도 부럽고 빛나 보였다. 마치 인싸처럼. 어려운 시험을 보고 원하는 지역의 공군에 입대까지 하게 되자 오빠는 내가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뱁새요, 오빠는 다리 찢어질라 감히 쫓을 수 없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황새가 되었다. 그때쯤 되니 나도 모르게 할머니나 부모님께 사랑받으며 바르게 잘 커온 건 오빠, 말썽 부리며 변덕 부리며 그냥 큰 건 나라고 오빠와 나를 구분 지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서른 살을 넘겼을 무렵, 오빠에 대한 내 인식은 또 한 번 크게 바뀌었다. 아버지가 내게 전해준 말 몇 뭉치 때문이었다. 그날은 아버지의 차를 타고 함께 이동 중이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아버지에게 속 얘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오빠는 바른데 나는 그러지 못해서 속상하다는 말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오빠의 결혼식에 관한 선언을 할 때 했던 말이 있다며 입을 여셨다. 오빠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동생은 엄마 아빠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해 주면서 나는 처음으로 하고 싶은 걸 말하는 데 왜 들어주지 않냐고.


 그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울렁거렸다. 말썽쟁이인 내가 있었기에 오빠는 바를 수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과 오빠니까 힘들어도 참아냈을 거란 생각이 밀려들었고, 밑바닥에 살짝 남아있던 왜 오빠만? 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던 마음이 쓸려나갔다. 좁게만 바라보는 어리석음에 멀미가 났다. 상처 받았던 마음과 그래도 동생을 아껴주는 따스한 마음이 동시에 느껴지자 속상함과 미안함 그리고 애틋함이 한데 얽혔다.



 이렇게 모자란 동생에게 오빠는 집 근처에 동생이 이사 오자, 따뜻한 마음을 가득 담아 손 편지를 써주었다. 오밀조밀한 글자 하나하나를 다 읽어 내려갈수록 마음이 한 땀 한 땀 따스히 채워졌다. 든든한 나무가 되어주겠다는 편지의 마지막 한 구절은 우울하거나 힘이 들어 마음이 뙤약볕 한가운데 있는 느낌이 들 때면, 언제든 다가와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었다. 


 여러 가지 모습을 거쳐 지금 현재 오빠는 나의 커다랗고 튼튼한 나무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도록 응원과 도움으로 그늘을 만들어준 이 멋진 나무를 나는 힘껏 아껴주고 싶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소년이 되기는 싫다. 받기만 하는 것도 싫고, 나무만 모든 걸 다 퍼주고 밑동만 남는 슬픈 엔딩은 더더욱 싫다. 영양제와 시원한 물도 챙겨주고 걱정 가득한 잡초도 뽑아주며 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소녀가, 나는 되고 싶다.





글 쓴 동생 - 율힌 yulhin

그림 그린 오빠 - 토마쓰리 Thomas Lee



시누이와 새언니

시누이는 게임을 좋아한다.

의자에 엉덩이를 찰싹 붙여

하루 종일 게임만 할 수 있을 정도로

게임을 좋아한다.

여느 남자 못지않을 정도로

게임을 잘하고 좋아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 시누이다.

이와 반대로 시누이의 오빠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잘하지 못해서 안 한다고 한다.

시누이의 오빠는 남잔데 게임을 안 해? 하는

의문들을 종종 들었다.

새언니는

세상이 말하는

여자답지 않은 시누이가,

남자답지 않은 남편이

답지 않기에 너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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