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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힌 Oct 24. 2021

#15 산책

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우리 집에서 5분에서 10분쯤 걸으면 공원이 나온다. 꽤나 큰 호수를 품은 공원이라 그런지 우리 동네는 물론 먼 지역에서도 많이 놀러 오곤 한다. 주말이면 주차장과 골목골목이 자동차로 가득 차있을 정도로 정말 많이 온다. 공원엔 나무로 된 데크가 호수 가까이에 뱅 둘러 길이 나있으며, 곳곳에 설치된 조명은 모두가 노랗고 은은한 빛을 뿜어낸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 산책을 나오면 눈에 보이는 한 움큼 한 움큼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이사 오기 전에 공원에 와보고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멋진 공원이 가까이에 있으니 매일 산책하면서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 그러나 내 작고 게으른 몸뚱아리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아주 가끔씩만 공원으로 행차했다. 술 마신 다음 날에 운동하면 간에 좋지 않아! 라던가 시간이 늦어서 위험해! 하며 안락한 집에서 뒹굴 거렸다. 처음에는 핑계도 정성 들여서 지어냈건만 나중에는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는 게 무의미하다고 여겨져서, 그러지 않았다. 헬스장처럼 공원 이용권을 끊어 놓은 것도 아닌데, 그냥 집에 있고 싶으면 있는 거고 나가고 싶음 나가지는 거지 뭐.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이따금 만나는 산책은 좋았다. 나는 밤 산책보다는 아침 산책이 더 좋았다. 아 물론 찔 듯이 더울 때는 빼고. 밤 산책은 사람도 많았고 그만큼 신경 쓰이는 것도 많았다. 가쁘게 숨 쉬며 러닝 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줘야 했고, 자전거나 씽씽이 타고 다니는 무법자 꼬맹이들도 요리조리 피해 다녀야 했다. 다정하게 걸어가는 커플, 즐거워 보이는 무리들이라도 보이면 재빠르게 걸어서 그들을 앞질러 갔다. 물론 짝지가 생긴 지금은 괜찮지만, 그 당시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이 저녁에도 혼자 나와서 자기 관리하는 여자다! 하고 맘속으로 암만 소리쳐 보아도, 그들을 볼 때마다 생기는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이 감정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대체로 아침 산책을 즐겨했다. 주말보단 평일에 쉬는 날이 생기면 공원에 나왔다. 남들은 일하고 있을 때 백수마냥 한량마냥 공원을 거니는 게 좋았다. 이는 내가 낮맥을 즐기는 이유와도 같다. 그래서 한 번은 아침 산책하고 바로 버거킹에서 햄버거를, 마트에서 흑맥주를 사서 테라스에 앉아, 호수를 벗 삼아 마주 보며 먹었다. 산책의 맛과 맥주의 향기로 여유로움이 마음속 가득히 충만해졌다. 이게 행복이구나 느끼며, 나는 반짝이는 햇살 사이로 스며들었다. 포근한 여유가 주변을 맴도는 그 순간이 사랑스러웠다.     







 나의 아침 산책 동료들은 대체로 어르신들이 많았는데, 요상하게도 시기나 질투의 못난 맘이 들기보다 멋있다, 나이 들어서 꾸준히 산책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비교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일까. 신경도 덜 쓰였다. 그러다 보니 아침 산책을 할 때는 머릿속 빈 공간에 아무것도 적지 않으며 멍을 때려보기도 하고, 이번 주엔 어떤 글을 쓸지 주제는 뭐가 좋을지 고민해보기도 하고, 그냥 눈앞의 꽃이, 나무가, 풀들이 어여쁜 걸 즐기게 되었다. 이 시간들이 사랑스러워지자, 나는 아침 산책을 몹시 애정 하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산책을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생각만 자꾸 드는 밤 산책이나 여럿이서 같이 하는 산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말이다. 동네 친구들과도 가끔 산책을 하는데, 혼자서 하던 산책길과 같은 루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풍경이 어땠는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웃기도 했었는데 왜 웃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혼자 하던 산책은 물의 반짝임이라든가 코스모스가 너울대는 이미지가 강하게 떠오른다면, 함께 하는 산책에선 옅게 잔향만 조금 남은 향수 냄새가 났다. 두 산책 모두 매력이 있지만 온 힘을 다해 그 공간과 공기와 소리들을 기억할 수 있는 혼자만의 산책이 더 끌렸다. 쉽게 흩어지고 점점 멀어지는 기억, 뜸해지는 과거의 순간들을 붙잡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번 휴일엔 게으름을 벗고 당차게 한 발 내디뎌 보련다. 그날의 햇볕과 그날의 바람, 그날의 풀내음, 그리고 나와 함께한 모든 자연과 가슴 가득 여유를 머금은 나를 꼭 품어 주며 온전히 기억하기 위해.  그날의 공원에서 또 하나의 추억을 만나기를 바라며, 다시 만나기를.







글 쓴 동생 - 율힌 yulhin

그림 그린 오빠 - 토마쓰리 Thomas Lee





시누이와 새언니

셋이었다.

시누이, 새언니, 그리고 새언니의 남편이자 시누이의 오빠까지

우리는 종종 셋이었다.

돌이켜보면 둘만 있고 싶던 적도 많을 텐데

맛있는 거라도 먹을 때면 새언니는 꼭 시누이를 불렀다.

시누이는 그래도 염치라는 게 좀 있어서

새언니와 오빠가 좋았기에 부르면 사양은 하지 않았지만 먼저 청하진 않았다.

그래도 참 좋은 것은 '언제든지', '시간 되면' 이란 말이

우리가 지척에 살고 있기에

기약 없는 헛된 것이 아닌, 희망에 찬 약속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넷이 되었다.

우리는 또 날짜도 정하지 않은 약속들을 한다.

곱창을 먹자며, 에버랜드를 가자며 함께 놀 미래를 그린다.

시누이는 그 미래가 낯설지만 설레고 기대된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시간 되면 꼭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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