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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하 Mar 07. 2024

자기 암시, 자기 확언, 자기 분열 그리고 존재하기

조이솝 비평




이솝이 나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은 “저는 어떤 사람 같아요?”라는 질문이었다. 이 당혹스러운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즉각적으로 그가 구축해나가고 있는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었다. 당시 나는 그가 자신의 스테이트먼트에서 사용하고 있는 ‘나르시시스트적’이라는 단어에서 의아함을 느꼈는데 그 의아함은 나르시시즘을 가진 이가 자기 스스로를 나르시시스트적이라고 칭하는 것은 다소 나르시시스트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연유했고[1] 또 그의 작업의 몇몇에서 나르시시스트적 요소[2]들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자신 스스로가 나르시시스틱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작가의 스테이트먼트에 사용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소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첫 질문을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스스로가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멋진 인간이야!”라고 자기 확언[3]하는 30대의 나의 모습과 겹쳐보며 의아함을 다소 해소했다. 


그의 작업 자체가 ‘나르시시스트적’이라는 것, 그리고 ‘나르시시즘’을 작업 스테이트먼트 내로 끌어오는 것에 대한 논의 보다 중요해보였던 건, 그가 자신을 타자에게 다시 투영하고 존재함을 증명하는 방식과 이것이 그의 작품에서 작동되고 구현되는 방식이었다. 그가 나에게 던진 첫번째 질문도 그러한 방식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 질문은 타인의 입과 언어를 통해서 듣는 자기 암시에 가까운 것이었다. 즉, 그 질문은 완전한 타자에게 건네는 질문이 아니라, 자기 암시와 확언을 위한 일종의 투영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에게 타인 혹은 ‘우정’[4]이라는 바운더리 내에 있는 사람의 관계와 역학이 그의 작업에 꽤 중요하다는 생각 했다.[5] 그리고 나는 그의 작업 전반에서 동료와 친구라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반복되는 ‘자기암시’와 ‘자기확언’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질문과 응답, 그리고 자기 암시와 확언의 방식에서 나는 영화 <로제타>(1999)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이 영화의 주인공 로제타는 18살, 공장 수습기간이 끝나자마자 해고 당하고,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와 함께 이동식 트레일러에서 생활하며, 헌옷을 주워서 어머니가 수선하면 그것을 내다팔고, 강에서 숭어를 잡아 먹으며, 와플 가게에서 일하는 친구 리케를 배신하고 일자리를 꿰차며,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리고, 약물에 취한 어머니와 가스중독 동반자살시도를 하는 인물이다. 내가 떠올린 장면에서 로제타는 유일한 친구이자 동료, 그리고 구원자로 그려지는 리케의 집 침대에 누워 다음과 같이 혼잣말을 한다. 


"네 이름은 로제타. 내 이름은 로제타.

넌 일자리가 생겼어. 난 일자리가 생겼어.

넌 친구도 생겼어. 난 친구도 생겼어.

넌 평범한 삶을 살 거야. 난 평범한 삶을 살 거야.

넌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거야. 난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거야."[6]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따뜻히 환대 받은 로제타는 너와 나라는 주체를 이동하며 자기 암시와 자기 확언을 끊임 없이 반복한다. 네 이름, 내 이름, 넌, 난, 너와 나의 이름을 부르고, 너와 나를 인식한다. 나와 너, 우리는 이제 일자리도 생겼고, 친구도 생겼고, 평범한 삶을 살 것이고, 이제 더 이상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이다. 


자기 암시와 자기 확언의 순간을 통해 로제타 그리고 이솝은 지속적으로 '우정'과 자기를 증명하고 재구성한다. 이러한 자기 증명과 자기 존재의 방법으로 이솝은 푸코의 '우정'의 개념을 택한다. 그의 작업에서 푸코의 ‘우정'의 개념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앞서 설명 했듯 타자, 친구와 동료에게 던지는 그러한 질문은 '삶의 방식으로서의 우정'을 구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그의 작업은 단순히 자기암시와 자기확언의 연속이 아니라, 푸코가 이야기하는 '우정'의 개념에 따라 복잡한 관계와 연결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다. 즉, 로제타와 이솝은 나와 너 사이를 진동하면서 나는 다시 너에게, 그리고 너는 다시 나에게 말을 걸며 이 진동, 자기 암시, 자기 확언, 더 나아가 자기 분열적인 반복의 도착점 (만약 이곳에 신의 존재나 중력같은 게 있다면 그 진동의 반복의 끝에는) 더이상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나는, 너는, 우리는 이제 평범한 삶을 살겠다는 암시이자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로제타는 여느 때처럼, 침대에 누웠는데도 이유 없이 계속되었던 복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헤어 드라이어로 따뜻한 바람을 아무리 쬐어봐도 도저히 사라지지 않던 배에서 느껴졌던 냉기, “피부 속으로, 뼛속으로 차갑게 스며드는 바람과 끔찍한 추위”, “고립과 향수, 소외, 절망의 감정”[7]이었던 그 복통이 사라진 것이다. 멜리사 그레고리는 『정동 이론: 몸과 문화·윤리·정치의 마주침에서 생겨나는 것들에 대한 연구』 에서 이러한 감각적이며 신체적인 경험은 우리의 삶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랑과 비통함, 그리고 다양한 감정들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경험이 어떻게 우리의 신체와 연결되어 있는지 설명한다. 몸의 여러 부분, 특히 뼈와 살, 내장, 연골은 감각적 경험의 핵심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세상을 느끼는 방식,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우리의 감정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준다. 로제타가 끊임 없이 복통에 시달리는 이유, 그리고 조이솝의 자소상들에서 보이는 낙서와 얼룩(멍)들, 누더기들도 그러하다. 


《공중 정원》(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 2023.8.30~2023.11.19)에서 선보인 그의 자소상에서도 이러한 것들을 살펴볼 수 있다. 뼈와 살, 내장, 연골이 누더기처럼 붙어 있는 <행복한 사람>(2023)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에서 영향을 받았다던 그 자소상의 시선은 꼿꼿히 서서 마을을 굽어보며 스스로를 떼어 베푸는 ‘행복한' 동상처럼 자신을 둘러 싼 세계를 바라보며 미래를 향하는 듯 한다. 반은 완성되고 반은 파괴된 형태다. 혹은 이미 완성된 것을 파괴했거나. 몸 전체에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눈은 뽑혀 나가 있고,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고, 소중했던 보석들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자세히 살펴보면 멍과 같은 균열과 얼룩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나는 멍이 든다. 약간 푹 꺼져서 앉아 있다가, 점점 더 지치게 되고, 이 멍듦이 속으로까지 들어가서, 가슴 속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느껴진다.”[8] 자소상의 잘린 오른 팔에서 점액, 담즙, 피처럼 점성이 있는 황금빛 물질이 흘러내린다. 자소상들에 쓰여진 낙서들이 보인다. ‘나와 너 사이에는 큰벽이 있어’, ‘미안해’, ‘I was…’... 여기서 ‘나'와 ‘너’는 누구인가? 그가 사과하는 그 대상은 누구이며 무엇인가?


핀다로스의 『네메아 송가』에서 묘사된 시인의 이야기는 깊은 애도와 정동의 연속이다. 시인이 신뢰하던 그 유일한 친구의 죽음은 그가 경험한 최대의 상실이었으며, 그의 작품에서도 그 비참함을 완전히 전달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실감은 인간의 삶 속에 녹아있는 보편적인 경험으로, 이를 통해 우리는 인생에서 별안간 닥쳐오는 운과 불운의 무작위성과 이에 대한 우리의 “수동상태"[9]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마사 누스바움은 수동 상태를 자연 세계 속에서 인간이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인간의 본질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네메아 송가』 중 다른 구절로,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통해 온갖 것을 얻으려 하네. 주로 곤경에 처했을 때, 그렇지만 즐거울 때도, 신뢰할만한 안목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네'”라고 언급하며, 우리가 “운에 노출되어 있는 한편 가치도 자각하고 있는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의 외부 존재에 의존하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운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곤경과 마주칠 때 오직 타자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한다”[10]고 말한다. 즉, 우리의 이러한 수동상태에서 우리를 다시 구출하는 것은 타자와 세계이다. 이제 다시 이솝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저는 어떤 사람 같아요?”라는 질문에서 이솝의 작업과 그의 세계를 그리는 과정을 엿보며 우리는 다시 우리가 타자, 세계와 맺는 관계, 그리고 자기 암시와 확언, 그리고 분열된 자아를 내밀히 살피며 우리의 자기이해방식을 자문한다.





위 글을 쓰고 시간이 다소 흘렀다. 《프레이머 Framer》(샤워, 2023.6.17~7.24.)와 《공중 정원》(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 2023.8.30~2023.11.19) 오프닝에 방문했던 무더운 여름날과 《I&I》(실린더, 2023.10.7~10.29) 를 방문했던 가을 사이의 간극… 그 시간 동안 그는 무엇을 느꼈었나? 나는 그 전의 작품들에서 느꼈던 아주 뾰족하고 날 선 조형언어들이 회화에서 다소 희석되었고, 평면으로 옮겨가며 따뜻하고 뭉개진 희미해진 기억 같은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린 많은 순간들—Pornhub에서 가져온 참고자료—에서 대부분은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는 얼굴들, 깍지를 낀 손들, ‘당신과 가장 연결되어 있는’것 같은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었다. 스크린 너머의 참조가 이곳에서 존재를 갖게 된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불완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완전함을 향해 생성하고 있었다.


한편 《I&I》와 유사 기간 동안 진행된《오소독소 vs 오소독스》(성북예술창작터, 2023.10.6~11.30.) 에서 그는 <악의 꽃>(2021) 시리즈에 이어 <꽃은 꽃이 아니다>(2023)를 새롭게 선보이는데 <꽃은 꽃이 아니다>에서도 이러한 조형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나무패널에 두텁게 올린 석고와 그 위 벽지 패턴이 찍혀 있다. 자연의 직접적 모방을 지양하며 나무 판과 석고라는 매체를 사용하여, 자연이 아닌 인간이 창조한 장식적 패턴들—벽지와 의류 천에 새겨진 것들—을 빌려와 시각적 언어로 변환한다. 이러한 매체의 선택은 물성의 변형을 통한 창조적 표현으로,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나 장식적 요소가 아닌, 복잡한 인간 상상력의 산물로 재해석한다. 


그런 전환, 조형적인 날카로움에서 희미해지고 뭉개진 따뜻한 색감의 배치와 질감에서 더 이상의 괴로움은 희미해진 채 이제는 애도의 어느 선상에서 편안해지고 있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듯 했다. 더 이상 자기 암시와 확언, 그리고 분열된 자아 사이를 진동하며 스스로를 향한다기 보다는 그 진자의 운동 경로 밖으로 탈주선을 그리며 그 자신을 뻗어나가고 있는 그런 방향과 모양새였다. 로제타처럼 자살시도를 위한 그 무거운 가스통을 옮기다 바닥에 떨어뜨리고, 바닥에 주저 앉고, 한 껏 울고 나면, 이제 더이상 그런 날카롭고 아프고 조형적인 상처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걸까? 울고 있는 로제타의 등 뒤를 비추는 엔딩 장면 프레임 밖의 리케가 등장한 것일까? 이제 그는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재배치하고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기 시작한 것일까? 나와 너 사이를 진동하며 끊임 없이 존재함을 증명해왔던 이솝(들)은 이제 “존재하기(들)을 넘어서 생성하/되고”[11] 있는 걸까?







[1] 물론 ‘자기 인식 있는 나르시시스트(self-aware narcissist)'도 있고 또 나르시시즘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의 나르시시즘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당시 나는 ‘나르시스틱하다’ 혹은 ‘나르시시즘’이라는 표현이 나르시시즘(NPD, 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에 가깝다고 생각했었다. 

[2] 조이솝의 작업에 대해 ‘나르시시스트적’이거나 ‘나르시시즘적’이라고 평한 글은 다음의 참고하라. 양효실, 「I AM WHAT I AM(NOT), THEREFORE I EXHIBIT」, 『사우다드: 데드네이밍』, 김종영미술관, 2022, 5-11. 

[3] 이것을 ‘자기확언’이라고 한다. 인스타그램의 해시태그 #dailyaffirmations로 약 220만여개의 게시물이 있을 정도로 동시대에 ‘자기계발' 유행의 일부로 기능한다. 다음을 참고하라. ‘#dailyaffirmations Instagram 콘텐츠 | 해시태그’. Accessed 18 October 2023. https://www.instagram.com/explore/tags/dailyaffirmations/.

[4] 여기서 ‘우정'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저서 "Ethics: Subjectivity and Truth" 내의 "Friendship as a Way of Life"라는 챕터에서 다루고 있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우정'을 의미한다. 푸코는 우정을 단순한 감정적 유대 이상의 것으로, 기존의 사회적, 성적 경계를 넘어서 다양한 유형의 관계와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설명한다. 푸코가 우정의 확장된 형태로 해석할 수 있는 '동성애적 삶의 방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는 점이 언급할 가치가 있는데 이 방식은 성적 행위가 중심이 아니라 함께 식사하고, 시간을 공유하고, 심지어는 서로 '알몸'이 되는 것과 같은 단순한 행위까지 남성들 간의 공동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삶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제도화된 규범과는 다른 문화와 윤리와 유사하며 성이 사회적 관계와 동떨어진 사적인 것이 되고 동시에 통치의 대상으로 출현하게 되는 것과, 사회적 관계의 양식으로서의 우정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동시적인 과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해라. Foucault, Michel. 1998. "Friendship as a Way of Life." Ethics: Subjectivity and Truth (Essential Works of Foucault, 1954-1984, Vol. 1), edited by Paul Rabinow. New York: The New Press.135-140. 

[5] 그는 이어서 지난 동료들과의 관계와 자신의 작업을 구축해나가면서 받은 피드백과 동료 작가들에게 받은 말들을 이어나갔다. 그 날은 사실 용산에 새롭게 개관한 ‘샤워’에서 열린 첫 기획전이 있었고 나는 으레 그렇듯 오프닝을 피해서 그 다음날 한가한 시간대 오후 2~3시 정도에 방문했다. 이러한 사적인 경험을 적는 이유는 이러한 조이솝과의 사적 경험이 앞서 이야기된 삶의 방식으로서의 ‘우정’이 그의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되기 때문이다. 또한 본 글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과 이름을 함께 쓰지 않는 이유도 그러하다.  

[6] Dardenne, Jean-Pierre and Luc Dardenne, directors. Rosetta. Les Films du Fleuve, ARP Sélection, 1999. 1 hr., 33 min. French audio with Korean subtitles.

[7] 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시그워스, 『정동 이론: 몸과 문화·윤리·정치의 마주침에서 생겨나는 것들에 대한 연구』 (서울: 갈무리, 2015). 209-210.

[8]  Ibid. 

[9] 마사 누스바움 저자, 『연약한 선: 그리스 비극과 철학에서의 운과 윤리』 (서울: 서커스출판상회, 2023), 67. 

[10] Ibid.

[11]  재스비어 K. 푸아(2016), "퀴어한 시간들, 퀴어한 배치들", 『문학과사회』, 29(4). 102. 



*본 원고는 2023년 성북문화재단 성북예술창작터 N리뷰어로 선정되어 쓰여진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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