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무언가를 하는데,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병
퇴사 후, 나의 일상은 효율 중심에서 가치 중심으로 이동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직장인에게 주어지는 자유 시간을 활용하려면 동선도 효율적으로 짜야하고 우선순위도 쾌락 위주로 짜게 되니까.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떤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쓰는 게 아닌, 업무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여기게 되는 마음이 커서 그런 것 같다.
어느 정도 백수의 삶을 즐기게 된 이후 내 하루는 시간 관리의 거대한 장이 되었다.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지금 이 시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계절에 나는 하루하루 이루는 것 없이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노파심. 그런데 직장에 다닐 때에는 이런 노파심이 없었는가를 생각해보면 또 그렇진 않은 것이, 이것도 현대인의 병이 아닐까 싶다. 어디에서 무얼 하더라도 따라다니는 그 노파심.
너무 신기하게도, 취준생 시절의 내가 이 느낌을 주제로 썼던 시가 떠올랐다.
無DO병
마이크를 쥔 손들이 도처에 피어나
귀 따가이 랩을 합니다.
짧고 길고 얇고 흰 얼굴들이
눈 아프게 손가락을 가져다 댑니다.
터치가 곧 애무와도 같다고 합니다.
일단 취하고 나면 녹아 전깃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자꾸만 놀 것을 권합니다.
잘 먹고 잘 쓰는 것이 잘 사는 사람이라고
자꾸만 밖으로 나올 것을 권합니다.
선생님, 저는 무두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움은 느껴지건만 상대를 알 수 없고,
욕망은 느껴지건만 대상을 알 수 없습니다.
신문도 읽고 뉴스도 봅니다.
어지간한 여행지와 신상 카페의 사진을
고급진 한글에 섞어 SNS에 씁니다.
말은 보이지 않는데 사방이 자꾸 무얼 하라고 난리입니다.
협박에 못 이겨 늘상 무얼 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나는 이 병을 지금까지도 극복하지 못해 같이 살고 있다. 이러니 환장할 노릇이다. 업을 구하던 시절, 업을 하는 동안, 그리고 업을 때려치우고 백수가 된 지금도 병은 건재하다. 뭐 극복까지는 본래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이 감각은 이제 극복 대상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야 하는 라이프 메이트다. 그럴싸하다. 현대인에게 이 노파심이라는 감각은 일종의 경계심, 살아남기 위한 전략 같은 것이기도 할 테니까. 무언가 해야 해, 창조해야 해, 포트폴리오에 한 줄이라도 추가해야 해, 내 젊음 이대로 낭비할 순 없어, 가자, 괌으로, 유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은 또 다른 일이지만 동력원을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까. 채찍질도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는 과하면 이처럼 병이 된다.
결국 해결책은 저것에 쫓겨 무엇인가 하는 것 밖에 없다.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쓰고, 꾸역꾸역 일주일에 한 권 책을 읽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실제로 달성하는 것도 아니면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 운동을 일주일 쉬면 또 자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다 몇 번은 그 덕분에 무언가를 이루기도 한다. 그런 때면 엉덩이에 닿는 채찍의 감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잠시나마 이 질병에게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다. 장내 유익균이 이런 역할인 걸까. 절대 없어지지 않는, 몸속의 무두병 세균들은 내 머리가 굵어지면서 더욱 씨알이 굵어졌다. 고집도 세지고 더 구체적인 요구를 들고 나서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면서 내가 해야 할 일, 현실적인 계산에 대한 파악이 더 강해졌기 때문이겠지. 이는 의심할 여지없는 나의 자산이다. 그건 틀림없으리라.
오늘도 중립적인 결론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이 주제.
잘 쓰면 우군이요 과하면 적군이라. 세상에 많을수록 좋기만 한 건 돈 뿐인가 보다. 삶의 곡선이 달라지면서 시시때때로 나와 무두병의 관계는 호전되었다 악화하기를 반복한다. 취준생 시절 나에겐 극악한 악마 같았던 이놈이 지금은 어느 정도 조절 가능한 푸시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다.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이 내게 걸고 있는 만성적인 기대처럼. 부담스럽긴 하지만 원래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어쩌면 무두병 또한 내가 나를 사랑하기에, 내게서 미래를 쥐어짜 내고자 하는 감각일 것이다. 내가 의도한 미래를 맞이하기 위한 스트레스.
뭐 맞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어쩔 건가. 없어지지 않을 거, 끌어안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