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로 나는 백수 6개월 차를 맞이했다. 2021년과 함께 슬슬 내가 정해 두었던 기한이 끝나간다. 그동안 무얼 했고 무얼 하지 않았는지 짚어볼 만한 타이밍이다.
목표를 달성했는가 - 휴식, 건강 챙기기, 글쓰기라는 3가지 목표 모두 어느 정도 만족스럽다.
무엇을 남겼는가 - 신혼집(전세이긴 하지만), 캠핑의 추억, 요리 실력, 깔짝거리기만 한 글쓰기
이중 휴식은 나의 제 1 목표였다. 한데 실제로 겪어보니 알게 된 것이 있다. '일하지 않는 것' 자체가 휴식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휴식하는 것에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됐다. 가만히 있는 것은 휴식이 아니다. 내가 정의 내린 바에 의하면 휴식이란 '하고 난 뒤에 나 스스로에 대한 애정이 고양되며, 하는 도중에도 나 스스로가 즐거운 특정 행위를 계획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휴식이란, 하고 난 뒤에 나 스스로에 대한 애정이 고양되며 하는 도중에도 나 스스로가 즐거운 특정 행위를 계획적으로 수행하는 것
이 문장을 정의 내리기까지 약 10초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바꿔 말하자면, 언제나 머릿속에 있었는데 그동안은 문장으로 정리하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어쩌면 직장인으로 살아온 6년 내내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개념이 이 휴식기간을 거치며 언어를 통해 정리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휴식은 '무언가를 하는 것'
단순해 보이지만 저 문장은 휴식의 모든 조건을 다 품고 있다. 세상의 많은 행위들이 저 문장 중 반쪽 정도밖에 만족시키지 못한다. 처음에 말했던 '일하지 않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기 때문에 휴식일 수 없다. 그럼 '일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도중에 나 스스로 즐겁지 않은 순간이 많으니 휴식일 수 없다. 업무의 a부터 z까지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업무가 휴식일 수도 있겠다.
나는 처음에 휴식이란 다시 달리기 위해서 나를 재충전하는 정도의 개념으로 여겼다. 그런데 나를 충전하려고 보니 무언가를 계속 해야 했다. '하지 않는 것'으로는 내가 충전되지 않는다. 휴식을 취하고 나면 이전보다 더 심리적, 물리적으로 좋은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 3일 이상 지속되면 밤에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사람은 가치가 있건 없건 무언가를 해야 한다. 하루 동안 이어지던 '무언가를 하는' 관성을 끊고 몸을 가로로 뉘이면 그때 잠이 찾아오는 것이다. 건강한 휴식을 위해 나는 낮 동안의 관성을 유지한다.
내가 좋아야 무라도 썰지
요리는 내가 제일 꺼리던 것이다. 그래, 싫은 것도 못하는 것도 아니고 '꺼리는' 것. 그런 내가 아득바득 요리를 하기 시작한 것은 반절 정도 가정을 이룬 후 외식비를 아끼려는 시도, 또 남은 반절은 밖에서 사 먹는 기성 식품에 비해 내 몸에 좋은 것을 섭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 때문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요리는 내게 꾸준히도 큰 스트레스였다. 어느 정도 요리가 손에 익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언젠가 한 번은 집사람이 출장으로 집을 비워 나흘간 혼자 여덟 끼를 요리해 먹은 적이 있었다. 내 요리를 함께 먹을 사람이 없어지자 음식 맛에 대한 부담도, 조리 시간에 대한 부담도 사라졌다. 사흘째부터는 빈둥거리는 하루의 시간 중 점심과 저녁, 요리를 해 먹을 시간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그제야 내가 요리를 휴식으로 삼지 못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마치고 나면 스스로가 대견하고 뿌듯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을 즐기지 못한 거였다. 아무리 미래적인 시각에서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어도 그 행위를 하는 도중에 즐겁지 않으면 결국 똑같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는 일을 휴식으로 삼지 않듯, 아무리 내게 도움이 될 것을 알아도 어떤 일들은 내게 휴식을 주지 못한다.
사실 이와 비슷한 실수는 인생에 걸쳐 빈번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너무나 먼 미래를 그리며 젊음을 낭비했다. 지금에야 그때의 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으리란 걸 알지만, 내가 희생한 것은 너무 귀하고 중요한 것이었다. 나는 '현재'를 휴식으로 채우는 법을 몰랐다. 직장에 다니던 중에는 휴식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들이 하는 행위를 따라 하기도 했었다. 주말에 연차를 붙여 어디 유명한 호텔에 묵으며 카페탐방을 했다. 높은 카페에 올라가 한강뷰 사진을 찍고 여유로이 커피를 마셨다. 그 모든 것이 당연히 사람들이 말하는 휴식이고, 약국에서 파는 알약처럼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차도를 보이리라 믿었다. 내게 주어진 좁은 시간의 벽 안에서 나는 '미래에 남는 일'을 기준으로 휴식을 계획했었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많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카페의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러 나가는 것은 접었다. 대신 요즘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틀어두고 정주행을 한다. 정주행을 마친 뒤에는 내 스크랩북에서 별점을 매기고 진중한 후기를 쓸 것이다. 당장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또 미래에 남길 무언가도 생긴다. 내게 오늘은 휴식이 된다.
아주 간단하게 계획해서 휘리릭 휴식하기
문장 맨 끝에 붙는 '계획적'이라는 단어도 경험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주어졌는데, 그때그때 되는 대로 하면 되겠지.' 이것이 맨 처음 휴식을 생각하던 나의 자세였다. 하지만 주변 상황이나 시간적 제약에 휩쓸려 다니다 보면 피곤하기만 할 뿐이다. 그 과정을 즐기고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웠다 해도 그 경험의 주체가 온전히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계획적으로 무언가를 행위하려면 사전에 그 행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이 휴식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다른 여러 부대 장치가 생겨난다. 예를 들어 요리하며 휴식하기 위해 내가 조금 더 즐길 수 있는 음악을 세팅한다던가, 스스로 핸드드로잉 레시피 북을 만든다던가 하는 작은 방법들 말이다. 드라마를 본다면 나처럼 중간중간, 혹은 드라마가 끝난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행위들을 덧붙여보자. 단순히 소비하는 휴식이 아닌, 나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을 고양할 수 있는 작은 장치들을.
계획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휴식에 돌입하기 단 몇 분 전에라도 미리 생각하면 그만인 일이다. 나는 오늘 드라마를 다 보고, 카페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집에 있는 믹스 커피로 달래며 간단한 정주행 후기를 작성해 블로그에 업로드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일 자체도 아주 기껍게 느껴진다. 휴식이 내게 주는 의미가 그렇다. 휴식은 어떤 이에게든 기꺼워야 한다.
아주 짧은 시간을 활용하더라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고 싶다면, 6개월 동안 진짜 휴식을 깊이 고찰한 이 백수의 말씀을 들으시라. 우리에겐 브레이크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만약 실컷 쉬고 난 뒤에 나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나 애정이 뚝 떨어진다면 그게 브레이크다. 내가 지금 좋아하는 휴식의 방법이 일견 아무리 소모적이고 쓸모없는 일 같아 보이더라도 자잘한 여러 행위를 연결해 건강한 알짜배기 휴식으로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