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넬리몰리 Jul 26. 2021

시간을 채우기 위한 패키지 상품 - 취미생활

청춘만화에 나오는 그런 열정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어!


 인류는 여행 계획을 세우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과 피로를 느끼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나는? 나는 후자다.


 퇴사 이후 내 집엔 시간이라는 자원이 넘쳐흐르고 있다. 백수 생활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아주 러프한 계획을 세웠다. 그동안 못 했던 취미생활을 하자! 나는 취미가 많으니까! 그러나 막상 이 시간이라는 것이 활용하려면 그렇게나 붙잡히질 않는다. 나는 얕잡아보고 있었다. 내가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해야 하는지를 전혀 몰랐던 거다.



 시간 보내기 / 시간 채우기


 나는 퇴사 후의 일상이 취미 속에 파묻혀 행복할 것이라 막연히 상상하곤 했다. 나는 정말 좋아하는 일이 많다. 처음엔 우연히 접한 것들에 흥미가 생기면 그게 내 취미 활동이라 생각했는데,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일부러라도 안 해 본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 취미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활동이 많을수록 여유 시간이 가치 있게 느껴진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휴식을 취하건 여행을 가건 결국 시간은 나의 어떤 행위로써 채워지게 마련이니까.


 시간을 보내는 건 가지가지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어딘가로 이동하면서 시간을 쓸 수도 있다. 나는 별 목적 없이 시간을 보내는 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속버스에 앉아 하늘 쳐다보며 멍 때리기, 소파에 앉아 TV 켜놓고 핸드폰 게임하기, 사람 구경하며 동네 산책하기 등등. 뭔가 구체적인 목표나 이유 없이 시간을 보내는 일. 이런 시간이 얼마나 주어지는가가 나의 일상생활에 주어지는 여유의 분량을 재는 기준이 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시간을 '채우는' 것은 다르다. 여기엔 계획이 필요하다. 꼭 목표나 이유가 필요하진 않더라도 일단 계획은 세워야 하니까. 어떤 큰 목표의 일부로서 계획을 세울 수도 있고 혹은 습관을 만들기 위해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혹은 오늘 하루 종일 1,000피스 퍼즐을 맞추겠다는 것도 그런 계획 중 하나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채워놓으면 그 하루가 저물고 침대에 누웠을 때 조금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귀찮으면 패키지로 가라!


 문제는 내가 이렇게 계획을 세우는 걸 정말 못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정말 많다는 점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 그런 내가 알차게 시간을 채우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취미생활.'


 어쩌면 취미야말로 시간 채우기를 위한 패키지 상품이 아닐까.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 힘드니 이미 어느 정도 루트와 선행자가 정해져 있는 '취미'로서 새로운 활동을 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등산이라는 취미를 만든다면 이미 사람들이 선호하는 등산복 브랜드와 등산코스가 어마어마하게 많고, 길잡이가 되어줄 등산 유튜버들이 존재한다. 내가 시간을 채우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해야 하는지 선행 데이터가 쌓여 있는 거다. 요즘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등산 코스나 인증샷을 지원하고 그에 맞는 코스 추천까지 하니 그야말로 액팅 플랜이 A부터 Z까지 짜여 있는 셈이다. 이처럼 어떤 특정 취미를 골라 시작한다는 건 굉장히 용이하고 편리하다.


 취미생활이라는 깊고 방대한 세계에서 나와 맞는 걸 찾으려면 어느 정도는 운의 힘도 필요한 것 같다. 등산을 예로 들어보면, 사전 데이터를 통해 등산이라는 취미 활동이 어떤 특징과 성격을 지녔는지를 체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 내가 등산을 접하고 그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 돈,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친한 이들이 하는 취미 활동을 따라가기도 한다. 이미 등산을 즐겨하는 친구가 있다면 따라가기 수월한 것처럼.


 퇴사 이후 시간이 많아지면서 최근에서야 깨닫게 된 것은 바로 취미생활의 강제성 여부이다. 어딘가를 예약해야 하는 취미라면 나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일정을 따로 빼놓거나 시간 계획을 세워야 한다. 혹은, 여럿이 함께 하는 취미일 경우에도 일정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강제성이 생긴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나는 강제성이 없는 취미를 주로 즐겨했다. 집에서 글을 쓴다거나 피아노를 치는 것. 하지만 시간이 많아지고 보니 이들은 취미라는 카테고리에서 점점 멀어졌다. 내 나름대로 목표치를 잡아봤지만 넘쳐나는 시간 속에서 목표량을 지키는 건 내 자신과의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패배의 쓴 맛을 보고 나서 나는 시간 예약을 통해 진행하는 취미생활을 찾기 시작했다. 아마도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다.




 취미가 나의 중장/노년 시간을 재미있게 꾸려줄 연금이라 생각한다면 투자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고통과 기다림 없이도 손쉽게 '무언가에 열중하는 나'와 같은 멋있어 보이는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일견 부정적인 방법으로 보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점차 수긍이 간다. 청춘만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큰 시련을 극복해가며 뭔가에 열정적으로 몰두해야만 내가 멋있어 보이는 건 아니니까.


 열중할 수 있다는 건 지금 내 인생에 여유와 힘이 있다는 뜻이다.

 또한 내 안에 무언가를 좋아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며, 그로써 스스로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취미생활, 이제 자만추의 시대는 갔다.

 조우를 기다리기보단 직접 찾아다니며 이 백수의 시간을 많은 취미와 새로운 시도로 채워갈 수 있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규칙적 운동이란 도대체 어떻게 시작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