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포도 아니고 물렁복숭아

오늘은 한 번쯤 들어보셨을 우화로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다들 소싯적 꿰고 있었을 이솝우화 중 하나로, 제목은 <여우와 신포도>입니다. 해당 우화에서 주인공 여우는 배가 고파 돌아다니다가 포도나무를 발견하고 거기 열린 포도를 따먹으려고 하죠. 그런데 그가 아무리 용을 써도 닿을 수가 없자 "저 포도는 어차피 신포도일 거야"라며 돌아갔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나온 단어로 '신포도', '신포도질'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하는데 갖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갖고 싶지 않은 척하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나는 굶주린 여우까진 아니지만 무척 갖고 싶은 대상이 있기에 우화의 내용에 비추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부끄럽지만 내가 했던 다른 신포도질에 대해 먼저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올해 여름, 한 국내 유명 장학재단의 연구장학생 선발에 지원했습니다. 마감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알게 되어 일정이 촉박했으나 좋은 조건이라 생각해 무리해서 준비했습니다. 각종 서류를 말도 안 되게 빨리 마무리하고 허겁지겁 마감 직전에 제출했습니다. 웃긴 건 그렇게 해놓고도 과년도 선발자들 스펙을 보니 내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 마감 후에 큰 기대 없이 잊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서류전형 합격통보를 받고 면접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알아보니 대부분의 지원자는 서류전형에서 거르고 1.x배수만 면접전형에 올린다고 하여 승부를 걸어볼 법도 했습니다. 게다가 그동안의 장학생 선발내역을 보니 매년 내 전공에서 한 명씩 선발되고 있는 것까지 확인하고 생각보다는 해볼 만하지 않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면접 준비를 하는 2주 동안 마음이 뜨고 괜히 스펙이 쟁쟁한 다른 경쟁자들을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지금 아무리 애를 써서 해봐도 어차피 나는 그들에 비해 스펙도 부족하고, 특히 나랑 같은 전공 연구자 중에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떨어질 텐데 여기 그렇게 공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 못난 생각이지만 떨어졌을 때 실망하게 될 게 두려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준비하니, 그리고 직장생활까지 병행하며 하니 잘될 리가 있었을까요. 면접장에서 수월한 질문에는 외운 대로 앵무새처럼 대답을 했지만 모든 경험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질문 하나에 맥을 못 추고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질문을 들은 다른 친구는 너무 어렵다며 교수 본인도 역으로 질문받으면 대답 못 할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면접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면접장에서 들러리 서는 건 아닐까', '만에 하나 붙는다 해도 당분간 연구를 이어가기 어려운 환경인데 열심히 준비하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전체를 꿰뚫는 그 단순한 질문 하나조차 준비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그렇게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나를 보고 허를 찌른 것뿐입니다.


시간이 지나 합격자 명단을 확인해 보니 나는 물론이고 나와 같은 전공 연구자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 확신을 가지고 면접에 임했다면 내가 우리 전공 티오를 가져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었죠. 나는 신포도질을 의식적으로 경계하는 사람입니다. 원하는 걸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그런데도 불과 몇 달 전에 이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밝히니 민망한 마음이 드네요. 스스로 나약한 생각이 들지 않게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서설이 쓸데없이 길었습니다. 원래 하고 싶은 얘기는 내가 가지고 싶은 대상 혹은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설령 잠시 닿는다 해도 결국 함께 할 수 없어 단념하려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너가 원한다고 날 가질 거라 확신해?"라는 일갈에 정신이 들어 알고 지내는 동안만이라도 마음을 다해 좋아해 보고자 한 사람입니다. 이에 며칠 전 일기의 내용처럼 진정한 작별은 잠시 유예해 두고 인연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노심초사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나는 시답잖은 얘길 하며 웃다가도, 그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주절주절 말하다가도 문득 스쳐가는 그의 침묵을 보곤 합니다. 기쁨이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 머지않아 닥치게 되리라는 암시일까요. 혹 그렇게 되더라도 나는 기쁨이를 신포도가 아닌, 예쁘고 향기로운 물렁복숭아로 기억하겠습니다. 그 복숭아는 비록 내가 애를 써도 잡을 수 없지만 원래 달려 있던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척 사랑스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이전글선택과 책임, 오묘한 산행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