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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과사자 Sep 04. 2021

Starry Starry Night

콜로라도 Redstone

왕복 400마일을 달려간 곳, 레드스톤


어느 날 우연히 평이 좋은 캠핑장을 발견했다. 레드스톤이라. 어떤 곳인지 감은 안 오지만 일단 예약했다. 한 달 여만에 가는 이번 캠핑은 준비부터 삐끗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남편과 곧 이혼할 것처럼 싸웠고 2박 3일을 위한 모든 준비는 전날 밤에 겨우 끝냈다. 네 시간 거리인데도 토요일 오전 한글학교 수업을 빼지 못해 11시까지 수업을 했고 오후 1시 가까워서야 길을 떠났다.


놀이터 두 군데 들릴 계획이었으나 꽃과 사자가 잠든 덕분에 글렌우드 스프링스에서 한 번만 쉬었다. 강 옆에 있는 놀이터에서 놀며 먹으며 물놀이도 하다가 다시 출발했는데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사자가 먹은 것을 다 게워냈다. 얼마나 괴로울까 싶으면서도 이 정도에 우리가 로드 트립을 포기하지는 않을 테니 크면서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앞섰다.


캠핑장에 도착한 사자는 바로 밥을 먹겠다고 했다. 속이 텅텅 비었을 만도 하지. 하지만 우리에겐 애증의 벨 텐트가 기다리고 있단다. 비 오고 바람 불 땐 한없이 안심되면서도 치고 걷을 때는 괴로운 그 텐트를 남편이 세우는 동안 나는 꽃과 사자를 봤다.


이번 캠핑 히트 템은 플레이도우 아이스크림. 유난히 소근육이 약한 꽃이 직접 플레이도우를 집어내려고 할 만큼 인기 만점이었다. 시럽까지 뿌리는 리얼함에 쪽쪽 빨아먹으려는 꽃과 사자를 몇 번이고 말려야 했으나 아이들도 나도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둘러보니 레드스톤 캠핑장은 그 좋은 평이 공감되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캠프장이 프라이버시를 가질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었고 경치가 훌륭했다. 붉은 바위와 관목이 잘 어우러진 산이 앞 뒤로 솟아 있었다. 꽃과 사자은 밸런스 바이크를 마운틴 바이크처럼 타고 캠핑장을 돌아다녔다.


자갈로 된 비탈길은 꽤 미끄러웠다. 실제로 꽃이 넘어져 울기도 했다. 너무 위험하지만 않다면 나는 조금 다치더라도 몸으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꽃은 40개월 사자는 18개월부터 밸런스 바이크를 탔다. 최근에서야 발 들고 균형을 잘 잡기 시작한 두 아이들이 산에서 스릴을 즐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엄마는 무척 흐뭇했다.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꽃은 태어날 때 누구보다 작았다. 2000g 겨우 넘던 아기. 힘이 없어서 젖을 빨아본 적 없는 아이. 두 돌 가깝도록 젖병을 못 잡던 아이. 그런 아이가 세 돌이 넘어서면서부터 보여준 대근육 발달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밸런스 바이크며 킥보드를 타고 수직 사다리를 오르고 세발자전거보조 바퀴 자전거까지 타고 철봉에 발을 걸고 매달리더니 벽에 있는 조그만 홈을 밟고 올라서기도 했다. 비장애아 사자에 비하면 불안정한 몸짓일지언정 어디를 가도 신체적 제약이 없다는 사실은 백번이고  번이고 나를 감동하게 한다.


레드스톤 캠핑장의 아이들


Starry Starry Night (feat. 감성은 개나 줘)


우리는 목표했던 대로 콜로라도 곳곳으로 캠핑 여행을 다니고 있다. 그 전에는 이름도 몰랐던 장소에 갔고 모든 곳은 그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내가 가장 기대했던 건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충분히 시골이라고 할 만한 작은 도시에 살고 있지만 인구 9만이 훌쩍 넘는 우리 동네의 밤은 그렇게 깜깜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번 여름 내내 밤하늘 운은 별로 없었다. 구름이 잔뜩 끼거나 비바람이 몰아쳤다. 로키산 국립공원 밤하늘에는 별이 많았지만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다.


레드스톤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했고 이때까지 스타 게이징으로 유명한 곳에서도 별을 제대로 보지 못 했기에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낮 기온은 30도가 넘는데 밤 기온은 5도 정도밖에 되지 않아 추울 걱정만 하면서 밤 열 시 즈음 화장실 가려고 텐트 밖으로 나갔다.


잠깐만, 이건 뭐지? 현실인가? 일초 동안 뇌가 정지되었다. 은하수다! 차갑고 맑고 까만 하늘에 별이 강처럼 흐르고 있었다. 핸드폰으로나마 사진을 찍어 보았다. 적당한 곳이 없어서 밸런스 바이크 위에 어떻게든 눕혀서 셔터를 눌렀다. 몇 장은 잘 나온다. 이 순간을 간직할 수 있다니 다행이다.


설레는 목소리로 남편과 아이들을 불렀다. “사자, 하늘  봐봐.” 하니까 사자가 와 라고 했다. 우연인가? “저기 별 봐봐.” 다시 한번 말하니 또 와 라고 한다. 어둠 속에서 사자를 자세히 보니 이 녀석 진짜로 은하수를 보고 있다. 이제 곧 27개월 되는 인생에 너의 눈은 호강하는구나.


꽃도 나오라고 했더니 무섭다고 투정을 부렸다. 평소 그토록 용감한 꽃이라도 바람 소리와 어둠을 무서워하지 참. 그래도 이 멋진 풍경을 놓칠 순 없다며 텐트 밖으로 들어 올렸다. 막상 나오면 좋아할 줄 알았으나 온 몸으로 거부한다. 그리고 나까지 빨리 들어가자고 한다. 난 싫은데? 더 보고 싶은데? 나의 의사 따위 상관없이 꽃이 떼를 쓰는 바람에 더 보지도 못 하고 텐트로 들어가야 했다.


이튿날에도 비슷한 시간에 별이 떴다. 나는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별이 빛나는 밤을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이 나와서 헤드 랜턴을 켜고 이제야 양치를 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집중하고 있을 때 광고가 나오는 기분이었다. 끝난 줄 알았더니 이것저것 정리도 하네. 어두컴컴하고 추운데 미리 하면 어디 덧나나 싶다. 아이들이 자고 있어도 감성에 젖을 수 없는 현실에 피식 웃음이 터져서 혼자 웃고 있으니 남편이 흠칫 놀랐다는 이야기다.


침낭에 누워서도 한참 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며 잠들 수가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은하수를 볼 줄은 몰랐다. 어릴 적 지리산 청학동 밑에서 춥고 가난하게 클 때 은하수를 본 적이 있다. 나중에 커서 아무리 그 밤하늘을 찾아다녀도 보이지 않았다. 별이 많은 곳은 있었으나 그 하늘은 아니어서 내가 환상을 보았던 걸까 아니면 어느 사진에서 봤던 기억이 잘못 섞인 걸까 나조차도 의심하게 되었다.


오늘 밤 은하수가 내게 찾아와 30여 년 전 그 밤하늘은 결코 꿈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먹고살기 바빠서 여행을 어떻게 갈 수 있는지도 몰랐던 시절을 지나 지구 반대편 미국 콜로라도에서 90명이 거주하는 외진 마을로 여행을 오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것은 밤하늘의 은하수만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옆에 인도네시아인 남편이 있고 딸과 아들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새삼 굉장하게 느껴졌다.


내 품에 안겨 보석같이 박힌 별을 보며 감탄하던 둘째 사자도 언젠가 삶에 이끌려 내가 없는 어느 순간 어딘가에서 은하수를 보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지금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희미하겠지만 엄마 아빠 누나가 함께였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행복할 때면 온 식구를 돌아가며 부르는 사자에게 그것은 마음 따뜻한 추억이라는 뜻일 테니 말이다.


밤하늘 아래 우리 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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