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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고래 Apr 08. 2023

몸으로 마중하는 빗소리

연두와 초록에 스치듯 물든 색

                                  

 

빗줄기가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소리에는 청량한 쾌감이 있다. 소리의 끝이 바닥을 향하는 곳이 통통거리는 장독대여도 좋고, 여린 나뭇가지 잎사귀 위에 떨어지는 잔잔한 소리도 좋고, 자갈이 촘촘히 깔린 마당에 탁탁거리며 떨어지는 소리도 좋다. 그중에서도 가장 경쾌하며 소란스러운 것은 양철지붕 위를 타닥타닥, 창창창 세차게 때리는 소리와 처마 끝에 순식간에 다다른 물줄기가 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며 땅이 패는 그 찰나의 낙숫물 소리도 좋다. 이런 빗소리들은 마음의 묵은 때를 씻어 내주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뽀송뽀송하고 따뜻한 이부자리 안에서 웅크리고 누워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을 때면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아늑함이 배가 된다. 물을 잔뜩 머금은 다양 모습의 빗소리들에 집중하다 보면 돋아나는 생각의 줄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빗소리에 희석되곤 한다. 


 요즘은 유튜브로 온갖 소리들을 찾아 들을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느낌은 다르다. 소리는 공간과 공간 사이를 통과해 귀청을 울리며 몸에 전달되는 과정이다. 직접 소리가 나는 곳에서 소리의 질감을 함께 느끼는 것과 기계를 통해 들리는 소리, 그 소리에 교감하는 감도의 차이는 확연히 다르다. 그럼 직접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듣는 빗소리는 어떨까?      


 소나기가 내리던 여름 끝자락 늦은 저녁이었다.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며 종일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문뜩 우중 산책을 해보고 싶었다. 우산과 우비를 따로 챙겨가기는 했지만, 마음이 복작거려서 비를 좀 맞고 싶었다. 보슬보슬 가늘게 내리는 비도 아니고 퍼붓듯 쏟아지는 그 빗속에 산책이라는 말은 안 어울렸다. 그냥 비를 온몸으로 마중하고 싶었나 보다.


 메타세쿼이아 산책로가 시작되는 곳에서 나무 밑을 따라 걸었다. 흙탕물이 춤추듯 신발에 튀어 오르고 몸은 순식간에 다 젖었다. 비를 피할 경계가 사라지자 용기가 생겼다. “그래 한 바퀴를 다 걸어보자” 작은 챙이 달린 모자를 꾹 눌러쓰고 호수 공원 한 바퀴를 다 걸었다. 걷는 동안 빗줄기는 간간이 잦아들었다가 억세게 쏟아지기를 반복했다. 그 비를 다 맞으며 내리는 비와 한 몸이 되었다. 빗줄기가 귓불에 닿는 소리, 모자챙에 떨어지는 소리, 어깨에 내리치는 소리, 산책길에 빗물을 잔뜩 머금은 발자국이 휘감기는 소리, 나뭇잎 튕겨내는 소리, 호수에 떨어지는 소리 등 빗줄기가 닿는 자리에 따라 소리가 달랐다. 그냥 뭉뚱그려 들으면 하나의 빗소리로 통일되지만, 자세히 들으면 소리의 질감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둔탁하거나 혹은 경쾌하거나 소리에도 각각의 무게가 있었다. 


 공원이 크다 보니 한 바퀴를 다 돌면 대략 4km쯤 되었다. 비를 흠뻑 맞은 몸은 지치고 오슬오슬 추웠지만, 마음은 시원했다. 그리고 유쾌했다. 이렇게 몸에 각인된 추억은 오래갔다. 지금도 소나기가 내리는 날이면 그날의 기억에 작은 근심을 털어내곤 한다.  


 비가 온 다음 날이면 생기는 물웅덩이를 발로 탁탁 퍼트리며 걸었던 적이 있다. 어린 시절에 그것은 금기였다. 장화보다는 운동화로 물을 튕기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흙탕물에 신발이 젖고 입고 있던 옷에도 여기저기 얼룩이 저셔 빨래거리를 만들어 냈다. 지금은 세탁기가 당연한 시대지만 그때는 커다란 고무대야에 빨래를 담가 손으로 쓱쓱 비벼 빨던 시절, 분명 엄마한테 혼날 것을 알면서도 그 장난이 일탈처럼 금기를 깨는 것 같은 짜릿한 시원함에 몇 번 그랬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비를 맞고 들어가도, 신발이 흙 범벅이 되어도 야단을 맞지 않을 만큼의 나이가 되었다.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이 그럭저럭 괜찮다.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혹은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집착하면 마음이 부대껴서 싫다. 일상의 소리가 내 곁을 비껴가는 것처럼 이제는 굳이 애쓰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지나가도록 놔두고 싶은 것들이 종종 있다. 이것 또한 내가 선택한 삶의 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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