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익은 붉은 노을색
터질듯한 붉은 노을이 지고 어둠이 들어섰다. 한나절 머무르던 태양이 자리를 내어준 시간, 하늘엔 낮은 채도의 푸르스름한 색이 잠시 스치듯 지나가고, 다시 그 자리에 저녁의 어둠이 찾아들었다. 낮도 밤도 아닌 그 중간의 어스름쯤,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이 잠시 머뭇거려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듣는 동안 베란다의 넓은 창을 통해 사위어가는 빛이 거실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고, 그 공간 사이를 노련한 기획자의 농익은 축제처럼 음악이 집안에 꽉 들어찼다.
재즈는 끈적끈적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고유의 감성이 있다. 경쾌함이 이어지다 끊어질 듯 가늘게 올라가는 부분에서는 쓸쓸함과 애절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알토색소폰의 굵고 힘찬 음색과 재즈 가수의 목울대 깊은 곳에서 울리는 자글자글 끓는 듯한 소리의 기교는 아찔한 매력으로 듣는 재미를 더했다. 가벼운 흥얼거림으로 느낌을 따라 손가락을 까딱거리기도 했고, 간간이 발장단을 맞추기도 했다. 익숙하지 않은 리듬이 마음에 들어와 쥐락펴락 널뛰기하며 잊었던 감성과 흥을 끌어올렸다. 음악이 절정에 이를 때면 박자의 속도에 따라 어깨를 들썩이며 경직되어 있던 근육들이 리듬을 타며 어설픈 춤사위를 만들어냈다.
음악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간격을 허무는 역할을 할 때가 있다. 동시에 함께 모인 집단의 응집력 구실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특별한 사유 없이 그냥 음악을 즐겼다. 어렵다고 접하지 않았던 재즈의 한복판에서 잘 놀았다. 삶이라는 것이 꼭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즐길 수 있다면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즐겨보자는 것이 요즘 나의 생각이다.
무엇을 해도 열정이 없던 때가 있었다. 딱히 절실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쟁하는 삶에 숨이 막혀서 매달려보지 않았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말 뒤에 숨어서 하기 싫은 일,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외면했다. 생각해 보니 부끄럽고 미안했다. 애초부터 원래 그런 것은 없었다. 단지 생각이 “나는 원래 그래”라는 말 앞에서 불편한 것들이 턱없이 자유로웠다. 반드시 무엇인가의 원인이 제공되고 복합적으로 여러 가지 조건이 더해져서 결과가 만들어진다. 그런 결과 어디에도 “나는 원래 그래”라는 말은 성립이 될 수 없다. 이런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엉거주춤 사는 것에 익숙했다. 이렇게 나이 들면 바싹 말라버린 빈 껍데기로 남게 될까 봐 두려울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가보지 못한 길,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을 갖는다. 막상 저지르고 나면 별것 아닐 수도 있는데 머리가 터져라. 짱구만 굴리다가 지쳐서 포기하게 되는 때가 있다. 젊은 시절에 나는 자주 그랬다. 그러면서 주위에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부러움과 욕심 사이를 넘나들었다. 몸으로 부딪쳐 경험한 세상보다 그렇게 포기해 버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인생의 반을 넘어 살아온 나이가 되어 있었다.
계획적으로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딱 맞을 때는 없었다. 지금껏 살아보니 그랬다. 비겁하게도 이런저런 핑계로 상황에 따라 미루는 것을 합리화했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해본다. 잘하고 못하고는 나중의 일이다. 하다가 재미없으면 슬그머니 놓아 버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과 후회를 조금씩 덜어낸다. 그러면 삶이 좀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