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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사장 Jul 18. 2021

"제가 알아서 할게요"

충고는 대개 오만이다.

수많은 꿈이 꺾인다

현실의 벽이 아니라

주변의 충고 때문에


하상욱 ≪충고의 벽≫ 중에서



때론 침묵이 어설픈 위로보다 나을 수 있다. 힘겨워하는 이에게 건네는 마음에도 없는 위로는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딱히 해줄 말은 없는데 상대를 위로는 해야 될 거 같아서 무심코 말한다. “힘내”, “잘 될 거야”, “걱정마”라며 툭 던진다. 심한 경우 “뭘 그런 거 가지고ⵈ”, “멘탈이 약하네”하고 빈정거리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특히 “남들도 다 겪는데 왜 너만 유난떨고 그러니”라며 아예 꾸지람을 하는 경우엔 분노까지 유발한다.


남들이 위기를 잘 넘기고 감정을 잘 조절했더라도 내 문제가 되면 다르다. 마치 아이를 잃은 부모 심정을 다른 부모가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기 힘들 듯이. 그래서 모두가 겪는 보통의 경험이라 할지라도 당사자가 고통을 호소하면 그 고통의 크기를 가늠해서 감정을 가이드하고 재단해선 안 된다.


차라리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고생하네”, “네 마음이 편하지 않은가봐”하며 내 상황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짚어주는 게 나을 수 있다. 괜한 판단과 평가 그리고 섣부른 위로는 부질없고 소용없다. 우리는 진심 없는 말을 귀신같이 안다. 섣부르고 쉽게 너를 이해한다며 공감하는 ‘척’도 당사자는 금방 알아챈다. ‘내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네 마음’의 문제라면 진심이 있건 없건 신경이 덜 쓰이겠지만. 내 마음의 문제니까 ‘네’가 영혼 없는 말을 하면 더 상처를 받는다.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힘겨운 고백을 한다면 정답과 해결책, 참고가 될 만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다. 노력을 더 하라는 말보다, 걱정을 덜 하라는 위로보다 그저 들어주고 공감해주며 내가 틀린 생각을 하거나, 잘못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은 것뿐이다. 그뿐이다. 설령 자기가 보기에 방향 설정이 어긋나 보여도 가이드보다 일단 이해하고 들어보자.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줘야지 자꾸 밥을 줘봤자 성질을 돋울 뿐이다. 그래서 대개 충고는 표피적이고 오만일 확률이 높다.


헤어진 연인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흔히 하는 실수 아닌 실수가 대표적이다.

“매일 생각나고, 불쑥불쑥 눈물이 나와서 힘들다”

“원래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거야. 내가 새로운 사람 소개 시켜줄까?”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고 싶으면 애초에 힘들다는 말 대신 소개해 달라고 말했을 일이다.

그냥 “많이 힘들구나”, “요새 마음이 계속 아프니?” 정도만 해도 백 마디 말보다 훨씬 나을텐데.


취업이 안돼서 힘든 나날을 보내는 친구와 하는 대화도 엇비슷하다.

“이력서는 계속 넣고 있는데 와보라는 곳이 없네...”

“더 노력해야지. 이참에 자격증도 따고 스펙을 보강하는 거 어때?”

취업준비생 친구는 자기 문제점을 본인이 이미 더 잘 알고 있는데 저런 대답을 듣고 싶어서 말을 꺼낸 게 아니다. 당사자가 노력의 중요성을 더 잘 알고 있고  더 절박하다.


최악의 대답은 비난형에 가까운 충고다.

“너 눈이 높은 거 아니야? 사람 못 구해서 안달인 중소기업이 얼마나 많은데. 널린 게 회사다.”

이렇게 충고하는 사람들이 대개 더 눈이 높다. 자기 수준에 적당한 직장은 당사자가 제일 잘 안다.

상처 입은 힘든 사람에게 충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에 박히지도 않는다. 생채기가 난 마음에 소금을 뿌리고 가해를 할 바엔 차라리 그 이 앞에서 그 입 다물자.


누구나 자기 문제에 대한 해답은 자기가 가지고 있다. 단지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때는 조언을 해달라는 게 아니라, 공감과 이해를 구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대개 사람들은 힘들다거나 마음이 괴롭다는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면 답부터 내놓으려 한다. 하지만 마음 상태와 상황에 공감해주고 이해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다.


좋은 의도로 조언이나 제안을 하더라도 괜히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불쾌해한 적이 많았다. 공감과 이해를 바라던 차에 충고가 날아들 때면 도리어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너가 뭘 안다고 그래’, ‘너 참 잘났다’하는 식의 우롱이 앞선다.


고민을 토로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그 사람 마음 상태에 집중하는 게 좋다. 고민을 털어놓는 상대방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해답을 끄집어 낼 수 있도록 돕거나, 제3자 입장에서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면 금상첨화다. 특히 관계 문제에 있어서는 대체로 역지사지 하도록 하면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다.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보면 받아들일 수 있거나,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경우가 꽤 있다.


같은 맥락에서 타인의 표면적인 행동을 보고 함부로 그의 선택과 인생을 평가하고 비난하지 말자. 그 사람만의 내밀한 속사정과 특수한 환경이 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나의 부족한 인생 경험과 알량한 판단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는 일은 너무나 어리석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을 그를 기다려주면 언젠가 말을 해오는 날이 온다. 그가 사정을 말하지 않더라도 좋고, 우리 또한 해명을 요구할 권리도 없다. 굳이 당사자가 말하기 싫어하는 사정과 마음을 헤집어 놓을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 비추어봤을 때도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에 대해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거나, 문자메시지나 통화를 나에게 취해 구태여 내 입장을 들어보려는 이기적 행동에 매우 분노했었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엄청나게 전화가 걸려왔었다. 나는 받고 싶지 않았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받으나 마나 뻔한 통화내용이 예상됐다. 갑자기 퇴사한 이유를 해명하라고 할 것이고,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는 걱정 ― 그들에겐 걱정이지만, 당사자인 나에겐 간섭인 ―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어차피 그만둔 마당에 시원시원하게 전화를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당장의 생계와 불투명한 앞날로 인해 불편하고 스트레스 받는 건 나뿐이다.


누구도 나를 100퍼센트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다. 또 당시엔 원하지도 않는 공감을 받고 싶지도 않았고, 주위의 관심과 걱정도 부담스러웠다. 이직을 하고 나서 나는 알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기다려주면 마음이 정리되고 나서 알아서 말을 한다. 이러한 경험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비롯한 주위 사람을 닦달하거나 원하지 않는 관심을 보이는 무례를 가끔 범한다. 나의 올챙이 적 생각 못한 어리석음과 무례함을 반성한다.


남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태도는 남에게 불편함을 주고, 자신에겐 고달픔을 준다.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평가와 간섭은 잔소리일 뿐이고 효과도 전혀 없다. 게다가 편협한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내린 판단일 확률이 높다. 남의 인생과 겉으로 보이는 행동에 대해 거만한 평가를 함부로 하지 말자. 그들이 나를 평가할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생각하자.


그렇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입 다무는 게 최선인가. 나의 경우 친구나 후배가 명확하게 조언을 구할 경우에만 말로 도움을 준다. 조언을 대놓고 구할 때는 들을 채비를 하고선, 마음에 메모할 준비가 된 상태에서 요청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받아 들일만한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진정성 있게 내 생각을 건넨다.


다만 방향성 제시라든지 나의 의견을 덧붙일 때 조언을 요청한 사람에게 상황과 조건을 명확히 제한해달라고 한다. 현재 무슨(about) 상태이길래 어떤(what) 솔루션으로 어떻게(how) 일을 만들어 가고 싶은지를 파악한다. 그래야 서로 원하는 대화가 가능하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client)과 도움을 주는 사람(helper)의 관계를 정립하고 하는 소통이다.


고민 상담에 있어 한 가지 원칙이 더 있다. 해당 문제를 직접 해결해주려고 개입하지는 않는다.

군대에서 ‘상담병’이라는 직책(정식 보직과 다른 개념)을 수행할 때, 나를 찾아온 후임의 고민을 직접 해결해주려다가 괜한 누명을 쓴 기억이 남아 있다. 후임에게 상담 내용을 직접 들은 지휘관이 나를 찾아와 ‘너가 정말 이렇게 말했느냐’며 따져서 난처했었다. 당시 행정보급관은 자초지종을 듣더니, 나에게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말고, 듣고 나서 보고만 해야지 안 그러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며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그 이후 가급적 타인과 고민상담을 하면서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생겼다.


조언은 구할 때나 해주리라 마음먹었으나 연애할 때 잠시 망각했는지 넋두리를 들을 때면 가끔 정답을 이야기해주려 했었다. 어리석었다. 충고와 정답보다는 지극히 그 사람만을 위하고 집중된 공감, 위로, 배려가 필요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힘들다고 말할 땐 단지 공감만 해주면 그뿐인 것을.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거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얼마나 힘들었던거야”

“힘들어하는 널 보니 내가 다 안쓰럽다”(감정을 보는 감정)


힘든 타인에게 나의 충고를 강요하는 것은 오만이다. 너무 힘겨워하는 사람을 보고 ‘뭐 그까짓 것 가지고 그러느냐’는 식의 말은 조롱에 가깝다. 충고하면 대부분 재수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선의일지라도.


가끔 뉴스를 통해 생활고 때문에 힘들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접하곤 한다. 우리에겐 그들에게 삶에 대한 의지가 약해서 그런 거라고, 죽을 힘으로 살지 그랬냐고 함부로 말할 자격이 없다. 그따위 조언이나 충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멍든 곳을 한 대 더 때린 것과 같다. 내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땐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모습과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누구든 당사자 입장이 아닌 한 짐작하기도 어렵다.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5.6명으로 10년 넘게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1위를 기록하고 있다. 40분마다 1명씩, 하루 평균 3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미리 주위에 평소와 다른 심상치 않은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이를 잘 포착해야 한다. 보건복지부가 2015~2017년 자살자 289명의 심리를 부검한 결과 자살자 10명 중 9명은 자살하기 전에 신호를 보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자의 92퍼센트가 자기 비하를 하고,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과도하게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하는 등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통해서 자살의 신호를 보냈었다. 가족 중에 21퍼센트만이 자살 신호를 인식했었고, 인지한 가족조차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죄책감과 우울감을 느꼈다. “죽고 싶다”거나 “이렇게 살아서 뭐할까”하는 말에는 ‘나를 구해줘’라는 속뜻이 있다.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책이 있어서 소개한다. 제목부터가 세다. 일본 NHK에 방영되는 등 여러 언론 매체에서 호평을 받은 ≪이 지옥을 살아가는 거야≫(고바야시 에리코 지음)는 일본에서 실제 정신장애인이 된 저자가 담담하게 자기 일상과 심리를 내밀하게 풀어낸다. 우울증을 겪는 이와 가족,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책을 펴낸 저자는 죽어도 좋을 만큼 순간이 괴로웠다고 토로한다.


가슴 아픈 그녀의 독백이 여러 곳에 나온다. 그 중 일부를 옮겨 소개한다.


‘자살이 미수로 끝난 뒤에는 움직이는 내 몸을 보며 항상 감동한다. 입원해서 자유롭지 못했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 ‘살아 있다는 느낌’이 온몸에 넘쳐흐른다. 어쩌면 내가 자살 시도를 반복하는 이유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원해서일지도 모른다.’


‘내 상황은 엉망진창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아무런 역할도 없고 담당해야 하는 임무도 없는 세상. 텅 비어 있어 허무하다. 일을 하면 누군가는 도움을 받는다. 그 대가로 비로소 돈을 받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을 받는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걸까.’


‘자살이 슬픈 건 죽은 후에도 비난받기 때문이다. 죽지 못했던 나는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그녀는 기초생활보장을 신청할 때부터 병원 진료를 받기 위해 의료권을 신청하면서 차가운 시선과 냉대를 받으며 더욱 움츠러든다. 글을 읽는 내가 다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다. 마음속에 분노도 일었다. 사회는 정신적으로 약한 그녀에게 따듯한 온기로 감싸주기는커녕 그저 먹고 살도록 도움만 주면 그만이라는 식의 인정머리로 대한다.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고 싶은 건 그녀도 우리처럼 마찬가지였는데 말이다.


그녀 나름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부모님 품을 벗어나 독립도 하고, 사회복지사에게 도움도 청하려 만반의 준비도 했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소속감을 느끼는 정신건강 클리닉(그녀는 레크리에이션과 각종 훈련을 하는 클리닉에 있는 데이케어를 성인 유치원 같다고 표현한다)의 요청으로 썩 내키지는 않지만, 카메라로 집안 구석구석을 다 찍고 자살 미수 이야기를 진술하는 방송국 취재까지 허락한다. 강간당하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감수했다. 세상에 나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도 괜찮고,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기초생활보장을 받는 사실이 죄스러운 감정을 가질 일은 아니며(그녀는 나중에 정식으로 수입이 생기면서 기초생활보장을 다시 일어날 때까지의 버팀목으로 여기며 변화한다), 얼마든지 필요한 도움을 사회나 기관에 요청해도 된다고 말해줬더라면. 한걸음 더 나오도록 손만 잡아줬다면 그녀는 힘을 얻고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냈을 것이다. 기초생활보장을 받는다는 부끄러운 감정이 고름처럼 쌓여 배출되지 않고 몸을 좀먹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기초생활보장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서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도서관에서 자료도 찾아보며 안간힘을 쓴다. 클리닉의 상업성을 알게 된 면도 그녀가 클리닉과 기초생활보장을 벗어나고 싶어 한 동기 중에 하나였다. 정신 질환을 앓는 기초생활수급자는 법에서 지정한 클리닉밖에 갈 수 없으니, 기초생활보장이 종료돼야 클리닉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클리닉은 리베이트를 제공하는 걸로 의심되는 제약회사의 비싼 조현병 주사 치료 확대를 위해 조현병 진단을 남발했다. 한편 환자들을 판매사원으로 앞세워 시민회관에서 과자 판매를 시켜놓고는 자활사업으로 포장하고, 홍보 재료로 활용했다. 인간은 자신이 있는 곳과 곁에 있는 사람이 안전한지 본능적으로 안다. 그녀는 안전할 자유를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기초생활보장을 종료하고 독립하는 법에 대해서 알려주는 곳은 없었다.


클리닉과 시청의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이 그녀에게 기초생활보장을 권유하고, 그냥 그 무료하고 인간답지도 않은 생활에 적응하라는 식으로 충고하지만 그녀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희망이 작동해서 본능이 거부를 한다. 어쩌면 충고가 효용성이 낮은 이유는 바로 이 ‘인간의 자유의지’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노예로 살지만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살 수 있는 파란약 대신 현실과 마주하는 빨간약을 선택한다. 주로 충고는 파란약을 강요한다. ‘원래 그런거야. 다들 그렇게 해왔어. 잔말 말고 그렇게 해. 왜 너만 특별하게 굴어?’


나를 위한 충고라지만 충고하는 사람의 편견과 선입견이 담긴 오만이자 강요인 경우가 많다. 백번 옳은 충고도 사람을 진정으로 변하게 만들기 힘들다. 변했다면 그건 ‘변한 척’해서 비위를 맞춘 것일 뿐. 우리는 불편해도 빨간약을 선택해야 한다.


그녀는 불편한 충고 없이도 비영리단체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는다. 일을 통해 몸을 떨 정도로 삶의 변화를 추구했다. 그녀는 정신질환을 겪는 동료들이 자신의 병을 스스로 관찰하는 ‘당사자 연구’를 진행하는 곳에서 자신이 왜 자살 시도를 반복하는지 이해했다. 병원에 실려 가면 의료진이 친절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약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과 연결을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라도 연결되고 싶은 게 사람이다. 의사 이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는 일상은 그녀에게 나쁜 생각만 쌓이게 했다.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그녀의 실화를 통해 사회와 연결된다는 것이 생명과 연결되는 일임을 깨닫는다. 내가 원할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는 생활이 소중함도 그녀에게 새삼 배운다. 마지막으로 약자가 살기 좋은 사회가 모든 사람이 살기 좋은 사회라는 저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다. 그럴 때 편견과 냉대(冷待), 불편함과 죄책감 없이 복지서비스를 이용하고 다시 재기하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혼자 알아서 안되는 상황에 봉착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주위에 시그널(signal)을 보낸다. 사랑을 할 때만 표(表)가 나는 게 아니다. 그 시그널을 주위에서 알아채지 못하거나 무시하거나 외면하면 쉽게 우울에 빠져든다. 최후에는 의사라는 전문가를 찾기도 한다.


30여 년간 정신과 의사로 활동해 온 정혜신 선생님은 자신의 저서 ≪당신이 옳다≫에서 실직한 사람의 우울도, 자식을 잃은 부모의 우울도, 사람을 죽인 사람도 ‘우울증’이라는 항목으로 손쉽게 진단하는 작금의 세태를 비판한다. 몇 가지 겉의 증상으로 우울증 진단을 내리고는 생물학적 원인으로 생기는 거니까 약물치료라는 해결책만 제시하는 현대 정신의학을 꼬집는다. 우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닌 수용하고 나와 함께 지고 갈 동지임을 말해준다.


우리가 주위에서 ‘나 혼자서는 도저히 힘들어. 너가 좀 도와줘’라는 신호를 받을 때면 그녀의 처방전을 참고할 만하다. 그녀는 ‘사람의 삶에 마지막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외부적 환경이나 상황 등 그들의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 존재 자체’라고 말한다. 사회적 지위나 환경에 관계없이 존재 내면에서 살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건 단순히 병원 진료실에서 환자를 진단하고 약을 처방하며 깨달은 게 아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유가족 등 심리적 야전(野戰)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을 위해 치유에 힘쓴 결과 얻은 지혜다.


그러면서 정신과 의사만 고통스러운 사람의 마음을 보듬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니며,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돕고 가족과 이웃도 직접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핵심 열쇠로 나와 너를 동시에 보호하는 경계를 인식하는 '공감'을 소개한다. 듣고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치유자가 다치면 안되기 때문이다. 무조건 들어주기만 하는 공감이 아니다. 내 마음도 존중받아야 한다. 내 마음이 다치면서까지 억지로 참고 이해하고 들어주는 게 진정한 공감은 아니다. 효과도 없다.


그녀의 관계 처방전인 ‘공감’은 겉으로 말한 키워드 그 자체와 외형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떤 시간과 경험이 있었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그 사람 자체에 집중하고 감정을 터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하지 말고 상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비춰주며 집중하고 궁금해하는 태도를 강조한다.


그렇게 상대방 존재 자체에 집중하고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듣다 보면 사람도 상황도 전모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공감은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을 나도 온전히 느끼는 게 아니라, 끝까지 이해하려는 태도로 상대방이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으로 자기 말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해받고 위로받고 싶기 때문에 내 상처에 대해서 공감을 받고 털어내야만 제대로 살 수 있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가 안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내 이야기 좀 들어줘”를 의식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태도와 행동으로 신호를 보낸다. 그럴 때 그 신호를 외면하지 말고 ‘너’와 내가 느낌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길 바란다.


때때로 너무 심각하거나 법적, 제도적 개입이 필요할 경우에는 전문기관, 관공서, 언론사 등 외부의 도움을 받아보라고 권한다. KBS2에서 방영했던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와 같은 고민을 토로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도 있다. 한 번은 구속하는 아빠 때문에 힘들다는 고3 여학생이 출연한 적이 있다.


출연자의 아빠는 외출할 때 옷이 짧다며 옷을 찢어버리기도 하고, 화를 낼 땐 집안 물건을 던져 부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여학생이 말을 듣고 일찍 집에 들어가더라도 아빠는 일하느라 집에 있지도 않았다. 정작 여학생은 할머니 손에 자라느라 부모님의 사랑이 그리웠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개그우먼 이영자 씨는 50여 년을 살면서 부모님께 사랑받은 기억이 없다며, 그 결핍이 지금도 자신에게 영향을 줬다고 고백했었다. 사랑한다는 한마디를 기대했지만, 끝까지 말을 해주지 않았고, 그 결핍을 채우려고 세 자매가 뭉쳤다며 눈물을 훔치며 힘겹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말이 너무 가슴 아프게 와 닿았다. 사랑받은 자식들이 세상에 나가서 싸울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관계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의 원인을 살펴보면 대개 어린 시절 가정에서의 성장배경과 밀접한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부모의 훈육 방식이나 보호자에게 받았던 상처로 인해 아물지 않은 감정이 기인해서 문제가 불거지는 경우도 있다. 부모가 먹고 살기 바빠서 방치했거나, 보호자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써오다 부작용이 생기는데 대표적인 증상이 바로 감정의 결핍이다. 혼자 참고 견디고, 위로를 받고 싶은 욕구가 내재된 상태로 성장하면서 애착 관계가 부재한 것이다. 자라난 환경에서 감정이 제대로 성숙하지 못해 고통이 생긴다.


한편 최근에 많은 심리 서적을 통해 사람들이 어디서 보고 들은 건 많아서, 자신의 평균 이상 또는 이하의 감정을 성장과정이나 콤플렉스로 치부하진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자기 현재 문제나 상태를 과거의 원인으로 치부하거나 맡겨 두는 건 아닐런지. 그러면 일단 명쾌하고 속이 편하니까. 분명 성장배경에 받은 상처가 지금의 분노나 무력감으로 작용할 수는 있지만 그저 그 자체가 원인이고 극복해야 될 대상으로 인식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내가 나를 설득하지 못하면 남도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 우선 자신의 감정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복잡한 감정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표현하면 더 좋다. 이러한 감정들을 표출하지 못하고 응축하기만 하다가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으로 드러나고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들여다보고,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아무리 스스로 내면을 잘 파악하고 진지하게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더라도 전문가인 제3자가 보면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는 속마음이 분명히 있다.


나의 문제는 내가 답을 쥐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설득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의 설득이 소용 있을 리가 만무하다. 상처를 치유할 목적이건 감정을 가라앉히고 싶건 스스로 설득하고 납득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전문가가 그 여정을 도울 수 있다. 맹신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배척해서도 안 된다. 마치 자기 가족의 병을 오직 초월적인 존재인 신(神)만이 고칠 수 있다며 병원에도 안가고 방치하는 사이비종교 신도처럼 그러지 말자는 거다.


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주위에서도 도움을 주기 힘들다면 전문가를 찾아보자. 확실히 훈련된 전문가는 다르다. 대학생 때 교내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받으면서 선명히 느꼈다. 전문가가 차분히 학생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들어주다보면, 자기도 몰랐거나 외면해왔던 근본적인 원인과 감정에 봉착하는 사례를 많이 봤다.


친구도 할 수 있는 보완과 지원의 역할이었지만 훈련되지 않았기에 쉽지 않다. 그 마음의 부상을 굳이 치료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아물 때까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가전제품이 고장 나면 서비스센터로 가야지, 터미널로 가면 안 된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면 심리상담 전문기관이나 전문가를 찾아가야 한다.


사람은 충고하는 사람의 말은 안 들어도, 공감해주는 사람 말은 듣는다. MBC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서 MC 김국진 씨는 다른 게스트가 이것저것 요구하거나 따지면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하고 맥을 끊는다. 얼토당토하지 않는 걸로 태클을 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을 다 받아주다 보면 끝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없이 무작정 요구와 강요를 해오면 우리 뇌는 대화의 회로를 차단한다. 말하기 싫은 것이다. 그런 무례한 말에는 태클을 걸어야 한다. 내 마음의 상처를 입히지 않는 방어기제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경박하고 경솔한 태도에도 일격(一擊)이 필요하다. 상사든 부모님이든 나의 인격을 모독하는 말에는 참는다고 다 능사가 아니다.


속된 말로 ‘호구’였던 나는 ‘착하다’는 주위의 프레임에 갇혀 친구들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고 싫은 일도 참고 했었다. 점차 나의 의견은 없어졌고 그에 따라 주체적인 생각도 옅어졌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나의 행동을 지배하도록 방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싫으면 거절하는 용기를 한 번 냈더니 세상 편했다. 딱 그 처음이 어려웠다. 이후엔 무리하다 싶거나, 나를 얕잡아보고 부탁하는 말에는 단호히 거절했다. 거절만 하면 정없고 싹수없는 사람으로 찍히기 딱 좋으니, 내가 어느 정도 해줄 수 있는 일은 대안을 제시한다. ‘당장은 어려우니 어느 때에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는 식이다.


쓸데없이 내 일에 간섭하거나 이러쿵저러쿵 조언을 늘어놓는 친구에게는 “너나 잘해”라고 말한다. 아무리 좋은 말도 내가 듣기 싫으면 그건 덕담이나 충고가 아니라 듣기 싫은 말일 뿐이다. 나 또한 철없을 땐 후배들에게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 이런저런 말들을 해줬었다. 그래봤자 소 귀에 경 읽기다. 여러 번 매번 그러했다.


‘어차피 사람은 안 바뀌고 남의 말을 안 듣는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를 가슴속 깊이 받아들인 뒤로 조언, 충고, 제안은 접어두었다. 다만 사람은 자기 말에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며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말은 잘 들어준다. 그렇기에 조언, 충고, 제안보다는 이해, 공감, 인정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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