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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하 May 02. 2024

한 모순체의 생각




"행복을 통해 인생의 양감이 생긴다"

"인생은 행복을 잘 다스리며 행복을 잘 끝내고 가는 여정이다."

"행복은 현실이므로, 행복 속에서 춤추는 자세를 가져라."


'모순'과 '쇼펜하우어의 인생수업'에 나온 글귀들이다. 아니다. 사실은, 고통/불행에 대한 그 글귀들에서 고통/불행을 행복으로 바꿔봤다. 고통이나 불행이라는 단어 대신 행복을 넣어봐도 글귀들에서 이질감이 들지 않았다. 불행과 행복 사이에 굵직하게 선을 그을 수 있을까? 종이 한 장의 양면 각각 '불행'과 '행복'이라는 글자를 거리낌 없이 쓸 수 있을까? 무엇이 불행이고 무엇이 행복인가?




아직 아득하지 않은 과거는 아득한 과거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지나? 여하간 쓰러졌다가 일어나는 반복되는 상태의 주기가 이전보다 짧아졌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마치 생의 끝자락에 다다르며 잘게 요동치는 심전도 기계처럼, 이렇게 내 심장박동 수가 미친 듯이 요동치다 질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만 현재의 세상마저 아득해 보일 때였다.  


무엇이 구태여 씩씩하게 일어서는 나를 밀어 넘어뜨리나. 희뿌연 안갯속 보이지 않는 그 존재를 모른 채, 다시 일어나는 긍지와 함께 자라나던 '쓰러짐에 대한 두려움'이 나는 두려웠다. 




꼬꼬맹이 시절, 나는 집에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절에 매주 수요일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갔다. 먼저 이 세계를 떠나가버린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못다 한 사랑을 전하고자 우리는 절을 갔다. 그 절을 감싸고도는 묵향과 말발굽 소리처럼 청아한 풍경 소리, 더함이 없는 삼삼한 된장찌개, 마루 위 보송하게 내려앉은 먼지들을 소복거리며 걷는 하얀 버선발들이 어린 나를 포근하게 감싸줬다. 그 드세지 않은 삼삼함이 좋았다. 


그 추억을 마음에 묵힌 채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입시라는 감옥에서 해방된 많은 또래 친구들이 전에 없던 자유를 찬양하듯 외쳤다. 미친 듯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술과 유흥에 젖어들고, 와~하는 갈채 속 청춘의 길들을 동경하고 도전했다. 그런 분위기에 동조했던 찰나의 몇 개월이 지난 후, 나는 그런 청춘의 삶은 내 것이 아님을 느꼈다. 그 속세의 밀림 속에서 나는 수풀을 헤치며 빠져나왔다. 주변의 부추김으로 밀림 속에 다시 들어가게 됐을 때도 나는 이내, 자라나 버린 수풀들을 헤치며 빠져나오곤 했다. 


그렇게 나는. 꼬꼬맹이었던 나에게 고요한 행복을 주었던 절을 그리워했다. 그저 생경한 소리라고는 풍경과 산새 소리, 놋그릇들의 공명하는 소리 밖에 없던, 그 순간들이 왠지 모르게 그리워지고 마는 것이다. 수채색으로 옅게 내 기억 속에 서려있는 어린 시절의 절로 내 청춘이 발길을 놓았다. 그러다가 나를 생각하고, 자신들을 생각하며, 우리의 관계를 생각한 사람들과 있게 되면, 차마 이 속세를 벗어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주저하는 내 발길이 빚어낸 모순 속에서 내 마음속엔 슬그머니 수채색의 암자가 하나 세워졌으리라.


하지만 속세에 살면서 저 혼자 잔잔한 마음을 유지하며 암자에 머무르기가 어디 싶나. 군살이라 생각해서 미련 없이 떼어낸 것들은, 내가 움직이는 순간마다 마른 수건에 붙어버리는 정전기 먼지처럼, 자석 주위 흩어진 철가루들처럼 다닥다닥 붙어버리고 마는데.......내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일에 대한 의미 없는 집착을 내려놓고. 손 닿을 수 없는 허깨비 같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내려놓고. 자신들의 심심한 삶에 나를 소비해 버리는 사람들로부터 내 평온을 지켜내고. 세상이 정한 사회성과 가치가 아닌 내 삶의 양심과 가치에 떳떳하게 길을 놓고. 내 안에 진정으로 숨 쉬는 우주를 바라보기가 어디 싶나.




지금 그 존재는 하루하루를 선물로 여기며 하루의 끝 평온한 잠에 들려고 한다. 그런 복에 겨운 하루들을 보낸 후, 내 꿈속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 잊었다 생각한 사람들이 나와서 나에게 전에 없던 애정을 퍼붓는다. 그 당황스러우면서도 싫지만은 않은 꿈에서 깨어나면 그 어이없음이 입가의 미소로 번진다. 행복과 고독감을 같이 느끼는 모순적인 나를 발견하는 게 겸연쩍으면서도 싫지만은 않다. 


화학 작용에 의해서인지 조물주에 의해서인지 알 수 없는 모순된 근본을 가진 우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어쩌면 그 모순된 우주 속에서 생긴 '나'라는 하찮은 존재가 모순이라는 것은 크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래, 그것은 모순이었다. 쓰러짐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잠식해 버릴까 봐 두려웠던 잠깐의 나날들 속에서, 알 수 없었던 그 존재. 지금의 나는 그것을 모순이라 부르기로 했다. 온전한 나의 길을 원하면서도 세상의 소리와 빛에 혼미해지고 마는 나는 모순체라 하겠다.


모순된 세상 속, 나의 정신과 육체의 기동성을 위한 재료들을 모으며 나아가는 한걸음 한걸음은 불행이자 곧 행복이다. 쓰러짐과 일어남이다. 모순적인 그 어울림을 벗 삼아 나의 길을 찾아나가는 인고의 과정이다.


승복을 입고 평온한 암자에 있으면서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은 보다 쉬울 수 있다. 하지만, 모순된 세상에서 승복을 입지 않은 채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음지에서 기어 나와 나비가 되는 굼벵이처럼. 그렇지 않은 곳에서 그러하기란 쉽지 않지만, 더 강인한 그러함을 얻을 수 있다. 


어린 시절 고통을 다스리려 찾아간 절에서 행복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나는 고통과 행복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파스텔 빛깔로 이 아득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절에서 맺은 인연들처럼, 파스텔로 칠해진 속세와 수채색으로 칠해진 마음속 암자를 억지스러움 없이 이을 수 있을까. 모순을 흔연하게 받아들이며 묵묵히 길을 걸어나가다보면, 그 바람이 평온으로 찾아들 것이라고 한 모순체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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