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청년의 연애 및 결혼에 관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청년기 남녀들의 비연애 비율이 65.6%, 그 중 자발적 비연애 비율은 70.4%라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결혼 적령기 미혼남녀의 연애 비율이 30년 기준 약 45.5%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연애 및 결혼과 관련된 데이팅 앱, SNS 채널 및 플랫폼들은 큰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데이터 컨설팅 기업인 피엠아이에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현재 연애를 하고 있지 않는 주된 이유는 ‘혼자가 편해서 (33.6%)’였다. 즉 실제 연애보다는 대리 연애를 즐기는 청년들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바라본 주변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애를 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연애나 사랑에서 피어오르는 복합된 감정들을 성가시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의 감정이 휘둘려지고 자신의 일상 생활까지 흔드는 상황들을 경계하며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
우리에겐 자신의 삶을 연애와 사랑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존재하고, 이 자유에 대해서 함부로 얘기하기에는 각자의 예외적인 상황들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2-30년 동안의 기술 발달 및 사람들의 정서 변화에 관련한 자료들을 훑어보면 현재의 급격한 연애 및 결혼 비율의 감소는 안전 제일 주의와 위험 회피 성향이 강해지는 상황 떄문일 것으로 보인다 (참고자료 : 조너선 하이튼의 불안세대). 완벽하게 짜여진 대본 속에서 낭만적인 서사를 그리며 연애를 하는 사람들을 담은 연애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실제로 겪지 않아도 될 상처와 갈등을 카타르시스적으로 즐기는 현상황은 우리 현세대가 맞고 있는 수동적 사랑의 형태가 아닐까.
사랑예찬이라는 책을 쓴 저자 알랭바디우는 "사랑은 만남이라는 사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구축이라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며 진리를 찾아 나가는 여정”이라고 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새로운 무대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과정. 그 여정에는 두 사람의 차이에서 오는 시련과 고통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데, 그 지고한 과정들을 함께 견뎌내면서 순간순간의 행복들을 주워담는 여정이 사랑이 아닐까.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갈등을 통해 누군가와 부딪히는 담력을 기르는 기회가 적었던 요즘의 청년 세대들은 그 고통들을 지레 겁을 먹고 도전조차 하지 않거나 외면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인터넷에 누군가가 1분의 고민도 없이 던져놓고 간 한마디한마디들을 주워담으면, 그 1분 지식들을 짜깁기 해 놓은 넝마 한 조각이 만들어진다. 나와 살을 맞닿고 체온을 나누는 소중한 존재를 그 넝마로 덮어버리고 마는, 그렇게 그 넝마로 그 사람을 판단해버리고 포기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그 뿌리를 포함한 빙산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우리네 무의식 세계를 떠도는 인스턴트 정보들로 묻어버리고, 사람을 쉽게 분류해 내는 사회. 이런 사회를 진정 탈산업화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인간을 재료로 한 산업화 시대로 변모해 간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안전제일주의 사랑에서는 현시대 사회의 규범과 가치에 부합하는 소수의 몇몇이 살아남으며 그들이 포기해버린 수많은 존재들은 의도치 않은 가해자가 되고, 실상 피해자가 되어서 이 세상 많은 곳에서 사랑을 누리지 못한 채 홀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복잡해진 세상만큼이나 얽히고 섥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미묘한 얼레 사이에서 결국 우리는 사랑을 주기를, 사랑을 받기를 포기하며 발화되지 않은 씨앗상태 그대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이복자매들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바닷마을 다이어리, 친아들이 아닌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두 아버지의 삶을 다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혈연에 얽매여 있지 않은 가족 이야기를 담은 어느 가족 등 히로카즈 감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와는 조금 다르지만 특별한 가족들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
기성 세대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요즘 친구들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듣고 보며 걱정 어린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 홀로 사는 것만큼 힘들고 서러운 것은 없던 당시의 시절에 비추어 보아, 한창일 때 좋은 짝을 만나서 하루 빨리 평생을 약속하는 것이 그들의 생존하는 방식이었으리라.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그다지 고민해보지 않던 나 또한 이 말을 주변에서 들으며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 통계자료와는 달리 주변을 보면 다들 제 짝이 있고 제 짝을 찾아 결혼을 한다는 소식들이 요즘에도 들려오고 있다. 왠지 나만 짝이 없는 거 같다는 느낌은 아직 세상을 잘 알지 못하고 철부지처럼 사는걸까 의구심을 피어내기도 한다.
모순적이게 들리겠지만, 특정한 이성과 사랑을 하고 있지 않는 현재의 나는 누구보다 사랑을 하고 있다. 스스로 부여한 내 삶의 과제처럼 나는 부단하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고민하고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 나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사랑을 만남-연애-결혼-출산-양육이라는 정해진 틀 안에만 가두어 놓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진 않지만, 누구보다 사람들을 좋아한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순간순간마다 나는 그 누군가를 존중했고, 내 몸과 마음은 그 사람을 향해 있었다. 그 대상은 이성이기도, 친구이기도, 가족이기도, 또는 내 손길이 도움이 될 다른 누군가이기도 했다.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사랑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랑에는 여러 형태와 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현재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을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다. 앞서 보여준 통계자료를 통해 요즘 젋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줄어든 연애와 결혼 비율을 단순하게 부정적으로만 보아야 할까? 진정한 사랑을 하고자 하는 용기가 줄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과 세대가 변하면서 이 세상을 주도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전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의미를 찾아 나가고 있는 건 아닐까?
여하간에 결국 사람의 삶은 사랑으로 생겨나고 자라고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내재된 사랑의 씨앗이 발화되었다면, 그 씨앗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흙이 되어 또 다른 씨앗의 밑거름이 되어주는 그 과정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연애 및 결혼에 대한 통계학적인 수치에 현혹되어 그 물살에 거스르거나 또는 그대로 그 물살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의 결을 가꾸고 깨우쳐 나가려는 그 부단한 노력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손에 쥐어진 스마트 폰, 그 속에 담긴 타인의 자극적 창작물에서 잠시 눈과 마음을 떼고, 자연을 걸으며 주변 사람들을 돌보며 그 사랑의 의미를 직접 음미해 봐야 하지 않을까.
주변에서 정의 내리는 사랑에 현혹되지 말자.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진리를 부단하게 배워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