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이 뭐냐고 묻는다면 내가 아는 깡의 의미는 패기, 오기, 의욕 더하기 집념 뭐 그런 걸 두루 포함한 게 깡이다. 깡의 사전적 의미는 '악착같은 기질이나 힘'이다. 깡이 있어야 뭘 해도 해낸다. 뭘 성취하려는 의욕 넘치는 행위가 깡이라면 그 깡의 연료는 미래의 발전된 모습을 위한 순수한 동기도 있겠지만 더 강력한 파워를 지닌 연료는 각자가 느낀 그늘 같은 결핍이 그 동기일 경우가 대부분일 거란 생각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미래의 발전을 위한 순수한 시작보다 결핍의 화력이 더 셀 거란 생각이다. 결핍이 그냥 결핍으로 끝나고 마는 경우도 있으니 꼭 결핍이 동력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결핍 더하기 알파, 알파는 자기애 또는 가족애 즉 사랑이 가미되었을 때 제대로 타오르는 것일 거다. 깡이 있는 자가 제대로 성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느닷없이 '자아비판'을 하게 생겼다. 지금은 잠시 잊고 살고 있지만 한동안 스스로를 용이되지 못한 이무기라는 생각을 했었다. 용이되려고 꿈을 꾼 적이 제대로 없었는지도 모른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제일 깜짝 놀란 건 어릴 적 꿈 중에 책 한 권 쓰고 싶다는 게 있었다. 그건 꿈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로 책을 썼다. 비록 종이책은 아니지만 적은 수입도 있었다. 용이되려는 꿈을 꾸지 않아서 이루지 못했는데 다짜고짜 용이되지 못한 이무기라고 코 박고 살았다.
구체적으로 자아비판을 하자면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것까지만 꿈꾼다. 좀 슬픈 얘긴데 살면서 스스로의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그건 영어다. 내가 이십 대 때는 비정규직이란 게 없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한참 후 다시 취업을 했는데 비정규직종이 직업이 되었다.
간혹 스스로에게 볼낯이 없어질 경유가 있다. 뜻하지 않게 비열해져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별 근거 없이 엉뚱한 말을 하는 상사 앞에서 그냥 꾹 참고 바른 소리를 삼켜야 하는 경우가 스스로 비열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제대로 정규직이 되려고 마음을 먹는다. 그러다 스스로 '아, 영어?!'라고 신음한다. 워낙 수십 년간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놓은 상태라 영어를 A부터 다시 하려고를 하지 않는다. 결국 알고 보면 넘지 못하는 벽은 '나'다.
늘 그랬듯이 그냥 자아비판만 하고 끝났다면 차라리 고뇌하는 시간이라도 길어서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었을 수도 있다. 비록 제대로 된 깡이 없었더라도. 그러나 자기 합리화라는 포장을 한다. 그걸 안 하면 살아가기가 여간 빡빡한 게 아니니 별수가 없다.
가장 최근의 일이다. 상부기관에서 집으로 전화가 왔다. 급한 업무라 근무시간이 아님에도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쉽지 않은 환경인데 그분의 말은 "내일 출근해서 하셔도 됩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내일도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집에서 해보겠다고 하고 시작했다.
연속적으로 처리해야 되는데 하나 하면 다시 로그아웃 후 다시 접속해서 해야 되고를 수 백 번 해야 해결이 될까 말까 하는 일을 했다. 중간중간 전화 주셨던 그분과 통화도 하면서 해야 돼서 계속 다섯 시간이 넘게 그 일을 했다. 약간의 확인 절차를 밟으면 끝나게 되게 해 두고 다음날 직장에 가서 완결하고 그분과 통화를 했다. 깊이 경외하는듯한 뉘앙스로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했다. 투지나 집념이 없는 게 아니라는 설명 중이다.
깡이랑 형제자매 같은 투지나 집념이 없지 않는데도 쉬운 말로 2%가 부족한지 뭐 특별한 성취를 하지 못했다. 그 2%가 승패를 가리는 열쇠였을 수 있다. 그러다 흰머리카락을 미용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까만 물을 들여야 하는 지금 이때까지 뭐가 돼도 좋으니 진짜 제대로 뭔가를 이뤄보고 싶다. 꿈틀거리는 꿈을 굳이 나서서 죽이고 싶지 않다.
좀 결이 다른 우스운 얘기를 해보겠다. 어릴 때 시험공부를 하다 보면 진짜 아주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노력으로는 탑을 찍고도 남을 정도인데 믿기지 않은 성적을 내곤 하는 친구가 있었다. 반면에 스스로도 아무 공부도 안 했다고 했는데 순전히 거짓말 같은 성적을 내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친구를 볼 때마다 슬그머니 나도 아무것도 안 해도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이를 악물고 노력해야 뭐가 돼도 될 거라는 건 안다. 십 대로 돌아가서 다시 인생을 살아볼 용의가 있냐고 물어보면 지체 없이 사양할 거라면서도 그래도 어느 시점에서였던지 더 진하게 깡 있게 뭔가를 이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다. 욕심인지 미련인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 태클을 걸지 말고 끝이 어딘지 제대로 달려서 끝을 보았어야 했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