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간간이 도로 위의 물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잦은 비로 풀벌레도 울지 못하는지 조용하다. 텅 빈 거실은 시계태엽소리로 가득하다.
휴가철을 맞아서 식구들이 오래간만에 집을 찾았다. 편안한 시간을 갖는 중이다. 혹여 불빛이 잠을 깨울까 봐 불도 켜지 않고 조심스레 노트북을 켰다. 짙은 새벽에 또각거리는 하이힐 굽소리처럼 느껴짐이 신경이 쓰이면서도 자판을 두드린다.
중환자실을 오가며 가끔씩 사의 문을 두드려보는 엄마를 보며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절감한다. 그 와중에 생과 사의 경계에 서 계신 엄마를 두고 네 딸들은 출렁거린다.
누구나 홀로 본인의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시간들을 넘기고 버티고 하면서 쓴 커피를 마셔도 보고, 혹자는 의약품이라고 하는 알코올을 목 넘김 하며 인생의 쓴맛을 희석시키려 든다.
그 어느 누구의 삶보다 뒤지지 않는 진하고 쓰디쓴 삶을 살아낸 엄마는 벌인 지 휴식인지 모를 시간들을 홀로 움직일 수 없는 병든 육체와 말할 수 없는 상태로 침대 위에 누워 계신다.
엄마의 피와 땀으로 채워온 통장 잔고는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아프면 어쩌겠냐, 병원비로 남겨둬야지." 하며 걱정하시던 예언 같은 그 용도로 열일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자 부단히 도 마음 쓰셨던 엄마는 뇌경색으로 입원 만 이 년 팔 개월 동안 자력갱생 중이시다. 누구에게도 하물며 자식에게까지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아 하시던 그 걱정을 의식만 또렷하시고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해결해나가시고 계시다.
못난 네 딸들은 중환자실을 넘나드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며 잠잠했다가 시끌벅적했다가를 반복하면서 가끔씩 쌩쌩하고 건강한 본인의 육신을 환자를 만들었다가 마음 단속을 못해서 죽고 싶네 어쩌네 식의 푸념도 쏟아내며 묵직한 엄마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서로에게 여과 없이 내비치곤 한다.
그중에 멀쩡한 정신으로 서로 정신 차리자고 새마을 운동하듯 말한 사람을 밥맛 없어하며 지난 시간들을 들추기도 하고 한 뱃속에서 나온 그것 하나 믿고 경계 없이 원치 않는 노골적인 모습을 한껏 발산하곤 한다.
부족한 당신의 자식들을 알아서인지 '니들이 걱정 안 해도 된다. 내가 나는 감당하마.'를 무언중에도 호소력 있게 실천하고 계시는 엄마와는 달리 필요 이상으로 극진한 딸은 그렇지 못한 자매들을 호령하고 하물며 의료진들까지도 부담스러워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기를 원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한다.
알고 보면 그 극진한 딸로 인해 상대적인 불효녀가 되어있는 자식들은 좌불안석이다. 서로의 말을 경청하고 누구도 아닌 우리의 엄마를 위해 마음 쓰는 그 하나를 존중해야 된다. 불화를 걱정해서 당신의 병원비를 지켜오신 엄마 마음을 헤아려서 병환 중에도 우애 있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야 되는데 그걸 못한다. 시중에 떠다니는 "긴병에 효자 없다."를 눈으로 확인하는 중이다.
무슨 원인인지 다들 인정받고 싶어 하고, 본인의 역할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며 힘든 상황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 딱 그냥 거기까지 하면 그래도 다행인데 본인도 일정 부분 인정하고 인식하고 있는 부족한 부분을 들추면서 그런 상대를 향해 방어하며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상황극을 펼치곤 한다.
그냥 어리석다. 한 뱃속에서 태어났다는 그걸 무의식 중에 인식해서인지 이루 말할 수 없이 원초적이다. 애써 공들여 키운 엄마가 벌떡 일어나실 일이다. 어쩌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유구무언 하시게 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른다.
병든 엄마를 두고 죽고 싶다는 표현을 하는 어리석은 자식도 있다. 어쩌지도 못하시는 다시 말해 죽지도 살지도 못 하시는 갑갑한 상황에 계신 엄마는 한숨소리마저도 못 내신다.
까만 어둠이 가득했던 공간은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누구나가 까맣게 느껴지는 터널이 있다. 언젠가는 그 터널을 벗어날 수 있음에도 터널 속에 있을 땐 그 시간이 유한하다는 걸 감지하지 못하고 못 견뎌한다. 다시 느끼지만 여명은 꼭 밝아온다. 그건 버티는 자의 몫이다.
장마에 풀벌레마저도 침묵하는 줄만 알았는데 가만히 기다리니 거실의 시계태엽 소리는 침묵하고 온갖 새들이 아침을 열고 있다. 엄마의 병실에서도 새소리는 들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