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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모 Sep 15. 2023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8월. 여름 기억

3 오프 시작하는 날.
두 시간 정도 자고 무거운 눈을 떠 택시를 타고 역으로 향했다.
금요일 오후라 그런지 여름휴가철이라 그런지 역 안에 사람이 많았다.

무궁화호와 통일호를 타고 서너 시간씩 기차 안에 서 있었던 어린 시절이 추억으로 남아있어 기차 타는 것이 좋다.
KTX를 타고 차로 두 시간 거리인 서울을 한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역에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는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을 보니 도시에 왔다는 것을 실감해 몹시 낯설면서 약간 설레었다.


4호선을 타고 노원에 도착했다.
역 앞에 양산을 쓰고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마가 끝나고 찾아온 폭염으로 한낮의 온도는 37도. 그야말로 한 여름이었다.

여고 친구인 L.
근무시간을 종일에서 시간제로 바꾼 L과 평일 오후에 만날 수 있다니.
들뜬 마음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L의 동네 먹자골목에 들어갔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각인 오후 4시였다.
문을 연 맥주집에 홀리듯이 들어갔고 생맥 2잔과 불닭볶음면에 소시지 안주를 시켰다.

한낮의 맥주라니.
그것도 혼자가 아닌 친구와의 낮맥이라니.

한 여름 뜨거운 낮의 생맥주는 황홀했다.


간단하게 먹고 나와 인생 네 컷을 찍으러 갔는데 여러 장의 사진을 자동으로 설정해 버리고 증명사진으로 선택해서 소품을 쓰고 벗을 시간도 없이 깔깔거리며 웃다가 끝이 나버렸다.

난장판이 돼버린 소품들. 바보들.



이렇게 많은 소품들은 도대체 왜 갖고 들어가서 열심히 찍은 건지 딱 하나의 사진만 고를 수 있어서 황당했고 너무 웃어서 정신이 없었다.
웃으면서도 이렇게 진짜 재미있어서 웃은 기억이 언제였었는지를 생각하며 또 웃었다.

억울해서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다른 곳으로 갔고 두 번째는 6컷짜리로 잘 골라서 여유롭게 찍었다.

확실히 첫 사진만큼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나름 인생 네 컷에 어울리는 사진을 찍었다.

다시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이자카야에 들어가서 연어샐러드와 삿포로 생맥을 시켰다.

기본 안주인 완두콩과 미역초무침을 세 번이나 리필해서 먹고 배부르다고 하면서 맥주를 연달아 마셨다.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 L의 소개팅 얘기도 듣고(대리만족) 요즘 서로의 고민거리를 얘기하며 한참 수다를 떨었다.


너무 배가 불러 L의 자취집에 가서 짐을 놓고 천변으로 나갔다. 서울의 천은 서울역처럼 사람이 많았다.

뛰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걷는 사람, 농구를 하는 사람, 보드를 타는 사람.

가끔 저 멀리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와 불빛이 보였고 꽤 낭만적이고 뜨거운 밤이라고 느꼈다.
거의 만보를 걷고 들어오는 길에 발바닥에 핫팩을 붙인 것처럼 뜨거워서 자연스럽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었다.
나는 메로나. L은 거북바.


L의 집. 5층을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샤워를 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노브라.
L은 자신의 침대를 기꺼이 나에게 내어주고 바닥에 누웠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L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

나는 나 혼자 산다를 보며 혼자 웃다가 에어컨 바람이 너무 차가워 이불을 덮었고 이불속에서 인스타를 보다가 카톡 프사를 바꾸며 오늘 찍은 인생 네 컷 속의 이를 다 드러내고 웃고 있는 내 얼굴이 조금 낯설었다.


"너 오늘 신났었구나.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웃는 나를 자주 만들자"

뜨거운 여름밤은 이렇게 가고 있었고

남은 건 볼품없지 않은

우리의 사진과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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