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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현진 Feb 02. 2023

끌려다니는 엄마의 하루가, 나는 좋아

너희 손을 잡고는 무엇이든

현진이의 일기




엄마의 일기


기억조차 없는 어린 시절부터 높은 곳이 무서웠고 싫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아찔하다 못해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였고, 그렇게 내 몸 하나 주체 못 하다 보면 여기서 떨어져 죽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상 속의 나를 극단적인 결말까지 끌고 가는 두려움이 싫어서, 지금껏 대부분의 높은 곳들은 나의 굳은 의지로 열심히 피해 다니며 살아왔다. 어쩌다 보니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초고층 아파트인데, 창문을 열어놓는 여름이면 아이들이 창가 근처에만 기대 서있어도 기겁을 하곤 한다. 나는 고소공포증에 지긋지긋하게도 끌려다니며 살고 있는 중이다.


아이와 함께라면, 나의 굳은 의지나 노력만으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늘 절감하고 있다. 이를테면, 아이가 편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평생 먹지 않았던 당근을 아이 눈앞에서 아주 맛있게 먹는다든가, 어지러운 놀이기구를 함께 타자는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같이 빙빙 돌고서는 토할 것 같은 마음을 감추고 애써 신난 척 웃어준다든가 하는 것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나 혼자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을 아이의 손에 이끌려 해버고야 말았다.




롯데타워 전망대에는 바닥이 투명해 발밑 세상이 훤히 보이는 공간이 있다. 사방에 나 있는 창문으로만 아래를 내려다봐도 아찔한데, 내 발 밑으로 사람이 다니고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게 적나라하게 보인다니. 인터넷 검색을 하며 본 사진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려버었다. 그런데 그 뚫린 바닥길을 현진이가 혼자는 못 가겠다며, 내 손을 기어이 잡아끌었다. 용감하게도 현진이는 나의 손을 잡자마자 먼저 투명한 바닥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저 아래 차들이 움직일 때마다 움찔, 바닥에 금 가는 상상을 나도 모르게 하면서 울렁, 그래도 따라 걸었다. 현진이가 내 손을 잡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보다 더 쫄아서는 근처에도 가기 싫다던 유진이까지 모두, 우리는 창문까지 다다랐다.


높은 곳만큼은 굳세게 피해왔던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게, 특별히 높은 그곳에서 나는 괜찮았다. 아니 그 누구보다 신이 나 있었다. 아이들과 같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발 사진을 찍고, 심지어 엎드려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는 현진이를 보며 웃어젖히고, 더듬더듬 발을 내딛는 유진이를 응원해 가며, 아주 신이 나게 놀았다. 재난 영화에나 나올 법한 끔찍한 상상은 나도 모르게 잠시 접어두고. 우리는 한참을 그곳에 머물렀고,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현진이는 그날의 모든 기억을 통틀어서 바닥이 뻥 뚫린 곳에서 놀았던 그 순간이 가장 신이 나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심지어 그날만이 아닌 인생의 모든 기억을 탈탈 털어내 봐도, 고소공포증을 털어버리는 짜릿한 감정만큼은 그 순간이 내 인생의 정점이었을지 모른.

 



내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은 피곤하고도 안쓰러운 것이라 생각해 왔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면 필연적으로 그런 삶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먼저 엄마가 된 많은 사람들이 엄마가 되면 본디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했던 그 말은, 내 삶을 내가 온전한 나의 의지로 이어나갈 수 없단 사실깨달아서가 아니었을까. 내 삶 또한 그렇다. 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은 아이들에 의해 흘러간다. 나의 하루가 만약 살아있는 생명체였다면, 펄떡펄떡 사방팔방 뛰어다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목줄을 찬 애완동물 같은 모습이 되었음을 깨닫고 당황했을 것이다. 목줄을 쥔 주인의 사랑을 아주아주 듬뿍 받지만 더 이상 내 마음대로만은 안 되는 삶을, 나의 하루는 처음부터 기꺼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받아들이고 나면 또다시 새롭다. 피곤하지만 즐겁고, 안쓰러울 때도 있지만 뿌듯하고 기쁠 때가 더 많다. 내 마음대로 약속을 잡을 수도, 가끔은 입맛 없다고 주방을 파업하고 끼니를 거를 수도, 주말이면 내 마음대로 쉬거나 나가 놀 수도 없는, 아이들에게 늘 끌려다니는 나의 하루이지만, 그럼에도 끌려다니다 보면 이렇게 짜릿하고 신이 나는 순간을 아이 선물해 준다. 나 혼자라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마음을 아이에게 받는다. 나는 내 아이에게 늘 사랑을 갈구하고 아이만을 졸졸 따라다니는 애완동물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서 좋은 순간이 너무너무 많다. 다시 헐벗은 자연인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심으로.


나는 이제 안 먹던 당근도 굳이 피하지 않고 먹을 수 있으며, 다시 롯데타워의 그 자리에 서보래도 현진이랑 유진이가 손만 잡아준다면 씩씩하게 해낼 수 있다. 아이들이 나를 이끌어줘서 나는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많은 것을 해보고, 많은 것을 극복해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끌고 가는 엄마의 인생을 기대하고 즐기는 중이다.

나를 또 어디로 이끌고 갈지 늘 기대되는 나의 아이들아. 엄마는 아주아주 신나는 마음으로 너희 손을 잡고 기꺼이 끌려가줄게. 렛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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