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인정욕
기질적으로도 유난히 유약한 엄마에게 외할아버지의 차별은 치명타였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흔적 없이 엄마의 기억에만 남아 여러 곳에 고리를 걸고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엄마가 끊어내려는 노력을 했다면 조금 달랐겠다는 2차 가해 같은 속 편한 소리를 하지만, 어쨌든 원가족에게 인정받기 어려웠던 엄마는 타인에게 인정받으며 욕구를 달랬다.
한두 번 볼 인연이 스치듯 던지는 칭찬을 얻어내기가 아버지나 형제들의 다정한 한 마디를 듣기보다 쉬웠을 것이다.
엄마는 타인의 반응에 집착했다. 진실의 틀 위에 동경하는 모양을 발라 구워낸 가면을 쓰고 그대로 연기했다. 그녀의 생존 전략이었다.
가면은 이런 모습이다.
아버지의 차별을 겪어내면서도 충청도 최초의 여성 지적직 공무원을 해낸(사실 여부는 모른다) 공무원 출신!
공무원을 그만두고 파렴치하고 폭력적인 미친 남성들과 두 번의 이혼까지 하여 상처만 받은 불쌍한 여자!
그러나 굴하지 않고 성 씨 다른 두 딸을 세상의 전부로 여기며 차별 없이 키우고 화 한 번 낸 적 없이 항상 자애롭게 대하며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지원할 준비가 된 어머니!
차분하고 지적이고 조신하고 신사임당의 외모마저도 닮은 21세기 신사임당!
60살이 넘어도 공부를 놓지 않아 자격증이 20개가 넘는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만학도!
가면을 쓴 시간이 오래될수록 그것은 점점 맨얼굴에 달라붙어 떼내기 힘들어졌다. 자신과 가면을 구분해내지 못하고 가면의 삶이 진실이라 믿는 지경이 되었다.
엄마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하지 않았다. 고상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감히 천한 일을 할 수 없으며, 사무실에 앉아 워드를 다루거나, 학생에게 가르침을 주는 일만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컴퓨터를 켤 줄도 모른다.)
수입이 없기에 3인 가구의 생활비는 외삼촌이 다달이 보내주시는 돈과, 30 년 전에 취득한 기사 자격증을 맡겨 나오는 30 만원으로 충당했다.
(회사에 이름을 올려놓아 소득이 200만 원으로 잡혀 저소득층 지원금도 받을 수 없었다.)
일을 하는 대신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며 자격증 공부에 매진했다. 사이버대학, 방송통신대학교, 국비지원학원 등을 다니며 수십 개의 자격증을 따기만 했다. 이제는 해외에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을 6년째 낙방하고 재응시하고 있다. (영어도 모르고 해외로 갈 돈이 없어서 취업이 안 될 거라 말해도 믿지 않는다.)
혼자 살지만 15평 이하의 작은 집에서는 절대 살 수 없고 적어도 서울의 조용하고 깨끗한 동네(평창동, 성북동, 송파구 등) 20평 이상은 되어야 살 수 있고 국민임대는 못 사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 위험하고 불결해서 가기 싫다 한다.
1억을 신용카드장기대출을 받으면 이자율이 1%대라고 누가 말해줬으니, 그 돈으로 이사 갈 것이라 말한다.
(대출도 안 나오지만, 받더라도 수중에 월세도 못 살 돈만 있다.)
한두 번 보고 말 사람들은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멋지다 찬사를 보내고 떠난다.
"오늘 봉사 간 곳에서 나보고 선생님 같다더라."
"다들 나만 보면 어쩜 그렇게 고상하고 우아하냐더라."
"학교 갔는데 담임이 너 칭찬은 안 하고 엄마 칭찬만 하더라."
엄마는 벅차오름을 느끼며 가면을 더 단단히 붙들어맨다.
그들의 박수 세례로 휩쓸고 지난 자리에 우둑히 남아 엄마의 망가진 현실감각을 챙겨야 하는 것은 가족들 몫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말하면 도끼눈을 뜨고 말한다.
"니가 뭘 알아? 누구누구가 된다던데.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다 해보고 잘 알아서 알려준 거야. 모르면서 똑똑한 척 좀 하지 마."
결국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면 전화가 와 이상하다고 말한다.
보이스피싱도 믿어버린다. 말려도 듣지 않는다.
자신을 찬사 하지 않거나 자신을 거절하는 상대는 모두 뒤에서 인격적으로 살해한다.
상처받은 어린아이가 성장을 거부하고 멈췄다. 흑과 백만 있는 세상 속에서 내 편과 나쁜 사람만 존재한다.
어두운 상처가 가득한 현실을 마주 보는 대신 자신이 받은 칭찬에 풀을 발라 덕지덕지 도배한다. 기괴하고 화려한 환상에 숨어 현실을 외면해 버린다.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는 본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도 향했다. 자신의 유전자로 낳아 기른 자식이 빛이 나야지만 비로소 가면이 견고한 근거가 되기 때문일 것 같다.
나는 어릴 때 똑똑했던 것 말고는 키도 작고 내세울 게 없었지만,
언니는 키도 168cm로 늘씬했고, 예쁘장한 데다 서울 4년제 여대에 다녔다. 해외에 살다 왔기에 영어도 잘했다.
언니는 엄마의 자랑이었다.
29년을 걸쳐 정성을 다한 '자랑'이 데려 온 남자는
키도 작은 데다 이상하게 생기고 학벌이나 직업도 별로였다.
물론 엄마의 눈에 그랬다.
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설령 사실이래도 괘념치 않았다.
하나가 마음에 안 드니 다른 점들도 미워 보였나 보다. 점차 패악을 부리기 시작했다.
언니가 자신에게 결혼 승낙을 받기 전에 예비 시부모를 먼저 만나고 온 것,
9년 만에 대학을 졸업해 이제 갓 취업한 상태라 돈도 없는데 결혼한다는 것,
언니에 비해 남자의 키가 작다는 것,
언니는 잘났으니 더 좋은 집안, 전문직종의 남자와 만날 수 있을 거란 것,
남자가 자신을 무시하고 깔보는 것 같다는 것,
그 집은 남편(예비 시아버지)도 있는데 자신은 없다는 것,
친정이 못 사는 걸 알면서도 돈을 주지 않았다는 것,
이불과 그릇은 친정 엄마가 해야 하는 것인데 시가에서 해줬다는 것,
찾아내려면 수십, 수백 개가 넘을 이유로 반대할 기세였다. 남자는 예비 장모의 자랑이 되지 못했다.
긴장 속에서 상견례를 하게 됐다.
결혼식 9개월쯤 전이었다.
사돈부부와 함께 남자의 누나와 매형, 조카까지 와 있었다.
우리는 꼴랑 3명이었다.
엄마는 남편이 없다는 것에 위축감을 느꼈던 것 같다.
엄마는 갑자기
'얘가 아빠 없이 자라 애정결핍이 심하다. 그러니 잘 봐달라'는 말을 했다.
언니가 당황했다.
그리고 시어머니 될 사람이 자신과 남편, 매형, 누나에 대해 소개하자 기를 누르려 한다 여겼는지 자랑배틀이 시작됐다.
'별 볼 일 없어 보이겠지만 이래 봬도 나는 공무원 출신이다, 내 남동생은 카이스트 박사출신에 연구소장이다, 다른 형제들과 동서들은 학교 선생님이다, 삼촌은 변호사이고, 우리 아버지는 큰 대지를 소유하시고 있다.'
여기까지 말이 나오자 언니는 책상 밑으로 엄마의 다리를 쿡, 찔렀다.
엄마는 분노했다.
'쟤네가 먼저 나를 무시해서 대답한 것뿐인데, 내 입 가지고 말도 못 하게 내 딸도 나를 무시하고 입 다물라 한다고?'
엄마는 모든 걸 뒤엎어 놨고 집은 냉전이었다. 언니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언니는 약점을 내보인 적도 없었고,
있대도 엄마는 굳이 공격하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결혼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약점을 잡힌 언니는 죽음을 고민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엄마는 두 딸이 집에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기만 해도 '나만 쏙 빼놓고 둘이만 쏙딱거리며 작당모의한다'라고 분노했다.
본식 당일.
엄마를 겨우 참석시켰지만 그곳에서도 뚱하고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엄마는 신부입장에 큰외삼촌이 입장시키게 하려 했지만 실패하였기에, 작은외삼촌의 양복에 부토니에를 꽂아 입구에서 친정 손님을 맞이했다.
결혼식 내내 엄마의 눈엔 물기가 없었다.
시댁 어른들의 주장으로 폐백을 하게 됐다. 20~3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엄마는 기다리기에 배가 너무 고프다며 뷔페에서 밥을 먹자 했다.
나는 벽 뒤 룸에 직계 가족들을 위한 코스 식사가 마련돼 있었기에 조금만 참자고 했다.
'우리가 손님 상에서 뷔페를 먹어버리면 사람들이 언니 욕한다, 결혼하고 첫 식사를 시댁 식구들이랑만 먹게 되면 언니 기분이 어떻겠냐, 차라리 엄마 쪽 하객한테 먼저 인사하면서 좀 기다리자'
계속 엄마의 손목을 잡고 말렸다. 엄마는 강경했다.
지나가는 이모 삼촌들을 붙잡고 제발 엄마 좀 말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이따 큰 딸 오면 먹지 그래~"라고 타이르듯 말하곤 본인들의 식판을 들고 이동했다. 원피스 차림의 신부 동생과 혼주 한복을 입은 엄마의 갈등에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엄마는 그럼 혼자 여기서 먹을 테니 언니를 기다리라 했다.
그때 불쌍하고 가련한 여인의 모습을 한 엄마의 가면이 보였다.
선택해야 했다.
엄마를 홀로 둔다면 그토록 노력했으나 자식에게 외면받은 불쌍한 여자가 되려는 엄마의 계획이 승리한다.
엄마와 함께 손님석에서 먹는다면 엄마가 덜 불쌍하게는 보이겠지만 이것대로 최악이다.
결국 엄마가 고른 자리에서 뷔페를 떠먹었다.
이모 삼촌들 사이에 섞인 것도 아니고,
음식을 받으러 줄 선 이들 바로 옆 2인석에서.
언니에 의하면 신부 측 축의금을 엄마가 모조리 가져갔다고 한다. 신부 지인들의 돈까지 말이다.
언니는 엄마가 결혼으로 장사를 했다며 허탈해했다.
엄마는 결혼 이후로도 온갖 트집을 잡아 화를 냈다. 불쑥 화가 나면 언니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수십 통을 걸었다. 키워준 값을 내놓으라 했다. 결국 화를 못 이겨 형부에게 부모 욕까지 하게 됐고, 그렇게 언니는 엄마를 차단했다.
절연 이후 사정을 모르는 이가 안부차 큰 딸에 대해 물을 때마다 엄마는 가장 안쓰럽고 처연한 가면을 꺼냈다.
선택받은 아이의 결혼은 축복이 아닌 파멸이었다.
엄마는 언니의 결혼이 서운하고 서러웠을 것이다.
자신이 돈이 없어 지원해 주지 못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인지 자격지심을 느꼈을 것이다.
언니가 자신을 떠나 새 가정을 꾸릴 것이라는 것이 엄마의 유기불안을 자극했을 것이다.
선택받은 아이임에도 결국 그랬다.
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공포감에 떨었다.
이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거구나.
언니에게도 이렇다면 내겐 어느 정도일까.
나는 엄마를 무사히 결혼식장까지 모실 수 있을까.
언니가 떠난 후 더 강력해진 엄마는 나의 상견례에서 무슨 얘기를 할까.
나는 엄마 때문에 비혼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언니의 결혼 8년 후
감사히도, 괜찮으니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자는 남자를 만났다.
나는 다시 결정해야 하는 때가 왔다.
엄마와 함께 밥을 먹을지, 엄마를 떠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