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만큼 과로를 하면... 죽는다. 하지만 살아야 하니까!
“노동계 “과로로 해마다 500명 사망… 불평등 논의 없이 주 52시간 무력화”(2022.12.13, 서울신문)
해마다 과로사로 죽는 사람이 500명이 넘어간다는 뉴스를 보면서 회사 다니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다 최근 '활동할 힘을 어디서 얻느냐’는 질문을 받곤 그 무렵을 떠올리며 "그냥 살면 죽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라고 대답했던 일도 생각났다.
나도 일을 하다가 죽을뻔했다, 고 생각한다. 그때 나를 괴롭혔던 직장 사수가 했던 말도 기억한다. “죽을 것 같지? 근데 안 죽어" 농담처럼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그 사람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말로 자신의 위력을 행사하는 게 이상했다. 누군가가 과로로 죽었다는 말도 생각보다 가볍게 오고 갔던 장면도 기억한다. 자기가 언제 그랬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1년이 넘게 아침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일을 하다가 하다가 그래도 안 끝나서 새벽 3시에 혼자 있던 사무실에서 울면서 미안하다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메일을 쓰고 퇴근을 했던 날도 기억한다. 앞으로 뭘 더 어떻게 잘해. 한 번은 근무 시간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나는 한 달에 300 시간이 넘게 나왔던가? 사장님이 그걸 보고 허허 웃더니 곧 근무기록은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노동청으로 향하는 대신 나를 의심하며 쏟아질 비난의 말들을 두려워했다. 차라리 집에 가는 길에 차에 치여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기억한다. 집으로 가는 길은 사람이 드물고 인도가 없는 길이었다. 면접 보러 가던 날,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길이다. 새벽의 차들은 조심성이 없었다. 그러니 차에 치여 죽고 싶다던 내 바람은 꽤 현실적이었다. 즉, 나는 죽을뻔했다. 과장된 비유가 아니라.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죽고 싶다는 충동이 올라올 정도로 자살충동이 심했던 때임에도, 내가 죽었다고 느낀 적은 따로 있긴 하다. 인턴이었던 직원이 일을 다 마치지 않고서 나에게 차가 끊기니 11시에 집에 간다고 했던 날이었다. "알겠다"라고 말하면서 속으로 그 직원을 미친 듯이 저주했다. 나는 내가 낯설었다. 무거운 말들을 농담처럼 했던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디자인을 하다가 과로로 누가 죽는다는 기사를 찾는 일은 어렵지도 않다. 그런데 과로로 죽는다는 말을 하면 상대방은 늘 과장법으로 듣는다. 진짠데. 그래서 아무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다. 나는 내가 겪은 일이 엄청나게 특수한 일이 아니라 업계의 환경에서 비롯된 보편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히려 딱히 내가 당한 일을 ‘공론화'한다거나 ‘고발'할 생각이 없다. 가해자 하나 찍어서 책임을 묻는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 과로사 이야기를 하면 과장이라고 생각하고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니까. 그리고 누구나 그런 환경에서는 그럴 수 있다. 가해자는 아무 데도 없는데 피해자만 존재하는 상황은 이런 식으로 반복된다. 그래서 나는 그런 환경을 바꾸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냥 살면 죽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오늘의 풍경이라는 스튜디오를 직접 운영하며 일하고, FDSC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내가 가장 싫어했던 말은 "한국에서는 안 된다"였다. 에이전시가 밤을 새울 수밖에 없게 하는 비딩 같은 불합리한 제도는 보이콧하면 안 되냐고, 주말에 일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일정을 짜면 안 되냐고, 더 많은 예산을 요구하면 안 되냐고 내가 디자이너로서 배운 대로 제언하면 어김없이 저 말이 튀어나왔다. 해외에서 쌓은 배움은 간단히 무효화해 버리는, 너무 쉬운 한마디였다. 그때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해보지도 않고 말한다고 생각했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 사람들도 많이 시도해 봤고, 많은 사례를 봤는데 절망만 반복적으로 겪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포기하고 순응하는 편이 자기 삶을 구하기에 더 빠르고 편했을 것이다. 혹은 감히 선배들을 의심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홍은전은 ⟪그냥, 사람⟫에서 이렇게 쓴다. “차별받으면 주눅 들고 고통받으면 숨죽여야 한다.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러라고 하는 게 차별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도 쓴다. “모두가 침묵하고 굴종할 때 차별은 당연한 자연현상이 된다.” 나는 자연현상같이 유지되는 것들 때문에 죽고 싶지 않다. 동시에 자연현상 같이 큰 것을 혼자의 힘으로 바꿀 수 없음도 안다. 그 대신 내가 믿는 것은 큰 단위에서의 변화는 어려워도, 작은 단위의 다른 사례를 만들고, 그것이 좋은 경험이 된다면 대안으로써 자리 잡는다면 시간이 지나 큰 단위의 변화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나를 구원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믿을 수밖에 없다. 긴 싸움이나 기다림 없이 지금 당장 작더라도 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
유럽과 미국의 백인 주류 디자인을 보면 좋은 선례들이 많다. 결과물도 멋지고 그 과정도 매끄럽고 세련된(것처럼 보이도록 꾸며진 것일지 모를 일이지만). 한국의 디자이너들도 실력은 뒤지지 않는 것 같은데 결과물에서 갈리는 이유가 뭘까 고민해봤을 때, 내 결론은 과정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무언가가 나올 수 있는 조건이 있고,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결과물이 나오기 어렵다. 물론 전적으로 조건에 기대는 것은 아니고, 결과는 어느 정도 디자이너의 역량에 달려있기도 하지만. 그 역량마저도 어떤 기반 위에 있다. 그래서 나는 그 기반을 만드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과정에서 설득하고, 다른 방식으로 일해보고, 다른 툴을 도입하고, ‘비협조적’으로 일하고 싸웠다.
"한국에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나에게 말했을 것이다. "여긴 한국"이라고. 그 말에 대한 나의 대답은 "사람 사는 데 다 똑같다"이다. 그래서 싸웠다. 그곳에서 된다면, 여기서도 될 수 있다고 믿고. 그러다 최근 브라질 디자이너들의 활동을 접하곤 내가 참고해야 하는 건 유럽과 미국이 아닌 다른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맞다. 여긴 한국이다.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반이 다르다. 기반이 다르기 때문에 착취당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곳과 다른 방식으로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와 기반이 유사한 유럽과 미국 백인 중심 디자인 밖의 디자인에서 참고점을 찾아야 한다. 거기에 우리에게 힘이 되는 선례가 있을 확률이 더 높다. ‘피억압자의 디자인'이라는 네트워크를 꾸린 브라질의 디자이너들은 파울루 프레이리, 벨 훅스, 프란츠 파농의 작업을 경유, 활발한 토론을 통해 비판적, 탈식민지적 디자인 관점을 세운다. 본인이 디렉터로 있었던 학과에 점거행동으로 보우소나루 정권에 저항한 조이 아나스타사키스와 마르코스 마르틴스는 역사와 ‘동사로서의 디자인'을 강조한다(책이 읽기 힘들다면 영상은…? 어떤가 ^^...). 이전 글에서 다뤘던 북미 흑인 디자이너들의 역사 다시 쓰기 작업도 비슷한 맥락에서 참고지점이 많다.
그러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했던 노력들 이면엔 착취가 깃들어져 있었다. 나는 편집자 예산을 제안하고(까이고 내가 어느 정도 그 역할을 하며 나를 착취하고), PM을 도맡아 하고(나를 착취하고), 디자인은 내 능력 안에서 최대한 (트렌드에 맞춰) ‘멋'있게 하려고(또 나를 착취)했다.
그런데 애초에 그 기반이 마련될 수 없는 곳이라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비영리단체는 영리 기업처럼 충분하고 넉넉한 예산으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꾸려, 분업 프로세스에 맞춰, 프로젝트를 돌릴 수 있는 여력이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디자인을 영리 기업처럼 트렌디하게, ‘멋’ 있게 한다는 건 무엇인가? 영원히 이길 수 없는 싸움 아닌가? 트렌디하게 소비되는 건, 비영리단체의 운동에 도움이 되는가? 비영리단체의 환경에 맞는 디자인은 무엇인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자 신이 났다. 와, 내가 찾던 새로운 디자인의 가능성이 여기 있네?
내 기본적 믿음이 바뀐 건 아니다. 나는 작은 단위의 변화는 당장 가능하고, 또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경찰폐지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변혁정의(한글자막 영상)’라고 이름 붙였다. 이를 실천하는 방법론으로 흑인 퀴어 페미니스트인 애드리언 마리 브라운 adrienne maree brown 은 <창발적 전략 emergent strategy>(2017)을 트랜스 법학자이자 활동자인 딘 스페이드 dean spade는 <21세기 상호부조론 mutual-aid>(장석준 역, 2022)을 이야기한다. 이들의 방법론은 내 믿음을 확인하고 실행해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억압의 구조를 살피고 그것이 불가능한 구조를 상상하고 공동체를 통해 실천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디자인에 적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디자인이 구성되는 과정에서의 억압을 살피고, 2) 그 억압이 사라진 대안적 상황을 상상해내고 실천하며 반성하고 고쳐나간다. 3) 이 모든 과정은 동료들과 함께 한다. 여기서 동료는 디자이너에 국한되지 않는다. 앞선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디자인 사학자들이 알려주었듯, 디자인의 구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디자인이 온전히 디자이너만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원과 함께 몇몇 비영리단체의 문을 두드렸다 좀 다른 방식으로 일해보자고. 우리는 이곳의 기반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그걸 파악한 후에 일하는 방식도 발명하고 싶었다.
우리는 이 방식을 ‘상호 돌봄의 협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 사이의 상호작용이 착취나 억압이 아니라 돌봄에 가까운 관계를 상상하며 실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구체적인 행동강령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면 우린 아직 선례를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건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라는 두 참여주체가 함께 만들어야 하는 것이니까. (나중에 더 많은 주체가 참여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상호 돌봄의 협업'을 시도라도 해보려면 우선 우리의 이 막연한 상상에 공감하며 동의하고,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함께 발견해나갈 동료가 필요했다. 다르게 말하면, 참여하는 비영리단체의 담당자도 평소 자신이 하던 일하기 방식에서 벗어날 각오가 필요했다. 누구보다 바쁜데, 그걸 해줄까? 떨리는 마음으로 이미 오늘의 풍경과 프로젝트 진행경험이 있던 단체 3곳에 우선 메일을 보냈다.
다행히도 세 군데 모두 긍정적으로 답을 해 주었고, 2022년 한 해 우리는 같이 이 방법론을 더듬어나가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관련해 더 자세한 내용이 업로드될 테니 (미래의 나와 희원 부탁해) 간단히 내 입장에서만 회고해 보자면, 좋았다. 다행히 참여해준 클라이언트들에게 좋은 피드백도 받았고, 우리가 맺는 관계가 달라지고, 적어도 임하는 태도가 다른 게 좋았다. 고마운 일이다!
예상과 달랐던 부분은 모든 프로젝트에서 공통적으로 3~5개월간 프로젝트가 무엇이 될지 이야기하는 데만 썼다는 점이었다. 처음에 1년이라는 기간을 제안했을 땐 한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 생각했지만 서로의 복잡한 맥락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3~5개월도 짧은 시간이라 느껴졌다. 그 시간을 지나는 동안은 우리에게 익숙한 타임라인과 다르다 보니 조급해지기도 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그 시간 끝에 함께 디자인 브리프를 적어나가는 시간은 굉장히 산뜻하고 명확했다. 결과물 자체는 단순하겠지만, 명확한 상과 언어로 동의한 상태에서 시작한 디자인은 꽤 즐겁다. 그 시간을 통과하고 결국 이번에 같이 프로젝트를 하긴 어렵겠다는 결론을 얻은 단체도 있었다. 그 역시도 협업의 조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은 배움이었다. 3~5개월은 아마도 우리에게 필요했던 최소한의 시간 아니었을까.
최소한의 시간이라고 말한 이유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파트너가 시간을 함께 투자할 의지가 있는지, 그 시간을 아깝지 않게 여길 수 있는지가 매우 중요해진다. 이것이 시사하는 또 다른 바는 1년 단위 성과 보고가 필요한 지원금 사업으로 진행할 경우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처음 관계를 맺는다면 지원금 사업은 맞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맞는 기반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충분한 논의를 거쳐 아웃풋에 대한 공동의 상을 먼저 마련한 후 기획안을 작성해 지원금을 따냈다면? 그렇다면 논의가 선행되어야 하는 시간 동안 서로가 버틸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려면 어떻게? 단체 후원자들이 그런 실험의 공간에 후원금이 쓰이는걸 기꺼이 받아들여줄까? 막연한 상상으로 시작했던 우리 앞엔 구체적인 숙제들이 놓였다. 자선과 후원이라는 단어들과 그 한계에 대해 여러 고민을 하게 된 한 해였다. 상호돌봄의 디자인이라는 시도는 결국 자선과 후원의 구조를 재설계하는 일까지 이어져야만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 깨닫는 바도 많았다. 나는 빠른 호흡의 디자인에 꽤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했다. 말로는 느긋하게 꼼꼼하게 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몸은 이미 빠른 호흡에 익숙해져 있어 결론에 빨리 도달하고 한번 도달하면 그 결론을 재고한다거나 되돌아보길 싫어한다. 독단으로 흐르기 쉬운 성향이다. 어떻게 하면 충분히 듣고, 천천히 고민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론 이 질문이 2023년을 위한 숙제로 남았다.
우리가 회의 대신 여유로움을 품고 생각하면 어떤 질문을 할까? 그곳에서 과연 ‘한국에서 가능할까?’라는 질문이 가능할까? 억압이 기능할 수 없는 공간을 만들고 함께 새로운 대안을 상상하고 실현시켜나가자는 변혁정의의 제언은 이렇게 질문의 가정법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디자인에만 적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누가 되었건, 그곳엔 분명 억압의 구조가 작동하고 있을 테고, 나는 당신이 나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그 ‘어떻게’를 상상해주었으면 한다.
진심이다. 나에게 ‘죽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시도를 한다는 건 과장법이 아니다. 종종 사람들은 나를 ‘대단하다'라고 하며 ‘응원한다'라고 말한다. 내가 진짜 응원받는 다고 느낄 땐 나와 같은 싸움을 하는 동료를 만났을 때, 그의 활동을 지켜볼 때, 그리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닮음과 차이를 확인할 때다. 그러니 나를 응원하고 싶다면 나와 함께 움직였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니 방법이 맞니 틀렸니 하면서 쌈박질도 하고 했으면 좋겠다.
무언가 새로운 도전을 하기 좋은 시기가 왔다. 2023년이다. 올해는 아무도 아직 모르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보는 건 어떨까?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곳에서 억압이 작동하지 않는 곳을 만들기를 궁리하기 시작하고 움직여주었으면 좋겠다. 그게 진짜 당신이 나를, 또 내가 당신을 응원하는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