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벌써 삼십 년 전 일이다. 우산 위로 후두둑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비 오는 날 산책을 유난히 좋아했던 스물두 살 때였다.
지난밤부터 내린 빗물 덕에 큰 우산이 필요했던 그날 아침, 어머니는 시내버스를 타고도 한 시간을 가야 하는 곳으로 나를 심부름 보냈다. 마침 여름방학이라서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직 점심때가 되려면 한참 남은 시각에 일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잡아 탈 수 있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밖만 응시하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버스 맨 뒤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말했다.
"학생~, 거기 머리 긴 아가씨 의자 밑에 500원짜리 들어간 거 같은데요~"
아가씨, 오백원... 동전 구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일 거라 생각하고 창밖에 여전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니, 아가씨, 옆에 학생 동전 떨어진 거 안 줄 거예요?"
그제야 나는 머리 긴 아가씨가 나임을 깨달았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화끈거리는 얼굴로 좌석 아래를 살펴보았다. 오백 원짜리 동전을 얼른 주워서 옆에 서있는 고등학생에게 건네주고, 나는 다시 고개를 창문에 쑤셔 박듯이 잽싸게 돌렸다.
정류장에 버스가 설 때마다 사람들이 많이 내려서, 우리 동네 근처로 버스가 들어설 때쯤엔 내가 앉아있는 좌석 앞쪽으로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휴우~공연히 안심을 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집으로 곧장 갈지 청대를 산책하러 올라갈지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오백원은 왜 안주운 거예요?"
버스 안 그 남자 목소리였다. 돌아서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는데, 내 심장이 차분하다. 난생처음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오는데 심장이 두근거리질 않았다.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 남자가 다시 웃으며 물었다.
"학생이세요?"
"네"
"어, 청대에서는 못 봤는데, 그럼 서원대 학생이세요?"
"아니오"
"아, 충청대신가 봐요"
"아니오"
그날 이 남자가 여자에게 질문했던 화법에는 이러한 생각들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걸, 결혼 후 남자에게서 들었다.
남자: '학생같아 보이진 않고 공장에서 일하는 시골 아가씨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예의상 학생이냐고 물어봐야겠다.'
여자가 학생이라고 답하니까, 남자는 다시 생각했다.
남자: '똑똑해 보이질 않으니 대학생이라 하더라도 어디 전문대학생이겠지. 충청(전문)대냐고 먼저 물으면 쫌 모양이 그러니까, 충청대보다 한 단계 위인 서원대냐고 물어보자.'
그런데 여자는 서원대도 충청대도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남자는 잠시 당황했다고 한다. 내가 스카이 학생이라고 대답했어야 한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내가 스카이 정도 다닌다고 했으면, 본인과는 너무 급이 달라서 남자는 그날 포기하고 돌아섰을 텐데, 내가 하필이면 충북대라고 솔직하게 대답한 까닭에, 우리 두 사람 인생은 서로 억울하게 꼬여버린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첫인상을 순둥한 공장 아가씨로 보았을 만큼, 순박한 여성을 본인의 이상형으로 꼽았던 것 같다. 하나에 꽂히면 전후좌우 살필 줄 모르는 그 남자의 성격은, 남들은 그녀에게 말 시키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그 여자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남자는 결혼 후, 여자가 이렇게 골치 아픈 여자였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진술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사기죄로 고소하고 싶을 만큼 억울하단다. 철학책 같은 여자가 동화책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러게 평소에 책 좀 읽어두지 왜 만화방에만 갔었느냐고 나는 대꾸하지 않는다.
여자: '너만 동화책 같은 마누라를 원했겠느냐, 나두 문학책 같은 남편을 원했었다'
(2021년 9월 10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