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한글을 읽은 것은 당시 국민학교 입학 후였을 것이다. 두메산골만큼은 아니어도 인가가 드문 시골 국민학교를 다녔던 남자는, 먼 거리를 빨리 가려고 산을 하나 넘어서 학교를 가곤 했단다. 시골 국민학교에 읽을 책이나 변변히 있었을까 그것도 의문이지만, 이 남자에겐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던 듯 보인다.
국민학교 입학도 하기 전에 글 쓰기까지 집에서 다 익혔던 여자는, 이솝과 안데르센 이름보다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을 더 먼저 알았다. 중소도시 4남매의 막내라는 이유에서였다. 중학생이었던 큰언니는 대단한 독서광이었다. 책장에는 동화책 대신 문학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국민학교엔 도서관이란 공간이 따로 없었던 것 같다. 각 교실마다 비치되어 있는 몇 권의 책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책 읽는 게 아쉬워서 옆집 책을 빌려 읽던 여자는, 방학 때 서울 작은 아버지 집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사촌들 방에는 휘황찬란한 동화책들이 한쪽 벽면을 차지한 책장에 웅장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 남자가 여자를 따라서 버스에서 내린 날, 여자는 청대로 산책을 막 가려던 참이었다. 지난밤부터 아침까지만 해도 무섭게 내리던 빗줄기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남자는 자기를 청대 학생이라고 소개를 하고, 자연스럽게 여자의 꽁무니를 따라 청대 쪽을 향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몇 마디 질문을 던진 뒤, 여자는 남자에게 "저랑은 친구 할 타입이 아니시네요"라고 말했다. 니 갈 길 가라는 정중한 거절이었다.
시골 냇가에서 멱 감고 높은 바위에 올라가서 물속으로 뛰어내리며 야생으로 자라 온 남자 귀에는 여자의 거절이 들리지 않았다.
공강 시간을 때우러 들르곤 했던 만화방 집 만화책 말고, 그 남자가 유일하게 정독한 책은 관상책이었다. 관상책도 그림 반, 글씨 반이니 어찌 보면 만화방에서 읽었던 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본인 말로는, 군 제대 말년에 돈 주고 직접 산 책이었다 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남자의 심경이 읽혀지는 대목일 뿐이다.
그 남자가 관상책을 읽은 것은 좋은 여자를 만나야만 하는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없는 시골 살림에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연로하신 부모님과 수척할 만큼 가난했던 집안 배경은, 그 남자에게 연애와 결혼에 대한 환상 따위를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독신으로 살면서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남자는,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관상책을 독파했단다. 그러다 어느 날 버스 안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순박한 여자를 보게 되었다. 살면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버스에서 내려서 여자의 앞 모습과 걸음걸이를 살피고 음성까지 들은 후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착실하게 관상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기억날 줄은 그 남자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 여자라면 가난하고 누추한 자기를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관상책이 가르쳐준 착한 여자가 바로 그 남자 앞에 서있었다.
(2021년 9월 13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