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되길 거절하는 여자의 의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여자 옆에서 검은색 우산을 크게 펼치며 말했다.
"어, 햇빛이 너무 쎄네요. 제가 시원하게 그늘 만들어 드릴게요."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장대비가 내렸는데, 어느새 하늘에선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7월의 장마철이었다. 남자는 팔을 길게 뻗어 내 머리 위로 우산을 들고 걸었다.
"혹시 이런 시 아세요?"
책을 좋아한다는 여자의 말에 대뜸 그가 물어온다.
"별빛을 살라먹고 별빛을 살라먹고
그 향기 그 힘으로 밤에 피는 너는 야화
무량한 너의 기도 내 맘을 달래주고
화사한 너의 미소 가슴에 남았는데
나 이제 어디로 가나 나 이제 어디로 가나
바람이 부는 대로 오늘도 흩날리며
끝없이 기다리는 밤에 피는 너는 야화"
남자는 우산을 받쳐 들고 걸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시 하나를 읊어댔다.
"시도 좋아하신다면서요, 이거 아주 유명한 시인데, 모르시겠어요?"
남자의 말에 여자는 난감해졌다. 유명한 시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텐데,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남자는 여자에게 이 시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라도 시인을 찾아보라고 한다.
그 남자의 공격적인 대응은 일부 성공한 듯도 보였다. 여자의 두뇌 회로가 이 시의 데이터를 찾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남자는 성당 사람들 얘기로 화제를 옮겨갔다.
"말코형, 치영이형하곤 친하게 지냈어요. 베로니카 누나랑 안젤라 누나와는 가끔 연락도 하고 지내구요~"
남자는 우연하게도 여자가 어린 시절 다녔던 성당엘 작년까지만 해도 자주 나갔다고 했다. 그의 큰 형님이 장로교회 목사님인데, 본인은 천주교 신앙이 좋아서 부득이 학교 앞에 있는 우암교회와 내덕동 성당을 격주로 다녔다고 말한다.
그리고 멀지 않은 훗날 그는 성당과 교회를 오고 갔던 진짜 이유를 밝혔다. 가난한 주머니 사정과는 별개로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대학 4학년 여름, 뚜렷한 인생 목적도 없이 여자는 수녀원을 들어갈까 생각하며 이곳저곳을 알아보고 있던 때였다. 그랬던 여자보다, 교회와 성당을 오고 가며 여자들을 염탐하던 그 남자가 더 옳았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청대를 올라가면 우암산 아래, 명암저수지로 향하는 도로 길이 열린다. 그 당시 그 도로에는 차량 통행이 많지가 않았다. 젊은 연인들이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나 보다. 여자는 허기가 밀려왔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남자는 여전히 우산을 받치고 있다.
"저는 그만 집에 가야겠네요. 점심때가 지난 거 같아요."
전화번호라도 알려달라는 남자의 부탁에,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거라며 여자는 사양을 했다. 남자는 우산을 접고 자꾸만 여자를 따라온다.
남자는 산책을 다녀온 바람에 방학중에 수강하고 있는 일본어 특강시간이 끝났다고 했다. 어차피 오늘은 특강 수업도 공친 하루니, 그냥 여자를 안전하게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여자는 예의를 다해 불편함을 표시한다. 늦은 저녁도 아닌 대낮에 안전하지 않을 리가 없다. 여자는 그녀가 배운 바대로, 사람에 대한 예의에서 그 남자가 산책길을 따라온 것까지는 눈감아 주었다. 그러나 지금 남자의 행동은 지나쳐 보인다.
남자는 여자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일주일 후에 학교 앞에 있는 00 커피숍에서 만나요. 저를 오늘 한번 보고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하지 말고, 일주일 동안 생각해보고 00 커피숍으로 나와주세요. 거기서 다음 주 화요일 오후 3시에 기다리고 있을게요.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계속 기다릴 거예요."
여자는 재빨리 알았다고 대답하며, 집을 향해 돌아섰다.
몇 년 후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남자의 대학 동기가 마이크를 잡고 축가를 불렀다. 어, 저 노래, 시인을 알 수 없었던 작자미상의 그 시였다. 여자는 지금도 가끔씩 라디오에서 우연히라도 저 노래 <야화>가 흘러나오면, 무심결에 채널을 딴 데로 돌리곤 한다.
(2021년 9월 14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