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활 26
며칠 동안 매일같이 시댁과 병원을 오갔던 남편과 달리 나는 단 한 번도 시댁이나 병원으로 찾아뵙지 않았다. 내가 얼굴을 비춰서 마음이 편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험 앞둔 햇님이 신경 안 쓰이게 말하지 말라시던 어머님이나 본인이 아픈 것조차 미안해하시는 아버님, 편찮으신 아버지와 시험을 앞둔 아내 사이에서 정신없는 남편까지. 그리고 나 역시 어떠한 핑계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작년에는 코로나 감염과 리모델링이 아주 좋은 핑계가 되었지만, 올해만큼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인 요인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시험이니까.
집에서 공부하는 동안 집중이 전혀 되지 않았다. 아버님의 건강을 믿고 오랜시간 이어간 수험생활이 후회되었고, 6월에 옆구리 통증으로 응급실에 갔을 때 추가 검사를 더 해달라고 우겼다면 이렇게까지 증상이 심각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도 들었다. 다시 건강하게 걸으실 수 있으실지, 당장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면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집안에 온갖 창문을 다 열어놓아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책상에 앉아 있다가 서서 책을 보다가 거실 테이블에 앉아보기도 하고 무슨 짓을 해도 불안함이 나아지지 않았다. 병원에 있는 남편에게 수시로 연락을 하고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기다렸다.
"암이 맞는 것 같대. 아버지, 어머니한테 어떻게 말씀드리지?"
남편은 어느 정도 결과가 나오면 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놀라실 어머님을 걱정하여 청심원까지 사서 드렸었다. 하지만 막상 말씀드리려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렵게 어머님께 먼저 말씀드렸더니 아버님께서는 모르시게 하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버님은 코로나 PCR 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오자마자 병원에 입원하셨다. 어떤 암인지 정확하게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버님의 몸이 조금만 더 잘 버텨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수술을 해야 하는 고형암이 아닌 약물치료가 가능한 혈액암 이길 빌었다.
입원 다음 날부터 아버님은 하루에도 대여섯 가지 검사를 하셨다. 저녁 즈음에 아버님과 통화를 했는데 어찌나 힘드셨는지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셨다. 2주 정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신 데다가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검사를 받으니 힘드신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담당 의사 선생님이 면담을 잡으셨다. 남편에게 전화로 혈액암이신 것 같으니 면담 후 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명을 해주셨다. 암 관련 검사는 보통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 1~2주 정도 걸린다고 하여 몹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진단이 내려졌고, 그것도 약물치료가 가능한 혈액암이라 하니 희망이 생겼다.
만 60세가 넘으면 혈액암 완치를 목표로 치료하는 것은 어렵다고 한다. 강도 높은 항암치료를 하다가 치료과정에서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물치료와 척추를 누르는 종양에 대한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면 다시 걸으실 수도 있고 통증도 많이 나아지실 수 있다. 단, 항암치료에 대한 몸의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첫 항암치료를 진행하는 한 달간의 경과가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큰 부작용이 없이 몸이 잘 견뎌주면 퇴원 후 통원치료도 가능하다.
의사 선생님은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3개월도 못 버티셨을 것이라 진단했다. 삯아버린 척추 마디의 주변부 뼈에 모두 금이 가있는 상태였고, 신장 기능이 약해져서 향후 신장 투석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한다. 특히 칼륨 수치가 높으셨는데 건강한 일반인의 평균 수치가 10이라면 아버님은 20 정도가 나왔다. 칼륨 수치가 높으면 언제든지 심정지가 올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상태라고 한다. 다행히 입원 후 치료를 하면서 칼륨 수치가 많이 떨어졌고, 항암치료 경과가 좋으면 더 오랜 시간 우리 곁에 함께 계실 수 있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날부터는 밤에 잠 다운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항암치료를 시작하신 그 주 주말에 시험을 무사히 치렀다.
나는 아직도 고향에 모시고 갔던 날의 아버님과 어머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고향은 차를 타고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정도의 거리이지만 교통이 불편한 탓에 아들이 차로 모시고 가지 않으면 갈 엄두를 내기 어려운 곳이다. 도착해서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들렀다가 주변에 문 연 음식점이 없어 유일하게 문을 열었던 중국집에 갔었다. 그리고 금방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오랜 시간 차에 앉아계시는 것이 불편하실 법한데, 아버님과 어머님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셨다.
이후에는 코로나가 터지면서 고향은커녕 가까운 교외 드라이브도 모시고 가지 못했다. 대중교통을 타거나 외식을 하는 것도 피하시고 사람이 많은 곳엔 절대 가지 않으시니, 억지로 어딜 모시고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올해에는 두 분이 큰 맘을 먹고 우리와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하셨었다. 시험이 끝난 후인 9월 말에 2박 3일 일정으로 여행을 계획하고 숙소를 예약했다. 하지만 아버님이 병원에 검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예약을 취소하였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어린 남편을 데리고 유럽도 다녀오시고 해외 여러 곳을 놀러 다니셨지만, 정작 남편이 성인이 된 이후에는 한 번도 함께 여행을 간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남편이 무척 속상할 것 같았다. 남편에게 아버님 퇴원하시고 몸 상태가 더 나아지시면 가까운 교외라도 꼭 모시고 가자고 이야기했다.
코로나로 병원 면회가 불가능하여 시험이 끝난 후에도 아버님을 찾아뵐 수가 없었다. 추석에는 면회가 가능하다고 하여 추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주 화요일 병원으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연락을 받았다. 같은 병실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와 아버님도 검사를 해보니 아버님도 확진이 떴다고 한다. 결국 추석에도 아버님을 뵐 수가 없다. 다행히 지금까지 큰 증상이 없으시지만 앞으로도 무사히 코로나가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우리는 그동안 꾸준하게 운동을 하며 건강하게 삼시 세 끼를 챙겨 드시던 아버님의 노력을 믿어보기로 했다. 분명히 잘 견뎌낼 것이며 한 달 뒤에는 아버님 스스로 걸으실 수 있으실 거라 믿는다.
그리고 얼른 그날이 오길 바란다. "아버님, 저희 드라이브 갈까요?"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그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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