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구슬 Sep 12. 2024

썸 타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3. 황당 그 잡채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고 경력 없는 나를 어느 병원에서 써줄까 걱정이었다.

일자리가 너무 없어 일단 따 놓으면 뭐라도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따놓긴 했는데 취직이 될까 걱정이었다.


흰머리 약국장과 약국일을 그만두고 일주일가량 집에서 쉬면서 주식으로 돈도 벌어보고 코인도 생각보다는 잘 됐지만 정기적으로 출근을 안 하니 마음이 불안했다.

한 손으론 주식창을 보며 사람인 구인공고를 이리저리 살폈다.


집과 가까운 곳에 간호조무사를 뽑는단다.

안될 것 같다는 걱정으로 이력서를 냈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아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와!

나 경력 없어도, 나이 많아도 되는구나!


화장을 이쁘게 하고 면접을 보러 갔다.

낯선 한의원.

생각보다 깨끗하고 젊은 한의사라 놀랐다.

이것저것 물어보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을 잘했고 분위기도 좋았다.

역시나 합격이었다.

병원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만 했었는데 이뤄졌다.





치료실 / 데스크 업무로 나눠져 있는데 나는 치료실에서 근무했다.

10살 어린 입사동기도 있어서 서로 의지하며 재미있게 일했다.

한의원 특성상 베드가 있어서 점심시간이면 다들 밥 먹고 누워 자기 바빴고 나는 그 시간에 블로그며 앱테크며 n잡 활동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대학 졸업 후 면세점에서 일한 경험 때문이었는지 타고난 게 그런 건지 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한의원 환자들에게도 친절하게 대려고 항상 노력했다.

월요일 수요일은 저녁 9시까지 야간진료를 했는데 저녁식사시간이 딱히 있는 게 아니라 항상 배가 고팠다.

돌아가며 빵이나 햄버거를 사 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환자가 많이 오면 마음이 급해서 햄버거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기 때문에 점점 저녁을 패스하는 날이 많아졌다.


단골 환자분들은 종종 먹을 것을 사 오셨는데 피는 기본, 탕수육에 피자 치킨 빵 호두과자 정말 다양하게도 많이 받았다.

친절함의 결과인 거 같아 몹시 기분이 좋았다.




50대 한 남자분이 저녁 먹으면서 야간진료 하냐고 하길래 간단하게 먹고 한다고 얼버무렸더니, 그러면 되냐면서 도미노 피자를 주문해 주셨고 우리는 진짜 맛있게도 먹었다.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 없을 정도.

그분은 그 후에도 노랑통닭이며 뚜레쥬르빵 등 먹을 것을 많이 사다 주셨다.

일주일에 2~3번은 오셨는데 골프로 아팠던 엘보통증이 다 나아서 인지 몇 달간 오시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가량이 지났고 나는 원장님의 권유로 데스크업무를 하게 되었다.

원래 데스크 직원이 2명 있었는데 둘이 싸워서 한 명이 그만두게 되었다는 사실.

어딜 가나 생기는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병원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니 같은 여자로서 좀 부끄러웠다.

하지만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mz 직원과 싸우게 되고....ㅎㅎㅎ





데스크 업무는 생각보다 골치가 아팠다.

돈을 다뤄야 하고 서류도 많았고 신경 쓸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두통약을 먹어가며 인수인계를 받고 나는 센스 있다는 말까지 들으며 데스크 업무에 적응했다.


한번 오신 환자의 이름까지 외웠고 환자가 와서 본인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oo님~ 오셨어요? 하고 아는 체를 하니 굉장히 좋아하셨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예전에 도미노피자 노랑통닭 뚜레쥬르 빵을 자주 사주셨던 50대가량의 그 남자분이 오셨다.

나는 너무 반가웠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고 오랜만에 오셨네요~ 근데 성함이 어떻게 되셨죠~?라고 하니 이정환(가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아 맞아요! 정환 님!! 하며 나는 엄청 반가워했다.

치료를 다 받고 나가시면서


" 아! 배민으로 커피 주문해놨거든예~ 나중에 오면 마시이소!

아 그리고 내 전화번호 바뀌었는데 알려줘야 하나?"


" 네~ 알려주세요~"


나는 변경된 전화번호를 차트에 입력했고 흔하디 흔한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아닌 개인이 운영하는 카페의 아인슈페너가 배달되었다.


"어머! 정환 님 엄청 센스 있으시다!"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은 모두 정환 님이 센스 있다며 엄지척을 해댔고, 아인슈페너도 맛있다며 행복해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환자가 밀려들어 정신이 없던 찰나에 정환 님이 들어오셨다.


아! 그런데 머릿속이 까마득 해지면서 이름이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왜 친구이름도 갑자기 생각 안 나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당황스러웠다.


재빨리 다른 선생님을 불러 저분 이름이 뭐였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고 알려달랬더니

이 선생님도 이리저리 생각해 보다 도저히 생각 안 난다며 어떡하냐고 울상을 지었다.


환자도 많고 더 이상 지체 할 수가 없어


" 아!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셨죠? ㅠ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성함을 여쭤봤다.







"참나! 우리 썸 타는 사이 아니었나?!

나는 일부러 내 바뀐 전화번호도 알려주고 커피도 사다 줬는데!

내 이름을 까먹다니 너무 한 거 아니가!

다시는 이 한의원 안올란다마!"


얼굴에 (나 엄청 진지함)을 쓰며 이런 말을 해대는데 너무 황당했다.

웃으면서 하는 말도 아니고 진짜 리얼 화를 내면서 여자 친구가 자기한테 이름을 물어본다는 식으로 오히려 자기가 더 황당하다는 듯이 쏘아댄다.



마침 옆에 있던 치료실 선생님이

"환자분들이 워낙 많이 오시니까 순간 생각이 안 날 수도 있죠~"

하고 분위기를 바꿔줬다.


나는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컴퓨터를 두두리며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면 안 되겠구나.

친절하게 대했더니 썸 탄다고 생각하는 미친놈이 생기질 않나.


너무 어이가 없어 명우디(명희여고 우정은 디질때까지) 단톡방에 이런 일이 있었다며 욕을 해대니

려원이가

" 야이 새끼야 내 좋다는 사람 줄을 다마! 니는 저기 맨 끝에 서 있으라! 확 마!"

해주지 그랬냐며 내 기분을 풀어줬다.




이혼한 게 티가 나는 건지.

남편이 있든 말든 신경을 안 쓰는 건지.

내가 결혼을 안 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별의별 남자들이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진짜 그 정환이라는 미친놈은 오지 않았다.








상처 받았았면 미안해요

후훗 :)


이전 02화 저는 면접 프리패스상 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