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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성문 Mar 18. 2022

사랑. 네가 제일 나빠

당신은 2017년 2월 25일 서른여덟 해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산소포화도가 낮아지고, 맥박이 느려지고, 혈압이 낮아지면서 수초 내에 병원 안 기계장치들은 당신이 더 이상 나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신장이 나빠져 몇 번의 투석을 했지만 당신의 날씬한 몸매는 통통하게 불어서 당신이 큰 키의 매력적인 여자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을 수 없게 했습니다. 임종 직전에 마지막 힘을 짜내어 한마디를 하는 것은 드라마에서만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고 곧 가족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2017년 2월 25일 01시 20분 000님 사망하셨습니다.' 의사가 사망선고를 내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날 새벽 당신의 차가운 몸을 싣고 나는 전주로 내려왔습니다. 그때 내가 어떤 마음이 었는지, 어떤 상태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라디오에서 많이 들었던 어떤 노래가 흘러나왔다는 것뿐입니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제 엄마는 더 이상 집에 올 수 없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아이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두려움? 그리움? 어른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이제 여덟 살인 두 아이에게 나는 말했습니다.

'애들아~ 서울병원에 있는 엄마 있잖아~ 이제 집에 안 와.' 딸아이가 말했습니다. '왜? 엄마 죽었어?'

두 아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안돼~ 엄마 있어야 돼~'


난 당신의 마지막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그냥 당신이 멀리 여행 간 것처럼 아이들의 마음을 속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나중에 아이들은 엄마의 장례식조차 가지 못하게 했던 아빠를 원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마지막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싫었습니다. 당신의 부재를 기리는 곳에 우리 아이들을 있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제수씨에게 부탁해서 조카들과 함께 아이들을 놀게 했습니다.


난 당신과 살았던 10년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한없이 슬프고 힘든 날도 많았지만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당신이 하반신 마비가 되어 더 이상 걷지 못하는 당신을 휠체어에 태우고 재활병원 옆 커피숍에 갔을 때 난 참 행복했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지금의 고된 현실도 감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은 그 소망마저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2022년, 당신과 이별한 지 5년이 지났습니다. 아빠에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과 엄마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5년 동안 쳐다보지 않았던 블로그 속의 글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


회사까지 걸어서 10분. 운전하면 교통신호 때문에 걷는 것보다 더 늦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어폰을 귀에 끼고 좋아하는 팝송을 들으며 집을 나섰다. 아내의 일터도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 걸어가기 충분했지만 얼마 전 오래된 마티즈를 팔고 새로 자동차를 산 아내는 즐거운 얼굴로 시아버지 시어머니에게 인사하고는 차를 타고 출근했다.

사람이 복을 받으면 얼마만큼 받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다.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남들이 로또라고 부르는 교사 아내를 집에 모시고 있으며,  아들 딸 쌍둥이를 키우고 있고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아내는 시부모님들과 사이가 좋아 시어머니를 친엄마처럼 따르고, 시아버지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아내는 정말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진심은 통하는 법이라 부모님은 며느리를 딸처럼 예뻐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가끔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 얼굴 어디에 복 붙어 있는 거야?' 분명 아버지에게도 그때가 아버지 인생의 화양연화였을 것이다.


결혼 전 우리 부부는 생활 수준이 비슷했다. 지방에서 가장 싼 축에 들어가는 세동 짜리 소형 아파트에서 각자 살고 있었다.(물론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지는 맞선 장소에서 알았다) 5살 차이가 나는 우리 부부를 소개해준 분은 우리 삼촌부부와 아내가 다니던 교회의 사모님이었다.


처음 아내를 만난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아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가지지 못한 것에도 부끄럼이 없고 하늘이 주신 것에 감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사는 서민 아파트가 창피했었다. 전체 세동 모두가 24평으로 이루어진 우리 아파트는 입지도 좋지 못해 동일평수 시세의 거의 반값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 아파트에 사는 것을 감사해했다. 처음 보는 여자의 순수함에 앞도 되어 나는 결혼이라는 것에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아내를 만날 당시 여자 친구가 있었던 나는(삼촌에게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나간 맞선 자리였다)  SNS를 통해 여자 친구가 있는 것이 들통났고 우리의 만남은 흐지부지 되었다. 나는 사귀던 여자 친구와 이별을 했다. 물론 그 친구도 나에게는 과분한 정말 예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아내와의 첫 만남에서 받은 충격으로 나는 결혼할 사람의 이상형이 바뀌어 버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친구에게는 너무 미안하다.


몇 달 후 교회 목사님이 아내를 만나 나를 만나볼 것을 권유하셨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아내는 우리 교회 목사님을 처음 만나고 이런 분이 보증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겠다 싶어 나를 다시 만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사귄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구체적으로 계획했다. 그리고 2006년 10월 결혼했다.


우리의 첫 보금자리는 내가 창피하게 생각한 바로 그 아파트의 우리 집과 아내의 집 중간동으로 정했다. 101동은 아버지 집, 102동은 우리 집, 103동은 장인 어른댁인 것이다. 시세가 4천이 안 되는 24평짜리 아파트에서 우리의 신혼살림은 시작되었다. 이유는 내가 가진돈이 없어서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풍족하게 시작하지 못한 신혼이지만 신혼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아내는 요리에도 소질이 있어서 퇴근하고 오면 오늘 저녁 메뉴는 무얼까 항상 설레었다.  아내는 거의 매일 다른 메뉴로 저녁을 만들었고 나는 누구보다 맛있게 먹었다. 결혼이란 이런 거구나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생각했다.


결혼 후 교회의 몇몇 신혼가정에 아이가 생겼다. 하지만 결혼한 지 반년이 지나도록 아내에게는 임신 소식이 없었다. 불안했는지 아내는 산부인과에 다녔다. 배란 유도 주사를 맞고 임신을 하게 되고 당황스럽게도 쌍둥이를 임신했다. 나중에 사람들에게 쌍둥이가 자연임신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질문인데도 우리는 자격지심을 느끼며 자연임신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임신 후 휴직기간 아내는 미싱과 집안 인테리어에 빠졌다. 베개, 침대포, 식탁보 천으로 되어있는 것은 온통 나풀거리는 프릴로 가득했다. 작은 베란다와 현관문에는 어닝을 만들어 달고. 손바닥만 한 주방에는 창문이 있는 작은 가벽을 만들었다. 정말 어이가 없었던 것은 주방 창문 사이로 아이들에게 "밥 먹자~"라는 말을 해보는 것이 로망이었던 아내는 작은 소리도 다 들리는 작은집 주방에 주방 창문을 설치했다는 거다. 집 꾸미기에 혈안이 된 아내 덕분에 나는 주말마다 시트지를 붙이느라 휴일을 온통 다 써버렸다. 쌍둥이를 임신한 탓에 임신 막바지에는 배가 너무 커서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는데도 아내는 드르륵드르륵 밤새 미싱을 돌리고 집안을 꾸몄다. 지금 생각하면 핑크빛으로 채워진 정말 촌스러운 신혼집이었지만, 그때가 나와 아내의 최고의 순간이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던 것 같다.


쌍둥이가 태어나던 날(2008년 1월 2일) 아내는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아이들을 출산했다. 남자아이 얼굴은 반듯했고, 여자아이 얼굴은 넙죽했다. 아이들은 일분 간격으로 세상에 나왔다. 아들 딸이 순서대로 나올 때마다 함께 모여있던 가족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지금도 그날을 기록한 동영상이 어딘가에 있다. 제왕절개 수술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는 3일 동안 음식도 물도 마실 수 없었다. 상처가 벌어져 아프고 많이 목마르고 배고팠을 텐데,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출산휴가를 받아 산후조리원에서 만화책을 읽고 맛있는 것을 시켜먹으며 10일 동안 아내를 간접 고문했다.


산후조리원을 나와 3킬로가 채 안 되는 두 아이를 조심히 안고 집으로 향했다. 쌍둥이를 키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맞벌이였던 우리 부부는 시어머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바로 옆 동에 살고 있는 우리 엄마는 우리 집으로 매일 출근하면서 24시간 쌍둥이를 돌보았다. 그때 엄마는 아이들 돌보는 것이 너무 힘들어 밤이 오는 게 두려워 울었다고 하셨다. 쌍둥이 키우는 문제로 급기야 어머니 집과의 합가를 논의하게 되었다. 현명하신 장인 장모님은 딸이 시부모와 함께 사는 문제인데도 좋은 생각이라며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우리 집과 어머니 집을 합친 돈 약 8천만 원과 무리한 대출을 통해,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것 같은 45평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젊었고, 직장은 안정되었으며, 좋은 부모님과. 예쁜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대략 6년을 살았는데, 그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갔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이었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사실 그때의 기억이 별로 없다. 회사생활이 바빴고, 육아도 힘들었다. 하지만 고된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사랑하는 가족들이 나를 반겨주었고,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서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신자였던 우리는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다. 우리 만남을 다시 이어 주신 목사님과 함께 교회 소그룹 모임에서도 열심히 활동했다. 아내의 신앙이 나보다 훨씬 좋아서 나는 늘 아내를 따라가기 바빴다. 신앙적 측면에서 아내는 시어머니를 존경했고 잘 따랐다. 나를 따라서 교회를 옮긴 아내는 어느샌가 교회에서 제일 예쁨 받는 사람 중 하나가 되어있었다. 교회일이라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장서서 일했던 아내와 나를, 사람들은 축복해 주었고 신의 축복에 산 증인처럼 행복한 가정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행복을 미리 당겨 써버린 자들의 시간


2015년 5월 26일 아내의 목 부위가 불룩해졌다. 걱정을 하는 아내에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동네 병원을 가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퇴근 무렵 울면서 전화하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이비인후과에 왔는데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를 찍어보고는 암인 것 같다면서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믿기지도 않고, 작은 병원에서 항상 있는 오진일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에 안심을 위해 아내를 데리고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대학병원에서 한참 대기한 후에 피검사, 엑스레이, CT를 찍었다. 정신없이 바쁜 병원은 그 후로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나는 무서워하는 아내를 위로하며 기도했다. 별문제가 아니기를 내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퇴원하기를 기도했다. 아내는 응급실 침대에서 자고, 나는 침대에 엎드려 잠깐 눈을 붙였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새벽 3시 응급실 레지던트가 보호자를 호출했다. 그는 CT를 찍은 결과를 보여주며 나에게 말했다. CT 사진에는 아내의 흉부가 있었고 뭔지 모를 하얀 것이 아내의 장기를 뒤덮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담담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장기이고 이것이 암덩어리다. 암덩이가 흉부에 너무 많이 퍼져있고 혈관에도 쪄들어 있어서 수술을 할 수도 없다. 흉선종인 것 같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CT의 사진만 보면 아내는 며칠을 살 수도 없을 것처럼 보였다. 눈앞에 아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직 엄마를 잃기에는 너무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아이들과 이별해야 하는 불쌍한 엄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핸드폰의 배경화면 속 가족사진에서 아내가 사라질 수 있다는 끔찍한 상상이 나를 미치게 했다. 나는 아내에게 대충 둘러대고는 그렇게 응급실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입원을 위해 필요한 물건들을 집에서 가져오기 위해서 아내를 두고 잠깐 집에 다녀왔다. 나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악몽을 꾸고 나면 그것이 꿈인 것에 안심하고 깨곤 한다. 나는 어쩌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생생한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나의 뺨을 있는 힘껏 때려보았다. 하지만 깨지 않았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것이 진짜일리가 없는데... 두려움으로 나의 심장은 두근두근 방망이질 쳤다.


대학병원 병실 밖으로 우리 교회가 보였다. 초록색 지붕인 우리 교회를 보면서 1년 전 백혈병으로 천국에 간 교회형이 생각이 났다. 교회형은 창밖으로 교회를 보면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아니었나 보다. 아내는 교회형과 똑같이 자신도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워했던 것 같다. 아내는 창밖에 교회를 쳐다보지 않았다. 똑같은 신세가 되어 병실에 누어 교회를 바라보는 자신이 너무 싫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느냐, 아니면 서울에 큰 병원으로 전원을 가느냐다. 장인어른과 처남까지 모두 모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논했다. 그리고 처남 지인의 소개로 서울병원으로 전원을 가기로 확정했다. 이틀을 대학병원에서 보낸 후 아내를 데리고 서울병원으로 올라갔다. 마치 피란민처럼 보따리에 바리바리 물건들을 싸들고 우리는 서울로 상경했다. 건물의 웅장함과 많은 인파 때문에 서울병원은 지방 대학병원을 동네병원처럼 보이게 했다. 초행길에 어수룩함으로 긴 본관과 별관 복도를 지나 암병동에 도착했다. 흉부외과 교수님은, 거의 3,4분 단위로 진료일정이 잡혀있었다. 아마도 저 빽빽한 오전 진료 일정 가운데 아내의 진료시간을 끼어들어가게 했을 것이었다. 평소 사람들 앞에서 말하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장인어른조차 질문 하나 할 수 없게 만들었던 엄청난 포스의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교수님은 우리가 가져온 CT를 쭉 보시더니 대학병원에서 진단했던 흉선종이란 말 대신 림프종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림프종 치료에 권위를 가진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의 진료 일정을 잡아주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난 그때 교수님이 말하는 동안 부들 푸들 떨고 있었다고 한다. 림프종을 갑상선암 사촌쯤으로 생각했던 우리는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이런 마음에 평안도 잠시였다. 일산 작은아버지 집에 들어가서 림프종에 대해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혈액암이다. 백혈병과는 조금 다르지만 무서운 암이다. 거기다 아내의 증상으로 볼 때 분명 그중에서도 좋지 못한 종류다. 다시 불안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진료 후 나는 아내가 며칠 안에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두렵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해 TV를 봤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가 답답해하는 것 같아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산책로를 걷다가 동네 아이들 소리에 우리 아이들이 생각이 날까 봐 놀이 터전까지의 짧은 산책로만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다. 쌍둥이를 위해 힘내야 한다는 나의 말에 아내는 머리로는 수긍하면서도 두려워했고 힘들어했다. 그것은 아내를 위로했던 나도 똑같았다. 그렇게 두려움 속에 길고 긴 하루가 지나갔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의 시작일 뿐이었다.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의 간단한 진료 후 정확한 진단을 위한 많은 검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응급실에 들어가 대기하면서 피검사, 방사선 검사, 초음파 검사, 이비인후과 진료, 복부 CT 검사, FET CT 검사, 골수검사, 조직검사 등 수많은 검사가 응급실에서 진행되었다. 신기한 사실은 응급실의 운영방식이었다. 난 지금까지 환자에게 누울 침대를 주지 않는 응급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여긴 그랬다. 아무리 많이 아픈 환자도 의식이 있다면 앉아 있어야 했다. 환자를 위한 침대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암에 걸린 내 아내는 주렁주렁 수액을 손목에 꼽고 앉아 있어야 했다. 다리라도 쭉 뻗게 할 요랑으로 휠체어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의자를 비틀어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톰 행크스가 주연했던 터미널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밀폐된 공간에서 나갈 수도 없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자들의 적응이 시작되었다. 난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자를 붙여 불편한 의자 침대를 만들어 주는 것밖에 난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힘들고 지친 아내에게 힘내란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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