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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Jun 23. 2021

기대하지 않는 마음으로 #2


(1에 이어서)


나는 점점 내 취향을 모르겠는데, 남들은 점점 선명하다고 얘기해준다. 좋아하는 노래를 추천했더니 그 가사에서 내 글이 떠오른다며 나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던지, 자주 가는 카페를 알려 줬더니 나도 없는 그 공간에서 내 느낌이 난다는 얘기 같은 것들. 나도 모르는 내 취향이란 게 있는 걸까.


과거엔 어떤 말이나 눈에 보이는 것들로 나를 정의했고, 그 프레임 안에서 내 행동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다지 그럴만한 것이 없다. 외부의 어떤 것에 취향을 고정시키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상태는 안다. 어쩌면 그렇게 선택한 하나하나가 나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지도 모르고, 어디에 있든 나이기만 하면 된다.


오늘 집에 돌아오려는데 스마트폰 배터리가 10%밖에 남지 않은 걸 알았다. 느긋하게 음악을 들으며 가고 싶었는데, 마음이 조급 해지는 숫자였다. 순간 눈앞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충전하며 갖고 있는 책을 잠시 읽기로 했다. 실제로 합리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은 납득한 결정이었다. 시간은 9시 15분, 카페의 문 닫는 시간은 모두 알다시피 10시, 나는 마지막 손님이었다.


43%, 9시 48분. 굳이 지금 나갈 필요는 없었지만, 이 정도면 집에 가는 동안 충분할 것 같으니 일어나기로 했다. 아직 10여분이 남았지만 나만 남은 카페에서 마감을 기다리고 있을 직원에게 그 10분을 건네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애타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쥐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나와서 잠시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 10분을 건네주고 나오자 내게는 다른 10분이 생겼다. 10시가 정해진 시간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때까지 잠시 아무 방향으로나 걸으며 길을 잃어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후와 저녁 바람이 다정해서, 어디에 나를 맡겨도 괜찮을 것 같은 날들이다.


집으로 가는 길과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알던 길로 되돌아왔다. 지하로 내려와 개찰구를 통과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걷는 길이지만 같이 걷던 사람들이 없으니 또 다른 길처럼 느껴졌다. 혼자 플랫폼에 서서 낮에 했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표지판이 있는 길을 따라 걷지만 표지판을 백 퍼센트 믿진 않는다. 사람들이 가는 방향이라고 꼭 따르지도 않는다. 그 사이에서 나를 이끄는 누군가의 다정한 손이 행복을 확약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때로는 알면서 손을 잡아 본다. 어쩌면 괜찮은 곳에 이를지도 모르고, 실패한다 해도 다시 혼자 걸을 수 있으므로. 그런 날의 나를 위해 약간의 여유를 남겨둔다.


기대하지 않는 것이 체념이나 포기는 아니다. 너무 들뜨지 않은 채로 지속하는 것, 순간의 우연과 가능성에 좀 더 나를 맡겨보는 것에 가깝다.


혼자 있으며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을 때에야 속에서 나타나는 생각들이 있다. 오늘은 일정과 일정 사이 걸으며, 그리고 늦은 밤에 또 한 정거장 일찍 내려서 걸으며 이렇게 긴 생각들을 했다. 그리고 작업을 마친 새벽에 두서없는 일기를 유난히 길게 쓴다. 심지어 두 편에 걸쳐.


짙은 어두움, 아무도 없는 거리, 낭만적이지 못한 어른 몇 명, 에드워드 호퍼의 장면이 생각나는 밤이다. 하지만 그 무표정한 풍경 아래 밤을 버티며 내일을 받아들이는 긍정을, 밤이 지나면 뜨고야 마는 해를 알기 때문에, 이 그림들은 최소한 내게는 쓸쓸한 장면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괜찮다. 다만, 시간이 급해 먼저 떠나는 친구를, 함께 걷다가 갑자기 온 버스로 뛰어간 친구를, 헤어지기 전에 안아 주지 못해 조금 아쉽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다음이 또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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