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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Jun 23. 2021

기대하지 않는 마음으로 #1

요즈음 만나는 친구마다, 어쩌다 보니 쌓인 연차 탓에 무언가 책임지는 위치가 되어 버려 힘들다고 한다. 팀원들과 달리 그들이 철인이 아닌 걸 잘 아는 나는 그 상황이 우습기도 안쓰럽기도 하다.


그래도 다들 괜찮다고 한다. 뭐랄까, 안 괜찮은데 또 괜찮은 그런 마음! 힘들지만 버텨낼 자신에 대한 신뢰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 정말로 괜찮아진다는 것도 알고, 또 이미 그렇게 괜찮아진 과거의 일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사건의 미래도 괜찮을 것을 안다. 그래서 그 미래에 확실히 존재할 ‘괜찮은 마음’을 가져와 오늘을 산다.


물론 현재에는 늘 폭풍이 인다. 속상하고 밉고 눈물 나는 걸 참고 외면할 필욘 없다. 하지만 그게 나를 크게 해치는 일이 아니라면 대체로 다음 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런 확신은 오늘의 괜찮지 않음도 괜찮음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그런 척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은 거다. 오늘 이 '괜찮음'을 얘기했을 때 나의 오랜 친구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단번에 이해했다. 다들 그렇게 괜찮으므로.


우리는 괜찮은 한편 믿지 않는 게 많아졌다. 쉽게 기대하고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남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다고 하자, 친구들은 이 말도 단번에 이해했다. 우리는, 나를 전부 책임져 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나를 돌볼 수 있는 건 나 하나다. 그 사실을 알고 자기 스스로를 책임지는 사람, 또 각자 자신을 건사할 시간이 필요할 때 묵묵히 기다려줄 줄 아는 상대면 충분히 사랑할만하다. 다 책임지고 이해하고 품어 준다는 말을 믿고 타인에게 나를 기대는 것보다는 그런 신뢰가 오히려 현실적이다.


<몽 카페>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기다림은 언제든 나를 해칠 수 있다. 그러니 인생에서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 에스프레소 한 잔을 다 마셔도 오지 않는 사람은 결국 오지 않을 사람이라 생각한다. '금방 갈게'라는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기다림을 없애는 방법은 약속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들이 체념이라 생각지 않았다. "내가 믿는 것은 약속이 아닌 우연이다... 기다림 없이 그저 우연히 만난 모든 것을 반갑게 맞이하고 싶다."라는 뒷부분 때문이었다. 게다가 작가는, 이번 사랑은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 품는다.


희망은 확신보다 작아 보인다. 하지만 성공의 확신에 가득 찼다 실패를 반복해본 사람이 우연을 맞이하는 유연한 긍정, 살짝 열어 둔 틈으로 희망이 들어오게 내버려 두는 용기를 갖추는 건 분명 순진한 확신보다 더 크다.


최근 자주 듣는 노래 < 아주 오래 사랑하게   같아>에서는 "너라면 다 알고도 한 번 더 믿어보고 싶어 져."라고 한다. 나와 친구들도, 언제든 변할 수 있단 걸 알지만 지금을 믿어보고,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지속한다. 순진한 확신은 없는 대신, 나 스스로 지키는 삶과 거기서 기능하는 우연과 희망을 믿기 때문이다.


이 낭만적이지 못한 30대들에겐 내일이 없을 듯 몸을 던지고, 타인과 행복을 쉽게 믿고 영원에 확신을 갖는 친구들이 조금 위태로워 보인다. 내일과 다음은 꼭 오기 때문에 나를 위한 무언가를 남겨둬야 하며, 뭐든 언제든 변할 수 있기에 너무 확약할 필요는 없고, 그렇지만 모든 걸 끝내고 다 잃어도 생각보다 금방 괜찮다는 것, 이 부정은 긍정의 반대가 아니라 말해주고 싶지만 오해를 살 수 있기에 그저 말을 아낀다며 웃었다.


하지만 이런 우리도 내일을 기대한다.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했던 20대로 굳이 돌아가고 싶지 않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게 살아내는 오늘을 사랑하고, 그렇게 만든 모양이 100%는 아니라도 꽤 만족스럽다. 보석으로 치자면 여기저기 흠집이 있는 상태지만 그 흠집들이 만든 빛의 굴절이 완벽하게 매끈한 표면보다 더 다채로운 빛을 낸다. 그런 식으로 또 달라질 40대가 기대된다. 결과나 타인에 대한 막연한 기대 보단 그곳에 있을 자신에 대한 확신에 가깝다.


쉽게 기대하거나 기다리는 낭만 따위 없는, 그러나 다 알면서도 타인을 믿어보고 미래를 긍정하고 사랑을 지속하는 친구들이 좋다. 자신의 오늘이 단단해서 가능한 일이다. 친구는 그런 날들을 사는 동안 내 글이 위로가 된다고 했다. 스스로 용기를 얻으려 쓰는 이런 글이 내 친구에게도 힘이 된다니, 그게 무엇보다 큰 용기가 되었다. 기쁨만이 아니라 용기와 위로도 나누면 두 배가 된다. 그런 것에는 쉽게 기대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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