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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Jun 12. 2021

물러서야 보이는 것들

미팅은 15분 만에 끝났고, 이후 대표님의 웹소설 얘길 한참 들었다. 나는 남주가 우영미를 입은 것까진 좋은데, 19살짜리 여주가 우영미를 이승철, 윤상이 입는 브랜드로 안다는 내용은 핍진성이 부족한 거 같다며 깔깔 웃었다.


눈을 반짝이며 비건 뱀파이어 얘기를 하는, 13년째 나를 믿고 지면을 내주는 이분과 일할 수 있어 좋다. 나와 의견이 달랐던 이번 기사를 한 치의 논조 변화 없이 실어준 것도, 단 5분 브리핑에 다음 달 주제를 오케이 해주신 것도 고마웠다. 지난달 원고를 마감하고도 생각했지만, 나는 여기 글을 쓰는 게 좋다. 매번 과제하는 기분으로 자료조사와 고민 한바탕을 마치고 글을 쓰지만, 그 시간이 나를 키워주었던 걸, 지금도 키우고 있는 걸 안다. 지난달 원고를 쓰며 속상했던 마음이 무색할 만큼.


오후엔 꼭 손글씨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오랜만에 편지를 썼다. 저녁에는 늘 잘하고 있는 내 친구를 더 잘하지 못한다고 혼낸 상사를... 정확히는 욕먹게 만든 팀원을 같이 욕해줬고, 밤에는 다른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되레 고맙다는 말을 돌려받았다. 또 갑자기 있는 그대로 충분한 사람이라는 말도 선물 받았다. 바로 지난주만 해도 마음이 황무지였는데, 잠시 멈추고 나를 생각하자 이렇게 금방 여유가 난다. 알면서도 매번 이걸 못해서 스스로 고비를 만든다.


운동하고 돌아오는 길엔 잠시 걸었다. 원래 환승 후 한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데, 고작 2km라서 배차 간격이 길면 그냥 걷는다. 핑계를 대지만 사실 걷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두어 시간의 운동으로 몸을 써서 마음까지 비운 상태, 그 빈자리에 찾아온 평온을 가만히 느끼며 걷는 시간이 좋다. 몸을 써서 에너지를 쏟아내야 마음이 비워지고, 비워야 평소에 놓친 생각을 넣을 자리가 생긴다. 나는 주로 그 시간에 나를, 내 마음을 생각하는데, 그러고 나면 이상하게도 다시 맑은 에너지가 솟아난다. 몸을 비워내자 다시 마음이 채워지고 그 에너지로 다시 몸을 움직이는 순환의 과정. 몸과 마음의 관계는 이토록 신기하다.


밤공기에 벌써 라일락향이 묻어난다. 낮에 보는 신록도 좋지만, 가로등 불빛 아래 빛나는 밤의 초록도 좋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봄밤이다. 잡다하고 불필요한 것들이 어둠에 가려지고 중요한 것이 돋보인다. 의외로 모든 게 선명해지는 이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게 좋다. 누군가와 함께도 좋지만, 그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생각하며 오롯이 그리워하는 시간이다. 혼자 걷는 길에, 마음에 떠오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렇게 선명해진 마음은 다른 날 자연스레 드러난다. 굳이 바로 전하지 않아도 괜찮다.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잇>에서, 엘리자베스와 제레미는 이미 서로에게 위로받으며 마음을 열었지만, 잠시 떨어진 뒤에야 그 마음을 또렷이 알아챈다. 스크린 밖에서 관전하던 내겐 보였던 감정이,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던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단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다. 그림도 계속 가까이 앉아 그리기만 하면 전체적인 형태를 놓치기 때문에, 수시로 일어서 몇 발짝 뒤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러면 가까이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마음도 그렇다. 때로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야 더 또렷이 보이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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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초급 한국어>에선 '안녕하세요'를 'Are you in peace?'라고 번역하는데, 학생들은 '평안하냐'는 말이 스타워즈의 요다나 쓸 법하다고 웃는다. 나도 괜히 '안녕하세요'란 뻔한 말을 다시 소리 내어 발음해봤다. 조금 낯설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등, 서로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담긴 말이지만 자주 쓰며 그 의미가 무뎌졌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언어로 바꾸자, 본질은 같지만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 그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아, 나는 이 말을 건네며 매번 당신의 안녕을 바라 왔구나, 혹은 좀 더 바랐어야 했구나-라고. 그러니까 이런 사소한 말조차도 잠시 떨어져 낯설게 볼 때 진짜 마음이 드러난다.


밤에 잠시 걷는 그 시간이 내겐, 모든 것에서 한 발짝 물러서 생각하는 시간이다. 내가 며칠 동안 가졌지만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덮어 버린 마음들을 그제야 제대로 바라본다. 그런 밤에는 뭐든 예뻐 보인다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내 마음이 선명해지고 나면,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갈 힘이 가슴속에서 둥실 떠오른다. 내일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 또한 일주일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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