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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이 AI 쓰지 말래요.

나 만의 언어를 지키는 것이 결국 앞으로의 사명이 될지도 모른다

by howwtokk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 일에는 AI라는 게 없었다.
보고서는 손으로 정리했고, 자료를 찾으려면 현장으로 갔다.

교수님 사무실에 찾아가 몇 시간을 기다린다.

인터뷰 취재하려고 약속을 잡고 기다린다.


어느 날은 아무 소득도 없던 날도 있었다.

그렇게 얻은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적고. 적고. 적고 또 적었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AI가 생겼다. 처음엔 신기했다.

질문 몇 개 던지면 깔끔하게 정리된 리포트가 나오고,
복잡한 문장을 던져도 말끔하게 다듬어 줬다.


심지어 영상이나 그림까지 뚝딱뚝딱 만들어냈다.

“이걸 안 쓸 이유가 있나?” 싶었다.


입사 후 나는 더 적극적으로 AI를 붙잡았다.

회의 준비도, 기획안도, MVP 아이디어 컨셉안도

AI를 활용하면 시간이 반으로 줄었다.


사람들은 나를 ‘AI 기획자’라고 불렀다.

처음엔 그 말이 꽤 괜찮게 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이 내 기획안을 보더니 말했다.
“이거, AI 쓰지 말고 다시 써.” 순간 머리가 띵 했다.


내가 보기엔 문제없었으니까.

흐름도 괜찮고, 기능 설명도 다 들어갔고, 구조도 매끄러웠다.

근데 팀장님은 딱 한 줄을 가리켰다.

“이거 너가 쓴거 아니잖아.”


그 말이 좀 아프게 꽂혔다. 듣고 나서도 며칠은 마음이 복잡했다.

아니? 처음엔 솔직히 억울했다. 겨우 그 한 줄로 그렇다고?


“이게 뭐가 어때서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근데 며칠 뒤 다시 기획안을 열어봤을 때,


쪽팔렸다.


그 문장은 내가 쓴 게 아니었다. AI가 늘 써주던 말투였고,

나는 그걸 너무 많이 써서 내 말인 줄 알고 내밀었던 거다.


빠른 결과물에 취해 있었다.

빨리 만든 게 잘 만든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다.


나는 지금도 AI를 쓴다. 리서치할 때, 프로토타입 영상 뽑을 때,

멀티모달 모델이랑 Agent 설계 실험을 할 때도. AI는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엔 내 말로 정리하려 한다.



기획자는 결국 말과 글로 설득하는 사람이다.



내가 직접 쓴 문장이 아니면, 아무리 반짝여도 힘을 잃는다.

그래서 요즘 나는 기획안을 쓰다가도 한 번 멈춘다.

“이 문장은 진짜 내 말일까? 아니면 그냥 익숙한 패턴일까?”

스스로 한번 더 확인하는 거다.


그 과정이 번거롭고 시간이 더 걸려도,

결국 그게 내 기획안의 무게를 만든다고 믿는다.


투박해도 좋다. 어쩌면 그게 내 색깔일지도 모르니까.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진짜 기획자인가?

아니면 그냥 AI가 써준 글 위에 이름만 얹는 사람인가?


그리고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의 언어는 어떠한가.


아직도 반짝이는 가,

아니면 이미 AI가 써 준 문장에 무뎌져 있나?


내 언어를 지키는 게
결국 우리의 무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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