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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알 Mar 21. 2024

신호

참는 게 정답이 아니야

"신호를 왜 무시하세요."


아파서 대꾸할 힘도 없는 나에게 처음 보는 그는 말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 표정을 다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감정은 조금도 남김없이 완벽하게 소거된 듯한 차가운 목소리와 눈빛은 상대를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하게 여기고 있는지 느끼게 하는 데 충분했다.


"경추 사이사이에는 이렇게 말랑말랑한 젤리 같은 게 있는데 추간판이라고 해요. 흔히들 디스크라고 부르는데요.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추간판이 삐져나온 상태, 즉 파열되어서 터져 나온 상태를 디스크가 터졌다고 하죠.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환자분도 추간판이 제자리를 이탈했어요. 여기 5번, 6번 사이의 디스크 모양을 보세요. 젤리 같은 게 다른 곳과 달리 흘러나온 것 같죠? 디스크가 터져서 신경을 누르고 있는 상태예요."


".... 아.... 네..."


의사가 가리키는 모니터 속의 뼈 사진은 엉망이었다. 거북목도 모자라 곡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뻣뻣한 목. 경추 사이사이 젤리처럼 말캉한 물질은 안쓰러울 정도로 납작한 상태였다. 5번 6번 사이에 있는 디스크는 펑크 난 타이어처럼 무너져 있었다. 다른 곳들 역시 정상적인 경추의 사진과 비교하니 참담한 모양이었다. 정상적이라... 의사는 이상적인 경추의 모양이라며 내 MRI 사진과 다른 사진을 비교하며 설명했다.


"이 정도면 많이 저리고 아팠을 텐데, 치료는 받으셨나요?"


"아니요. 책상에 오래 앉아 일하는 직업이다 보니, 이따금씩 찾아오는 통증인 줄 알았어요. 워낙 허리가 좋지 않아서 잊을만하면 통증으로 고생하는데, 이러다 말겠지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앉는 것도 눕는 것도 쉽지 않고, 통증을 참을 수 없어서..."


"신호를 안 읽으셨네요."


그랬다. 한국에 돌아와 업무에 복귀하고 난 다시 몇 년 전의 습관을 몸에 입히고 말았다. 12시간에 가깝게 의자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몸을 돌보지 않았다. 허리가 뻐근하면 병원에서 지어준 진통제와 근육이완제를 먹고 버텼다. 약이란 건 무섭고 신통했다. 약물이 몸에 퍼지면 설명할 수 없이 아팠던 몸이 서서히 움직일 만했다. 그래서 이번 통증도 시간이 약이겠거니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의 요통을 일 년에 한 번씩은 치러왔던 터라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수년째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척추질환의 또 하나의 증세라고만 생각했다.


손목과 팔이 저리고 시큰거리기 시작하면 작은 파스를 양팔의 마디마디에 붙였다. 차가운 파스가 살갗에 닿으면 끔찍한 저림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짧은 팔로 날개뼈 주위를 주물러 보기도 했다. 잠을 잘 못 잔 걸까. 어깨와 등, 팔이 무너질 듯 결리고 아팠다. 반듯이 앉아있는 건 물론이고 누워 있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상했다. 근육이완제를 먹어도 낫지 않고, 날개뼈 주변의 통증이 시작되면 절로 눈물이 났다. 그러던 1월 18일. 몇 주째 지속된 팔의 저림 증상이 이젠 손 끝까지 전해졌다.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듯한 팔의 감각과 통증에 불길했다. 사무실에 앉아서 책상에 엎드릴 수도, 누울 수도 없는 어정쩡한 자세로 신음소리만 냈다. 결국 조퇴를 하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디스크가 터진 것도 문제인데, 더 심각한 건 1번 2번 사이예요. 여기 사진 보이세요? 이게 환자분 MRI인데, 참! 아까 MRI 촬영을 좀 오래 하셨을 텐데요. 조금 의심스러운 점이 엑스레이 검사결과 발견돼서 제가 MRI로 특정 부위를 더 자세하게 찍어보라고 요청했던 건데요. 쉽게 말씀드리면 1,2번 경추가 매우 불안해요."


"불안이요?"


"네, 불안정증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데, 터진 디스크보다 사실 1,2번 경추 상태가 더 심각하고 위험해요. 지금은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지 않지만 1,2번 경추 상태가 더 악화되면 팔다리 마비가 될 수도 있어요. 여긴 내시경술 같은 수술로는 불가하고 뼈와 뼈 사이에 지지할 수 있는 인공뼈를 박는 수술을 해야 합니다."


"사지 마비요? 그리고 수술... 이요? 근데 원인이 뭐죠?"


놀라서 목소리까지 떨리는 나와 달리 의사는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 상황에서는 원인이 뭔지 파악하기 어려운데요. 원인을 알 수 없는데, 류머티즘관절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 큰 사고를 당하신 적 있으세요?"


"아니요. 최근에는 없는데... 아주 어렸을 때 교통사고를 당해서 한동안 목이 불편했던 적은 있어요."


"그때는 모르고 지나쳤지만, 몸 어느 곳이든 수명이라는 게 있으니, 나이가 들어 몸이 노화되면 약한 부분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구요. 일단은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할 말을 잃었다. 팔다리 마비. 수술. 병원 로비에 설치된 TV 모니터에서 반복적으로 상영되던 여러 가지 수술법 소개 영상이 떠올랐다. 끔찍해서 질끈 고개를 감고 바로 보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내가 저 영상 속 모자이크 처리가 된 누군가처럼 수술대 위에 엎드려 눕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이상적인 C커브를 잃고 일자목이 된 젊은 층이 많다고 한다. [출처]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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