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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알 May 03. 2022

하늘을 걷는 아이들

아직 밖이 밝아서 집을 나선다. 사납게 쏟아진 폭우가 그치고 코가 시릴 정도로 바람이 시원하다. 공원 산책로까지 오는 동안 곳곳에 물웅덩이를 제법 발견했다. 포장길과 달리 흙길에 생긴 웅덩이는 꽤나 크고 깊다. 신발이 젖을까 웅덩이를 최대한 멀리해 짧은 다리를 쭈욱 벌리고 살금살금 걷는다.


별안간 뒤에서 있는 돌진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내 허벅지 높이도 안 돼 보이는 꼬맹이가 물웅덩이를 향해 오더니 거침없이 그대로 참방참방 걷는다.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쿵, 쿵, 쿵, 쿵!’ 고인 물은 사방으로 튀고, 아이의 작은 발은 발목까지 들어간다.


 뒤따라 오던 꼬맹이의 형이 깔깔 웃으며 말한다.


“엄마! ㅇㅇ짱이 물에 들어갔어. 이것 좀 봐.”

“えええええ、まさか!에에에에~ 설마!”

“엄마, 근데 ㅇㅇ짱 엄청 좋은가 봐.”

“그래~ 뭐 어때~ 니가 좋으면 됐다. 이미 들어갔는데 어쩌겠니.”


아이의 젖은 신발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웃는 엄마. 그 옆에서 꼬맹이의 형아는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른다.


“ㅇㅇ짱은 귀여워. 너무 귀여워~”


형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걸까? 아이는 벚꽃처럼 웃으며 형을 올려다보더니, 웅덩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형아! 여기! 여기! 여기!”




세 사람이 지나가고 또 다른 가족이 등장한다. 인도나 네팔, 방글라데시 쪽을 여행할 때 익숙한 외모의 외국인들이다. (나 역시 이곳에선 외국인 또는 이방인이지만, 왠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킬 땐 ‘외국인’이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


서너 가족이 한꺼번에 다가오는데 어른 아이 합쳐 15명이 족히 넘어 보인다. 그중, 인형처럼 긴 속눈썹에

까만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예쁘게 딴 여자 아이는 조금 전 꼬맹이가 참방거리던 물웅덩이 앞에서 잠시 주춤한다. 예쁜 핑크색 신발이 젖을까 봐 고민하는 걸까?


뒤따라 오는 자신보다 키가 조금 더 큰 남자아이에게

모국어로 뭐라 말한다. 그러자 남자아이는 개구쟁이처럼 ‘씩’ 웃더니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그대로 물웅덩이로 직행! 다시 물은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그러자 어스름한 해 질 녘인데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배가 두둑한 아저씨가 크게 소리를 친다. 들리는 건 소리일 뿐, 한 단어도 이해할 수 없는 나에게는 그저 소음과 다름없다. blah blah blah 그 옆에서 여자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성이 사색이 되어 아이들을 향해 더 크게 소리를 친다. blah blah blah 두 아이는 결국 어른들에게 연행(?)되어 물 웅덩이를 빠져나온다.


시무룩해진 아이들. 생소한 외국어로 큰 소리가 나는데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분위기는 대충 짐작이 간다.




한편, 이들이 오기 전 물웅덩이를 씩씩하게 걷던 꼬맹이 가족 세 사람은 바로 옆 놀이터의 미끄럼틀에서 신나게 놀고 있다. 휴대폰 카메라로 형제를 찍는 엄마의 얼굴이 아이들보다 더 천진난만하게 즐거워 보인다. 대조적으로 이쪽은 여전히 심각한 분위기이다. 아이들의 큰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고,

중요한 일이 있었는지 한껏 전통의상으로 차려입고 치장을 한 어른들 역시 못마땅한 표정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그 사이 물웅덩이를 지난다. 재미있는 건,  아이들은 한결같이 웅덩이로 용감하게 걸어간다. 반대로 어른들은 웅덩이 앞에서 눈에 띄게 느려진 걸음으로 고양이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그랬다. 조금 전 이곳에 오는 동안 물웅덩이에 신발이 젖을까 피해 걸었다. 깨끗한 신발, 양말, 바지에 웅덩이의 흙탕물이 튈까 봐.


그런데 웅덩이를 신경 쓰느라 그것이 품은 고운 세상을 놓치고 있었다. 비 갠 후, 반짝 나온 해가 어느새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붉게 물든 하늘을 물웅덩이가 쏙 품고 있었다. 어쩌면 아이들은 이 하늘을 보았던 게 아닐까? 이 예쁜 세상을 두 발로 느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신발이 젖을까 노심초사하며 물속의 하늘을 놓치고 있는 어른들과 달리…….


사뿐사뿐 쿵쿵!
아이들은 하늘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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