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일 오전 아홉 시, 또래 여성을 유인해 토막살인한 정유정 씨가 검찰에 송치되었다.
정유정 씨는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으로, 과외를 구한다는 글을 올려 유인한 과외선생을 토막살인한 이유로 “살인을 해보고 싶었다”라고 진술했다. 피해 여성의 가족들은 얼마나 비통할지, 또 그러한 사건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참담한 마음이었다. 얼굴과 이름이 모두 공개된 시점에서 그 누구도 알 수없을 만큼 평범한 얼굴과, 지나가다 접할 만한 사람이 그런 잔혹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경악스러웠다. 범죄 경력도 없고 별다른 경계심을 유발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일상의 만남 속에서 돌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 것일까?
정유정 씨의 잔혹함 범죄로 인한 여러 감정들, 그리고 피해 여성의 애도, 가족들의 참담한 슬픔을 위로하는 마음을 온몸에 깊이 느끼면서, 이 시점에서 참담한 사건을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은 그 사건이 또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정신건강과 영적 깨어남을 위해 공부하는 한 인간으로서 그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어떻게 해야 예방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은 그 사람을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 가의 문제와 별개로 같이 숙고되어야 할 문제이다. 원인을 알아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그 한 사람의 유전적인 영향과 그 한 사람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하나의 빛으로부터 쪼개져 나온 영혼이라는 영성의 관점에서 생각해보고 싶다.
정유정 씨의 정보에 대해 뉴스에 알려진 바로는 할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으며 18년 고등학교 졸업 후 5년간 외부활동이 없었다고 한다. 은둔형 외톨이었을 거라는 추측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인 “외상성 경험이 사람의 사랑의 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유전적으로 사이코패스나 살인자의 DNA를 타고났다는 경우는 제외한다면, (그 DNA를 가진 태아는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대한 논의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과 윤리적인 관점에서의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받은 어떤 외상성 경험들이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알려진 여러 범죄자들의 환경을 조사해 보면 어떤 외상성 자극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음을 많이 알 수 있다. 버지니아 총기 난사 사건의 범죄자로 알려진 조승희의 경우에 생애 자료를 보면 9살 나이에 유학을 가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아로 여겨져 특수교육을 받게 되었고 심각한 따돌림의 경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에서 잔혹무도한 악마로 불리는 ‘요셉 프리츨’의 생애에도 이런 고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모든 범죄자가 외상성 사건들로 인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주장도 아니고, 그래서 그 범죄자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주장도 아니다. 범죄자에게는 그가 속한 사회규칙에 맞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처벌만을 강조해서는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여러 관점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접근방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고, 영성의 관점과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많은 영적스승들의 가르침을 빌어 생각해 보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정유정 씨의 생애를 돌이켜봤을 때 이것이 과연 한 사람의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인가?라고 물어본다. 나의 어린 시절은 불과 일이십 년 전이지만 지금과는 다른 환경이었다. 나 역시 부모의 신체적 정신적 학대 속에 공격적이고 부적응적인 내면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다른 이의 도움을 적절히 받지 못했고 내면과 심리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어느 범죄의 경계에 속해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불우한 환경들을 자극하는 환경은 지금보다는 약했더라고 생각해 본다. 지금은 활발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굳이 몰라도 될 정보들을 너무나 많이 접한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는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난다. 각종 유튜브, 인스타의 제목에는 ‘몇 억, 몇 십억‘이라는 문구들이 난무하고 ’ 가난은 정신병‘이라는 자극적인 카피라이트가 광고로 뜬다. 백만 원에 달하는 스마트폰은 기본이고 황금만능주의의 사상들이 팽배하다. 요즘의 초등학생문화에서 ’ 개근거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빈익빈 부익부는 여전하다. 과거 역사 속에서도 빈부의 격차는 존재했기에 지금의 빈익빈 부익부도 어찌 보면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부적응적인 내가 지금의 세상을 살아간다면 더 괴롭고 상처가 덧날만큼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지금의 세상은 어리고 순수한 아이들에게 더 자극적인 세상이다.
그것뿐인가.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는 어른 20명 인분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나. 지금의 양육환경은 어떠한가 본다면 과거에 비해 정신적으로는 더 열악한 환경이다. 가족의 기본단위가 작아지면서 기껏해야 조부모님을 만나고, 그 외에는 옆집에는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옆집에 ‘정유정’씨가 살고 있다고 해도 알 수가 없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회복될 수 있는 공동체와 사랑이 부족하다. 사람을 경계하는 교육을 강조한다. 사랑하는 능력을 개인도, 공동체도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또 다른 ’ 정유정‘씨는 어디에 있는가? 수면에 드러내지 않았을 뿐 어딘가에 상처받고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상처들이 외부로 발산하게 된다면 그것이 범죄행동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으로 드러날 테고, 그것이 내면을 공격하게 된다면 ’ 자살‘이라는 자기 파괴적인 행태로 나타날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얼마 전에 사회부적응적인 사람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며 ’저 사람 왜 저래, 멀리해야겠다.‘라고 생각했던 나의 미숙함을 반성했다. 그러한 사람을 규정하고 판단하고 경계를 지어버리는 나의 행위가 또 다른 ’ 정유정‘씨를 사지로 몰아가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금 나는 여기 나의 현실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 다른 ’나‘이자 또 다른 ’ 정유정‘씨를 본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또 다른 사람에 상처받고 온 나의 아이들에게는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하나.
모든 사람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나에게 피해를 끼친다면 내가 그것을 포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이지, 그 사람이 ‘절대 악’이기 때문이 아니다. 또 아이들에게 세상을 신뢰하고 사랑을 나누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사회부적응적인 아이를 보면서 ‘놀지 마라, 걔는 나쁜 아이이다.’라고 판단 내리게 할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왜 그렇게 행동할까? 그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할 때 너는 너를 어떻게 지켜야 할까? 그 아이를 도와줄 수 있다면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하고 질문할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디팩 초프라의 <부모수업>에서처럼 자녀의 영성을 일깨워야 한다. 영혼을 깨울 수 있는 일곱 가지 지혜를 부모인 나도 배워야 한다. ‘정유정’씨의 사건으로 인해서 깨어있는 영혼들이 경각심을 느끼고 곳곳에 상처받고 웅크리고 있을 이들을 도울 손길을 내밀 기회가 된다면 위기로 인한 기회가 되지 않을까. 삶의 목적이 있다는 디팩 초프라의 말에 따라 이러한 참담한 사건을 애도하는 동시에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