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지 않은 것은 줄 수도 없다. 이 말은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는 말과 같다. 배려 깊은 사랑도 받아본 놈이 줄 수도 있다. 아이를 키우며 힘들 때면 육아도서를 뒤적거리며 읽어봐도 늘 그때뿐인 나는, 나에 대한 실망감과 자책감만 깊어갔다. 아이가 이렇게 떼를 쓸 때에는 이러이러한 말을 하라고 했는데, 분명 알고 있는데 왜 나는 그 상황만 되면 화가 날까.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화를 내고 난 후다. 알고 있는데 책을 분명히 읽었는데 실천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몸부림을 치며 이 책 저 책을 읽으며 ‘내면아이’에 대해 발견하게 되었을 때 너무도 큰 위로가 되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는 말을 왜 아무도 나에게 해주지 않았을까. 그 말을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와닿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처럼 스스로 자책하고 가슴 아파할 엄마들에게 어떻게 하면 내가 받은 위로를 전달할 수 있을까 하다가, 적절한 비유를 찾았다. 바로 ‘암묵지’에 대한 설명이다.
‘세상을 읽는 새로운 언어, 빅데이터’에 따르면 인공지능 컴퓨터가 학습하기 힘든 지식은 ‘암묵지’를 이용한 행위들이라고 한다. 암묵지란 우리가 할 줄은 알지만 어떠한 지식을 이용해서 하는지는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암묵적 지식이라고 한다.
암묵지가 필요한 활동들은 걷기, 잡담하기, 운전하기 같은 우리가 힘들이지 않고 잘하는 일이지만 딱히 어떠한 지식을 사용하는지 애매한 암묵지이다.
걸을 때만 해도 어떤 근육을 몇 번 수축하고 몇 초 뒤에 다른 근육을 이완해서 … 등등의 명시적인 의식을 통해 걷는 사람이 없다. 운전도 마찬가지다. ‘앞차가 멀리 있으면 액셀을 밟아라. 앞차가 갑자기 속도를 줄이면 브레이크를 밟아라.’ 이 정도의 지시를 자동차를 생전 처음 운전해보는 사람에게 내린다면? 정확히 몇 미터가 먼 것인지? 어느 정도 힘으로 액셀을 밟아야 하는 것인지? 이러한 구체적 수치에 대한 몸의 감각이 전혀 없다. 이러한 지식들은 몸으로 경험하며 습득하는 것이다.
‘배려 깊은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어릴 때 집안에서 인격적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배려 깊은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이라는 행위정보에 ‘암묵지’ 데이터가 백지인 상태다. ‘인격적’인 것은 어느 단어까지 써야 인격적인 것인지, 목소리톤은 높은지 빠른지, 사랑을 표현하는 눈빛은 정확히 어느 정도의 눈동자 굴림인지, 어떤 표정이고 입술의 양끝은 어느 높이로 위치하는 것인지, 알 수없다. 경험한 자 만이 알 수 있다.
배려 깊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감사하게도 조상의 유산을 잘 물려받은 셈이다. 그 사람은 1만큼의 노력만 들여도 쉽게 배려 깊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배려 깊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은 대대로 내려온 유산이 그럴 뿐인 것이다. 그 사람은 그 흐름을 거슬러 암묵지가 없는 배려 깊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몇 배는 많은 노력을 해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잘나서 배려 깊은 사랑을 하고 누구는 못나서 배려 깊은 사랑을 못하는 게 아니다. 억울하지만 나는 물려받은 사랑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