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사망

무연고자

by Viki

2024. 08. 16.
완벽한 고아! 마지막 복수! 외롭게 가라 그래!
(중략)
빚이 있든, 재산이 있든, 엮이고 싶지 않다!!
우연이라도 길 가다 마주칠 일 없어서 좋다.
칼을 들고 다니던 20대가 참.. 안쓰럽다.
그동안 고생했어, 나 자신!
난 죽는 그날까지 후회 없이 살다가 가자!
a.m. 11:13 거실 내 책상에서

위에 글은 작년에 쓴 메모지의 내용이다.
메모지는 그대로 감정 일기에 붙여뒀다.

2024년 8월 여름휴가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복지사라고 소개하며 ○○○님의 따님인지 묻는 문자였다. ○○○님이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라 연락을 드렸다고 한다.
'친부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보이스피싱이 의심되었다.
문자에 적힌 연락 달라는 전화번호를 검색해 봤다.
이런, 보이스피싱이 아닌가 보다.
면사무소 이름이 나온다.
동생에게 말하니 우리랑 상관없는 사람이니 무시하라고 했다.
그렇지, 우리랑 상관없는 사람이지.
연락이 끊긴 지 20년이 넘었으니까.

즐거워야 할 여름휴가가 괜히 찜찜해졌다.
알고 싶지 않았던 부친의 요양병원 입원 소식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 여름휴가가 끝나고 며칠 후, 문자가 또 왔다.
이번엔 사망 소식이다.

슬프지 않았다.
참 못되게 들리겠지만, 난 후련했다.
나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으니까.
'남보다 못한 가족'이란 표현이 떠오르는 사람이니까.
친자식이라는 이유로 제출해야 할 서류가 오히려 귀찮게 느껴졌다.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시신처리위임서와 사체포기각서를 빠르게 작성해서 복지사님께 보내드렸다.

그렇게 끝났다.
나중에 받아본 화장터 사진에는 부친의 이름 위에 '무연고자'라는 단어가 함께 쓰여있었다.

아빠 역할을 제대로 못한 벌을 죽어서도 받길 바란다.
자식을 때린 벌, 아내를 때린 벌, 제발 다 받길.

그날 이후, 나는 오래된 기억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안에는 웃음보다 눈물이, 기쁨보다 상처가 더 많았다.
어쩌면 나는 늘 버티는 법만 배운 사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알겠다.
상처가 내게 남긴 것은 단순한 흉터가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었다는 것을.
부서지고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싹이 자라듯,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
때때로 흔들리고, 여전히 아픈 기억에 잠 못 드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예전의 나보다 단단해졌고, 더 이상 과거에 매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상처를 딛고 서 있다.
과거가 내 발목을 잡던 시절은 끝났다.
혹시 지금 아픈 시간을 보내는 누군가가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언젠가 당신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잘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