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승구 Feb 04. 2023

37. 자전거 마실길

 입추가 지나간 가을 어느 날 마음의 여유를 얻어 자전거 마실 길에 나섰다. 만경강가에는 억새와 갈대가 어우러져 춤을 추듯 하늘거린다. 자전거 전용도로를 달리면서 대보 둑에 자리 잡은 수많은 수목들을 스쳐가는 데 그중에서도 반갑게 눈길이 닿는 초목이 있다. 

 암크령과 수크령인데 어릴 적 친구들과 풀싸움하던 풀이라서 더욱 반가웠다. 그들은 우마차가 다니던 시절부터 사람의 발길에 짓눌려도 죽지 않고, 끈질긴 삶을 유지하며 자생한다. 꽃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핀 것이 암크령이고, 강아지풀꽃과 닮은 것들이 수크령이다. 그것들은 모양은 비슷하지만, 암꽃과 수꽃 관계가 아닌 아예 다른 풀이다. 암크령은 길 한가운데 밟히는 곳에서 살고, 수크령은 가장자리에서 산다. ‘그령’은‘당겨 매기(두 끝을 당기어 매다)’를 어원으로‘그렁’이 변하여 된 우리말로 중국 고사인 ‘결초보은(結草報恩)’으로 알려진 풀이다. 죽어서도 은혜를 갚는다는 ‘결초보은’의 이야기는 두 명의 아내와 아들과 함께 살던 중국 진나라 위무자가 병이 들어서 자기가 죽으면 둘째 부인은 개가(改嫁)시키라고 유언했다가 죽음에 가까워지더니, 마음이 변하여 순장(殉葬)하라고 말을 바꾼다. 

 아들 위과(魏顆)는 고민 끝에 조금이라도 정신이 멀쩡할 때 했던 유언이 진짜라고 생각하여 개가를 시킨다. 위과가 전쟁에 출전하여 적장에게 밀려 도망을 치는데, 죽음의 고비에서 둘째 부인의 죽은 아버지 무덤 위의 풀이 갑자기 올라와 올가미를 만들어 추적해오던 적장의 발목을 붙잡아 목숨을 건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죽어서도 잊지 않고 반듯이 은혜에 보답한다.”라는 의미로 탄생한 고사성어다.     


 평소 만경강 제수문 수문 앞에는 청둥오리와 황새들이 모여서 영역을 지키며, 평화로운 아침 식사를 즐긴다. 오늘은 수문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청둥오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황새들은 하늘을 빙빙 돌면서 뭔가를 궁리하는 것 같다. 다리의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중년의 사나이가 돌 위에 서서 새들의 아침 밥상을 흔들고 있다. 낚시꾼을 쫓아주면 새들은 나에게 무엇을 해줄까? 흥부의 제비처럼 박씨라도 하나 물어다 줄까? 낚시꾼들이 더 모여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뒤로하면서 가던 길을 재촉해본다.  

 제수문 다리를 건너 조금 달려가니 풍광 좋은 곳에 정자가 보인다. 백구정(白鷗亭)이다. 백구정 마을은 낚시를 즐기던 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여 살던 마을로 정승 김현태가 지방 순시 차, 전주부로 가던 중 이곳 정자에서 쉬다가 앞산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보면 볼수록 흰 갈매기가 앉아 있는 모습처럼 생겼다고 하여 정자 이름을 백구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정자에는 바둑이나 장기를 즐기던 옛 선비들의 정취가 물씬 풍겨 나온다.

 백구정 나루터는 다리(교량)가 생기기 전에 익산시(옛 지명 솜리)로 통하는 유일한 해상 교통로였다. 나룻배는 마을에서 사공을 고용하여 운영했고, 1년에 한 번씩 가구당 보리쌀 한 말씩을 모아 사공에게 품삯을 주었다고 한다. 배를 기다리며 주막에서 뚝배기로 허기를 채우던 나그네들의 시름을 풍악과 풍류로 덜어주던 백구정 나루터, 한량들은 훗날 호남우도농악을 태동시킨 백구 농악의 선도자들이다. 

 음력 5월 5일 단옷날의 만경강은 동네 아낙들로 가득했었다. 너도나도 세숫대야 하나씩 들고 머리를 감으러 가는 인파들로 모여드는 단옷날 세시풍습(歲時風習)은 가히 가관이었다고 한다.

 만경강 다리가 건설되고는 그들의 몸부림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나룻배와 사공, 주막과 주모, 백사장과 모래찜질하던 아낙네들, 갯벌과 조개 잡는 사람들 그리고 장어잡이와 장어를 좋아하는 맛객들 모두 이제는 제 살길을 찾아 떠나간 뒤 흔적들만 쓸쓸해진다.  


 자연은 영악하다. 건들면 재앙으로 답을 한다. 이러한 인위적인 편리함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태계를 무너뜨리면서 사람냄새의 향긋함마저 앗아갔다.  제수문이 물길을 막기 전에는 만경강의 수심이 깊어 상류까지 소금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오늘날 상류 쪽 강가 대부분은 풀밭과 물구덩이로 강(江)이 아닌 천(川)으로 변해버렸다. 

 새로운 것도 좋지만 옛것을 유지 보수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황금빛 갈대밭을 따라가다 보면 노년기에 접어드는 시민들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청하 파크골프장을 바라보면서 ‘새챙이다리’를 건너 익산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자전거 마실 나들이를 마쳐간다. (※마실-강원도, 경기, 경상, 충청도, 전라도에서 쓰이는 ‘마을’의 방언)


2023년 2월 국보문학 수필 등단작

작가의 이전글 36. 광야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