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여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돌아보면 나에게도 좋은 선생이 많이 있었다.
직업적 교사와 더불어 선배와 후배 그리고 친인척들 그들은 알게 모르게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친구들은 긴 시간 깊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사상과 가치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했지만 결국 나에게 배움과 성장을 가져다주었다.
신앙도 그랬다. 40여 년의 교회생활 중 20대의 기억이 가장 또렷하다.
그때 나는 폭풍성장을 경험했다. 모든 말씀에 스펀지처럼 반응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 청년부의 신앙은 아주 뜨거웠다. 그리고 아주 체험적이었다.
거기에 성경 공부에도 열심을 기울였으니 균형 잡힌 신앙생활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나에게도 참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자기를 부정하고...라는 단어였다. 뭔가 거부감이 밀려들고 어떻게든 양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잔뜩 드는 것이었다. 습관도 행동도 나의 주관도 다 거절하는 성경 앞에서 강요당하는 기분이었다.
하나님이 지나치다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때로는 이 정도면 된 것 아닌가요?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아주 컸다. 그래도 하나님과 반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신앙의 선배들에게 질문하고 또 질문하면서 대답을 얻고
또 삶의 현장에서 다시금 절망하는 순간을 반복했다.
신앙은 삶의 구조 전체에 아주 세밀하고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은 내 이전의 가치관이 무용함을 알려주었다.
친구관계에서 또 좋아하는 음악에서 책 읽기에서 나는 모든 것을 간섭받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밤이 되면 또 새벽 이른 시간 이면 나는 그 무익한 것을 놓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산에 올라 기도에 몰입하기도 했었다. 또 금식하며 은혜를 구하기도 했었다.
텅 빈 교회 그 길고 긴 장의자에 앉아서 강대상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 이래서 그 옛날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을 드렸구나!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보잘것없는 나 일 지라도 자신이 죽고 예수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배우고 또 배워서 이루어 가고 그래도 안되면 광야를 통해서 만들어 가시고 그것도 불가능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 이심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교회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그 뿌리 깊은 죄성을 도려내어 진정한 자유를 선포하기 위해서 목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의 무게가 바로 교회의 무게요 목회의 무게인 것이다.
바울과 디모데의 잠 못 드는 밤이 오늘 우리 모든 목사들이 가진 현실의 무게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바울은 디모데 에게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라고 언급한다.
다른 교훈은 예수님을 벗어난 다른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수님은 세상을 향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그래서 그분의 호칭은 랍비 곧 선생이라 불렸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질투와 모함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많은 변화와 더불어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도 했다.
심플하지만 깊이 있는 가르침과 넘치는 설득력.
치열한 경쟁과 율법의 굴레에 매이지 않는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 그 첫 번째 가르침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는 선포였다.
예수님의 행복론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며 그 나라는 회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사변적이고 차별적인 율법 교사의 가르침보다 이 새로운 선생이신 예수님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평을 열었던 것이 우리의 목자 예수님 이셨다.
바울은 그 가르침을 직접 대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당시 바울의 신앙에서 예수님의 설교는 이단적 가르침이었다.. 구약을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율법의 완전한 실천을 추구하며 흠없이 살기를 힘쓰던 바울은 행동하는 정의로 구원을 얻고자 했다.
회개를 통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바울에게 그런 가르침은 율법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러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아오른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선언"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바리새파였던 바울의 삶을 전체적으로 부정하는 뼈아픈 선포가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전에 바울 자신은 그 다른 교훈의 선생이요 주동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 집요하게 배워온 다른 교훈을 버리고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하였을까? 바울은 구약의 율법의 한계와 그리스도를 인해 주어지는 은혜의 복음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행전 9장을 통해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눈에서 벗겨져 나간 그 비늘 같은 것, 그렇게 다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사도행전 9 장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그렇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 강렬한 빛 앞에서 눈이 멀게 되었다.
아니 그는 이미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안수를 받으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얻게 된다. 그리고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으니 이로서 다시금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였다.
회개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행위에서 나지 않고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
바울은 이미 구약에 능통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단번의 기름 부으심으로 그를 새롭게 한 것이다.
그것 외에 어떤 가르침이 이렇게 바울을 새롭게 할 수 있겠는가?
지성을 넘어선 그 무엇! 그 새로운 지성의 세계에서 볼 때 이전에 알던 것들이 유익이 아니라 해로운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 고상함이 아니라 배설물이었다. 그렇게 바울이 신화와 족보를 버렸는데 에베소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에 다시금 그런 신화와 족보를 자랑하는 가르침이 들어온 것이다.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이렇듯! 세상은 신화로 가득하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그 신화들을 배우고 암기하기에 매우 분주했다.
급기야 그 배움은 우리를 더 단단한 비늘 속에 가두어 영적인 맹인으로 살도록 만들어 갔다.
그 신화와 족보 덕분에 오늘도 많은 지성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된 것이다.
심리학의 신화
상담학의 신화
교육학의 신화
정치학의 신화
과학과 이성의 신화
그리고 문화적 콘텐츠 속에 있는 다양한 신화 속에 골리앗과 같이 족보에 오를만한 인물이 가득하다.
각 분야에 바벨탑을 쌓았던 자들의 이름을 외우며 그것을 본받으려는 움직임은 학교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꿈틀거린다.
세상의 끝없는 신화와 족보에 어느 순간 교회도 노출되고 그것이 성공으로 신앙의 승리로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변론을 낸다고 말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변론 속에서 갑론을박 교회는 혼란과 분열을 거듭하고 지나온 것이다.
이것이 2000년 이후 한국교회의 사정이기도 하다.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의 목적을 디모데와 오늘 우리 목사들의 가르침 속에 일러준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이끌어 가는 그 사랑의 복음으로 성도를 가르칠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헛된 말에 빠지지 말 것을............
그렇게 모든 성도들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게 하는 것은 오직 복음 밖에 없음을 전하는 것이다.
믿음의 거장들도 누구나 이런 과정을 통과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될 때
얍복강의 야곱이 밤새워 씨름하며 이스라엘의 이름을 얻었을 때
모세의 40년 광야 생활과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서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
그때 비로소 비늘은 벗겨지고 복음의 능력이 삶 속에 나타난 것이다.
허탄한 가르침은 디모데 후서 3장의 말씀처럼 경건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비가오고 바람이 불면 다 무너지고 쓸려간다.이것이 신화의 종말이다.
우리의 가르침의 최종 목적 그것은 시몬 베드로와 같은 대답을 예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말씀의 교육과 광야의 학교 그리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믿는
그대는 예수님을 누구라 생각하는가?
그렇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교회에 가득해야 한다.
그 사람들의 찬송이 세상에 울려 퍼져야 한다. 그런 고백 만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키워 가는 것이다.... 엘리야나세례요한쯤으로는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음부의 권세에 눌려 꿈을 잃어버리고
골리앗이 되고 싶은 교회
바벨탑을 쌓고 싶은 교회
여리고 성처럼 단단하고 싶은 교회.. 그런 교회가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아니다.
세상의 권세는 지난 시대에도 지금 시대에도 쉼 없이 교회를 공격한다.
이미 유럽 교회가 오래전에 패전하였고 미국 교회가 그 위태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도 수많은 이슈를 통해서 공격받고 그리고 극심한 분열에 시달리고 있다.
다음 세대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잣대도 없이 세속의 논리에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다.
우리는 어떻게 다시금 세워져야 하는가?
신앙의 지성을 포기하거나
치우친 영성에 사로잡히거나
기복 신앙과 더불어 기적에 매이는 신앙
맘몬의 신앙과 인본주의적 신앙
인권옹호의 기형적 형태인
포괄적 차별 금지법에 대한 위기와 낙태권의 보장 그리고 안락사에 대한 선택까지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은 성경의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기에 이르고 있다.
바울이나 디모데나 오늘 우리 목회자는 다른 교훈으로 넘쳐나는 오늘의 거대한 현상앞에서 이 복음을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