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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라맘 끌레어 Oct 13. 2022

신사인 지킬과 해적인 하이드가 사는 나라

영국인의 민낯

영국 땅을 처음 밟은 건 고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고에서 ‘유럽 예술 탐방 교육’이라는 명칭으로 7개국 뮤지엄을 관람하러 왔는데, 다른 어떤 나라보다 좋은 기억이 많았다.

호텔에서 캐리어를 들고 계단으로 옮기는 데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나온 것 같은 주인공이 어디선가 나타나 들어주기도 하고, 환전하는 장소가 필요해 길을 물어보면 베네딕트 컴버배치처럼 생긴 분이 아주 친절하게 답하며 길을 안내해주기까지.

여고생으로 왔던 영국이나, 20년이 지난 지금이나 친절함은 여전하다. 나 홀로 유모차를 끌고 튜브(런던 지하철)를 탈 때 계단이 보이면 어디선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나타나는 영국 사람들. 이런 작은 에피소드 덕분인지 런던은 더 매력적인 도시로 느껴진다.

코로나19 전에는 신랑 회사가 있는 뱅크역(bank station) 근처로 필라테스(@Pure Sports Medicine)를 다녔다. 근처 카페나 음식점에 혼자 들어갈 때면 댄디한 옷차림의 영국 신사들이 문을 잡아주고, (신랑이 소개해준) 물리치료사(Physio therapist) 선생님은 190cm 이상으로 보이는 키에 젊은 휴 그랜트 얼굴을 가진 파란 눈의 영국인이다. 말하는 것부터 행동하는 것 모든 게 매너와 예의로 무장된 제스처, 얼굴에는 ‘나 선한 사람이에요!’라듯 사슴처럼 큰 눈이 처져 있다. 선생님이 좋으니 운동하는 것도 즐겁고, 숙제도 열심히 한다.


좌: 유리창 너머에 서서 맥주 마시는 영국인들, 우: 퇴근 후 서서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영국인들

뱅크역의 댄디한 영국 신사는 퇴근 후에도 이어진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풍경 중 하나인 펍에서 맥주를 서서 마시는 영국인들. 바깥공기 마시면서 가볍게 맥주 한두 잔 마신 후 귀가한다? 자기 관리 잘하는 모습, 좋은 이미지로만 수집하고 싶은데 주변에서 찬물을 끼얹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을 함께 가지고 있다네.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 여인과 잘생긴 남자가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그들의 사랑스러운 겉모습은 그들의 영혼이 일으킨 사기 행각이야!

출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킬 박사와 하이드] 이미애 역 (푸른숲주니어, 2007)


어학원을 다니자니 시간이 안 맞아 집에서 잠깐 영어 과외를 했었다. 키는 170cm 정도, 브리티시 악센트에 주변에서 가만히 안 뒀을 것 같은 우아한 외모를 가졌는데 결혼을 안 했다.(본업은 영어 강사, 부업은 배우)


“영국인은 어때?”

“(중략) 난 영국인이랑 결혼하기 싫어. 밖에서는 신사 인척, 저녁에 집에 와서 마누라 팬다는 얘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결혼을 한다면 섬나라 영국인보다 육지에 사는 유럽인이 좋아.”


처음에는 설마?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예쁜 유럽을 여행 다니다 영국도 가봐야지 하던 어느 주말이 왔다. 바스(Bath) 버밍엄(Birmingham) 둘을 두고 고민하다 영국 제2의 도시 버밍엄으로 가기로 한다. (이유는 영국에서 최대 규모의 독일식 크리스마스 마켓에 상인들도 독일인들이 운영한다기에) 영국답게 비가 오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너무 익숙했으나 나를 놀라게 만들었던 것은 유럽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영국인이 쓴 [지킬박사와 하이드]에 견준다면,

뱅크역에서
문 잡아 주던 사람은 ‘지킬’이요.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술에 취해 하이퍼 된 사람은 ‘하이드’ 요


맥주잔을 잘 들지도 못할 만큼 휘청거린다. 그냥 하이퍼 된 것이 아니라 분명 취했다. 아랫 공기를 마시며 유모차에 타고 있는 어린 엘라가 위태롭다. (유리잔이 아닌 맥주가 조금 엎질러진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하는 상황)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이렇게 흥분된 사람들을 본 적은 없었는데…(더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급기야 한 공간에 있다가는 괜히 시비 붙을 것 같아 얼른 숙소로 돌아왔다.

이런 경험은 축구장에서도 이어진다. 축구에 큰 관심이 없는 우리, 지인이 구해준 표로 축구장에 갔다. 그 말은 자의적으로 응원팀에 앉았다기보다 타의적으로 A팀 관중에 앉았고, 관망한다. 그런데 B팀이 골을 넣자 앞에 앉은 아빠는 쌍욕을 하며 그 흥분됨을 감추지 못해 앉았다 섰다 어쩔 줄 몰라한다. 옆자리에 아들을 포함해 아이들이 많았지만 안중에도 없다.

좌: 흥분됨을 감추지 못해 앉았다 섰다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 우:
우: 경기가 있는 날 맥주잔 들고 있는 사람들로 꽉 찬 펍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나라 영국. 저자 스티븐스가 살았던 시대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었던 빅토리아 시대였다. 본토에서는 온갖 고상한 척을 하던 사람들이 식민지에 가서는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악행까지 서슴지 않았던 그들.


살아보니 영국은 신사인 ‘지킬’과 해적인 ‘하이드’가 공존하는 나라였다. 조용한 신사가 화내면 더 무서운 법이고, 알 수 없는 속마음은 일본인 같기도 했다. 그렇게 난 콩깍지가 벗겨지듯 영국인의 민낯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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