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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X Jan 19. 2023

웃음이 사라진 자리

웃음이 어린 시절의 전유물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거의 모든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어릴 땐 웃음이 참 많았다. 똥이나 방귀 같은 유치한 단어 하나만 가지고도 온종일 배를 움켜쥐고 깔깔댔다. 어린이들은 참 많이 웃는다. 한때 어린이였을 나는 요즘 통 웃을 일이 없다. 마지막으로 숨넘어가게 바닥을 구르며 웃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다.

어릴 적 나는 동물원에 가는 것을 참 좋아했다. 특히 북극곰 같은 맹수의 위용이나 범고래의 부드러운 유영을 보며 함박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의 나는 동물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싫어한다. 북극곰이 자그마한 얼음에 몸을 비비는 모습이나 범고래가 냉동 정어리를 얻어 먹기위해 높게 점프하는 모습이 더 이상 나를 웃음 짓게 하지 않는다. 누군가 꽈당하고 넘어지는 모습이 어릴 땐 참 웃겼는데, 지금은 조금도 웃기지 않는다.


누군가의 웃음은 그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알려준다. 유머 코드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지루하고, 같은 이유로 웃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이 채워온 시간과 만들어온 가치관이 나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면서 재미있던 것이 더 이상 재미있지 않은 순간들이 온다. 웃기던 것들이 웃기지 않은 순간들이 온다. 어림의 상실과 함께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 이제는 쓴웃음과 비웃음이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웃기지도 않는 일에 쓴웃음을 짓고, 웃기지도 않는 이들을 향해 비웃음을 보내기도 한다.


전쟁이나 기후변화와 같은 거대한 문제들 앞에서 나의 작은 힘으론 도무지 그런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현실적 좌절들로 인한 무력함에 쓴웃음을 짓는다. 전쟁 반대 서명 운동지에 이름과 주소를 쓰고 무라벨 생수를 구매하는 따위의 나의 하찮은 노력이 뭔가 이러저러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자위하며 나름의 작은 실천들을 하면서도, 커다란 수레 앞을 막는 무모하면서도 무력한 사마귀가 된 기분을 감출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어린 시절 대통령도 되고 슈퍼맨도 되어 세계 평화와 인류 번영을 나의 손으로 이룩해 내겠다는 꿈을 펼치던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진 나를 비하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온갖 차별과 혐오, 학대와 착취가 난장을 부리는 작태와 부끄러움을 잊고 어리석음을 자랑처럼 뽐내는 이들을 향해 비웃음을 짓는다. 짧은 강의 하나 듣고, 글 몇 줄 읽은 게 고작이면서도 제 혼자 우주의 진리를 깨우친 성인이라도 된 것처럼 절대적인 옳고 그름을 멋대로 재단하고 평가한다. 어린 시절 쉬운 문제도 잘 모르겠다며 부끄러워했던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도덕적 우월감에 양껏 도취되어 여기저기 비웃음을 보낸다.


자기 비하와 자아도취의 양극단을 오가며 흔들거리는 나를 보면서 또 쓰게 웃고 비웃는다. 나의 웃음이 고작 이런 것이었나 자조하며 허탈하게 웃는다. 나의 웃음이 부디 조금은 더 부드럽고 성숙한 미소로 변하길 막연하게 기대하는 나를 보며 또 실소한다. 박장대소, 파안대소가 아니면 어떠할까. 웃음이 줄었다고 슬픔이 커진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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